조선조 태종에게 귀찮은 존재가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잘잘못을 기록해대는 사관이었다. 1401년 태종이 화를 터뜨리며 ‘사관 금족령’을 내렸다.
“편전은 임금이 쉬는 곳이야. 사관은 들어오지마!”
그러나 사관 민인생은 고개를 세우고 대꾸했다.
“정사를 논하는 편전에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면 어찌 기록한단 말입니까. 사관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上有皇天).”
3년 뒤인 1404년 태종 임금이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임금이 급히 일어나면서 측근에게 입단속을 명했다.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
기막힌 일이다. 사관이 ‘쓰지말라’는 임금의 오프더레코드 명령까지 고스란히 <태종실록>에 기록했으니 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최저가 임금을 살해했다. 그 때 사관 3형제가 차례차례 나서 ‘최저가 임금을 죽였다’고 썼다. 최저는 “쓰지 말라”면서 큰형, 둘째형을 죽였다. 하지만 막내동생까지 나서 사실을 기록하자 두손 들고 말았다.
역사가들이 이같은 서릿발 자세를 보인 까닭이 있다. <동사강목>의 안정복은 “쓰지 않으면 선악의 자취가 깡그리 사라져 난신적자들이 날뛰기 때문”이라 했다.
<춘추필법>에 따른 역사가의 객관적이고 엄정한 비판이 없다면 바로 ‘군자의 불행이요, 소인의 다행’이라는 것이다.
정부가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결정하자 교원대·연세대·경희대·고려대 사학과 교수들이 줄줄이 ‘국정교과서 집필 불참 선언’에 동참했다.
한영우·이만열 등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원로학자 다수도 국정교과서를 반대하고 있다. 모든 시대사를 통괄하는 학술단체인 한국역사연구회도 비상총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가히 역사학의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역사가의 엄정한 평가를 받아야 할 정치 지도자가 오히려 역사를 쥐락펴락하는 어이없는 비상상황이 아닌가.
1735년 영조 임금이 대신들과 나눴던 밀담을 기록한 사초를 불태웠다. 전직 사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상소문을 올렸다.
“목이 달아난다 해도 사필을 굽힐 수 없습니다(頭可斷 筆不可斷).”
그러면서 사관이 목숨을 내놓고 직필하려는 이유를 알렸다. “후세의 폐단을 만들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역사가들도 양심을 지키려 하고 있다. 후세를 위해….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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