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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천마총이냐 기린총이냐…물러설 수 없는 논쟁

경주에 가보면 엄청난 규모의 무덤이 한복판에 늘어서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반에 공개된 무덤이 바로 천마총입니다. 원래는 황남동 155호 고분이었다가 1973년 발굴 이후 천마총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무덤에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금관이 발굴됐습니다. 그렇다면 국보 중의 국보인 금관과 관련된 이름이 붙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바로 상상의 동물인 천마가 그려진 말다래가 3벌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1벌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후다닥 튀어나와 하늘로 훌쩍 날 것 같은 생생한 천마그림이었습니다. 1500년전 신라인들의 빼어난 회화작품이었습니다. 그러니 천마총의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당연히 국보(207호)가 되었지요. 그런데 발굴 30년 여 년이 지난 2000년 무렵부터 다른 주장이 나옵니다. 그림이 천마가 아닌 기린이라는 겁니다. 기린? 우리가 아는 아프리카 기린이 아닙니다. 성인의 치세에 나타난다는 바로 그 상상의 동물입니다. 기린은 바로 공자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동물이기도 합니다. 이후부터 천마냐 기린이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2009년엔 국보 천마도의 천마 위에 뿔 형상이 보인다면서 이것은 전형적인 기린의 모습이라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습니다. 그런가하면 2013년인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다른 말다래(1971년 발굴한 3벌 가운데 다른 한 벌)를 복원해본 결과 갈기 형성이 뚜렷한 천마가 보였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천마가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과연 어떤 주장이 맞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16회는 ‘천마총인가, 기린총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입니다. 

 

경주에 가면 시내 한 가운데 고분공원인 대릉원(大陵苑)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옛 신라시대 높은 신분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 가운데는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한 무덤이 있다.

 

바로 천마총(天馬塚)이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덤의 이름이 천마총이란 것에 의아해 한다. 금관이 있고 금은보화가 가득하게 묻혀 있어 아무리 보아도 신라 임금의 무덤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하늘을 나는 말()의 무덤인가. 천마총은 19737월에 발굴 조사되었다. 광복 후 최초로 신라 금관이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무덤으로도 유명하다.

 

이제 천마총에 그려진 천마의 비밀과 이 능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을 다뤄보고자 한다.

 

1973년 천마총에서 수습한 말다래. 당시 말다래는 3점(1점은 추정) 발견됐지만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는 상태가 좋았다. 천마의 그림이라 해서 무덤 자체를 천마총이라 했다. 그러다 2000년대부터 천마가 아닌 기린(상상의 동물)일 가능성도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2009년 적외선 촬영결과 천마의 머리 위에 뿔 형상이 나타났다. 이로써 기린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에 무게가 실렸다. 이 그림은 국립경주박물관이 복원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국보 207호)       

 

71년 대선개표를 경주에서 맞이한 박정희

원래 천마총 발굴은 시험용이었다. 경주 평지에 남아있는 신라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쌍분인 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 조사하기 전, ‘예비지식을 얻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다.

 

여기서 여담. 당시 박대통령은 1971427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천신만고 끝에 누르고 당선됐는데(박정희가 김대중을 63429백표 대 53959백표로 이겼다), 그 숨 막히는 개표장면을 불국사 경내에 있는 경주관광호텔에서 지켜보았을 정도로 경주에 애착을 보였다.

 

당선 2개월만인 6월 대통령은 민족문화유산의 보존계승과 반도 통일의 위업을 성취한 통일정신 숭앙 등을 내세우며 그 유명한 경주관광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을 세운다.

 

‘시험발굴용 천마총

이 경주개발계획에 포함된 내용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신라 최고(最高최대의 무덤인 98호분을 발굴 조사하고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으로 하고자 하는 계획이 들어 있었다.

 

98호분은 높이 25, 하부 길이가 120나 되는 부부묘(夫婦墓)이다. 쌍분(雙墳) 혹은 외형이 마치 표주박처럼 생겼다고 해서 표형분(瓢形墳)이라고 했던 신라시대 무덤이다.

 

자작나무 껍질을 화폭삼아 그린 말다래의 원 모습.

‘98호분이냐 하면 신라시대 커다란 무덤의 현황조사에서 일련번호가 98호이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이렇게 큰 신라무덤을 발굴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98호분과 인접해 있으면서(130떨어져 있었다) 외형이 많이 파괴됐지만 비교적 규모가 큰 155호분을 시험발굴, 경험을 축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런 뒤 98호분을 본격적으로 발굴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험대상의 발굴 무덤에서 뜻밖에 대박이 터질 줄이야.

 

바로 어느 누구의 손에도 도굴의 화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찬란한 신라금관은 물론 금제의 호화로운 허리띠와 그 장식은 물론, 목에 걸었던 경식(頸飾)1만점이 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유물이 나오지 않아 학술적인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천마가 환생했다

사실 발굴 조사를 완료한 후 학술적인 명칭을 부여하는 자체도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가장 합당한 이름이 무엇인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게 된다.

 

무덤에서 출토된 모든 유물은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누구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말하자면 대표성을 찾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

 

155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 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된 유물이 바로 말다래에 그려져 있는 천마도였다. 말다래는 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뒤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이다.

 

사실 천마총에서 말다래는 3벌 발견됐다. 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올린 금동판 말다래 1벌과,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1벌, 그리고 썩어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1벌 등….

 

그런데 2벌은 워낙 훼손이 많아 당시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부장품 상자 위쪽에서 발견된 자작나무 껍질(백화수피)로 만든 말다래 1벌이 발굴단을 자지러지게 했다.  

 

하늘을 나는 천마의 그림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치 천마가 환생해 후다닥 튀어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고 신라시대의 그림은 남아있지 않았다. 고구려 벽화를 중심으로 한 삼국시대 벽화만이 남아 있을 뿐. 그런 가운데 천마도가 발견됐고, 뭐니 뭐니 해도 그림의 수준도 회화작품으로서는 압권이었으니 엄청난 수확이었다.

 

그래서 1974923일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삼국, 특히 고 신라시대의 회화수준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그림인 천마도가 발견된 큰 무덤이란 뜻에서, 그 이름을 천마총이라 명명하기로 의결했다.

 

발굴 조사 진행과정에서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보는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하늘을 날고 있는 천마의 그림이라고 이구동성이었다.

 

1971년 천마총에서 발굴한 또하나의 말다래. 2013년 40여년만에 복원한 결과 갈기가 선명한 말다래 그림이었다. 보존처리를 담당한 국립경주박물관은 기린이 아니라 천마라는 결론을 내렸다.|장용준 국립대구박물관 학예실장

 

화난 경주 김씨들, “우리가 말()이냐155호 고분이 천마총으로 일컬어지자 경주 김씨가 들고 일어났다.

 

경주 평지에 있는 모든 커다란 형태의 신라시대 무덤은 비록 이름을 잃었지만, 대부분 김씨 성을 가진 임금들의 무덤이 분명하다는 것. 그런데 이름 붙일 게 없어 하필이면 말 무덤이냐는 항변이었다.

 

1981년 드디어 경주에 살고 있는 김영효(金永孝) 984인의 명의로 천마총 이름을 바꿔달라고 당시 경주시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 청원을 하게 되었다.

 

즉 사람의 무덤이 분명한데 마치 말의 무덤인 것처럼 천마총이라 이름 하는 것은 부당하니 이를 천마도 왕릉으로 고쳐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라니. 그건 일제시대에 신라왕릉을 발굴하면서 패총 등에서나 쓰이는 용어였는데, 고의적으로 이라고 쓰다니. 또한 왕릉임이 분명한데 천마도가 발견됐다고 해서 천마총이라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이 때문에 발굴 조사 자문위원이었던 고 김원룡을 비롯하여 문화재위원들이 국회에 불려나가 국회의원들의 질의에 답해야 했다.

 

우리나라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 사상 학술적인 명칭문제가 국회에서 논의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19811014일 문화재위원회가 명칭에 대해 재심의를 했으나 발굴 조사결과 묻힌 주인공이 왕임을 확정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으므로 그냥 천마총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출토 당시의 금동죽제 말다래. 잘못 다루는 바람에 훼손된채 40여년 수장고에 있다가 보존처리됐다.

천마가 아니다. 기린(麒麟)이 맞다

그런데 2000년들어 천마총의 천마 그림이 말이 아닌 기린의 그림, 즉 기린도(麒麟圖)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기린은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고 하는 상상의 짐승을 말한다.

 

몸은 사슴과 같고 꼬리는 소의 꼬리에, 발굽과 갈기는 말과 같으며 빛깔은 5색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대 중국에 있어서 기린은 우주운행 질서의 가장 중심이 되는 신으로 사후세계의 수호자, 천년을 살고 살생을 미워하며 해를 끼치지 않는 덕의 화신으로 여겨왔다. 당나라 한유(韓愈)의 언급을 곱씹어 보자.

 

기린이라는 동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상서롭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말이나 소와는 분명 달라 누구도 기린의 형태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기린은 동양에서는 봉황(鳳凰), , 거북 등과 함께 사령(四靈)’으로 숭배됐고, 예기(禮記)사령의 으뜸을 기린, 모든 백수의 으뜸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정작 기린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명확한 설명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기린은 그만큼 수수께끼의 동물인 것이다.

 

천마총에 보이는 천마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뿔이 표현되어 있고 입에서 신기(神氣)를 내뿜고 있다. 한 개의 뿔이 있는 영수(靈獸)는 기린 외에는 그 예가 흔치 않다.

 

또한 기린의 가장 큰 특징이 되는 우미일각(牛尾一角)’이 확인된다. 우미일각은 중국 상나라 대 갑골문에 나타나는 기린 관련기사와 송·원대 이후에 소가 기린을 낳았다는 기록들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기린 그림에 나타나는 공통점이며 뒷다리에서 뻗쳐 나온 갈기의 표현은 기린이나 용 등의 신수(神獸)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재중 박사에 따르면 천마총 그림과 가장 유사한 도상은 장천(長川)1호분에 나타난 기린도이다.

 

두 곳의 기린 모두 앞발은 내밀고, 뒷발은 뒤로 뻗어 비상하는 모습인데 언뜻 보아 비슷하다.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의 출토 장면.

특히 천마총 기린의 꼬리털과 목의 갈기, 뿔에 나타난 표현이 윗부분에서 수평으로 뻗은 것이 아니라 장천 1호분 기린의 꼬리털처럼, 한번 위로 각이 지면서 다시 뻗쳐나가는 것이 비슷하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예라는 게 김재중의 주장이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볼 때 말보다는 오히려 기린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신기(神氣)를 내뿜고 있는 것 또한 천마의 예에서는 거의 없다는 것.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사신도의 사신(四神)이 신기를 뿜고 있으며, 기린도 대부분 신기를 내뿜고 있다.

 

기린의 속성 중 하나가 옥()처럼 맑은 기운을 뿜는다는 게 이재중의 시각이다.

 

“기린은 공자의 상징

기린은 동양에서 성군의 시대에 나타나는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고 있는 기린을 상상하면 안된다.

 

“(한나라 무제 때) 천자가 옹현에서 교사를 거행하다 뿔 하나 달린 들짐승을 포획했다. 그 모양이 고라니 같았다. 제사를 주관하는 관헌이 기린(麒麟)인가 합니다했다. 그래서 천자는 제후들에게 백금을 하사하였고, 오치(五畤)에 바쳐 각 치마다 소 한 마리씩을 하사했다. 이런 상서로운 징조는 천자의 정치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라고 했다.”(<사기>)

 

기린(아프리카 기린이 절대 아니다)은 이렇듯 성군의 시대에 나타나며 생초(生草)를 밟지 않고 생물을 먹지 않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뭐니 뭐니 해도 기린공자의 상징이다.

 

노나라 애공 때(BC 481), 즉 공자가 71살 되던 해 노나라 서쪽 땅인 대야(산둥성 거야현 북쪽)에서 기린이 잡혔다.

 

희귀동물이 잡혔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아보지 못했다. 공자는 기린이다. 성인의 세상에 나타난다고 했다. 공자는 나는 하늘에게서 버림받았다. 어진 짐승이 나타나도 그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탄했다.”(<설원>)

 

<공자가어> '변물(辯物)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숙손씨의 수레꾼 자서상이라는 자가 나무하다가 기린을 잡았는데 그 앞쪽 왼발이 부러졌다. 숙손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그것을 성곽 밖에 버리고 공자에게 고라니로 뿔이 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공자가 가보고 기린이다. 무엇하러 왔느냐. 무엇하러 왔느냐하고 소매를 돌려 얼굴을 가리고 눈물지어 옷깃을 적셨다. 자공이 왜 우셨냐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기린이 오는 것은 명철한 임금을 위해서이다. 나온 것이 제 때가 아니어서 해를 입은 것이다. 그래서 서러워 한 것이다.’”

 

<공총자>의 기문편에는 더 자세하게 나온다.

 

선생께서 천자가 덕을 베풀어 장차 태평이 오게 되면 기린·봉황·거북·용이 먼저 그 일을 위해 상서로 나타난다. 지금 주나라의 종실은 멸망하려 하여 천하에 주인이 없는데 누구를 위해 왔단 말이냐하고 우시고는 나는 짐승 중의 기린과 같은 사람이다. 기린이 나와 죽었으니 내 도는 막혀버린 것이다했다.”

 

공자는 나를 등용해주는 자가 있다면 저 주()나라의 훌륭한 덕치를 이 동쪽에서 실현해 보련만!”하고 현실정치 참여를 추구했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춘추시대에 패도(覇道)만을 좇던 당대 제후들에게 공자의 유세는 말 그대로 공자님 말씀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제나라 명재상 안영(안자·晏子)마저도 제 경공이 공자를 기용하려 하자 딱 잘라 안된다고 했을 정도였으니.

 

공자는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고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것은 몇 세대를 배워도 다 배울 수 없습니다. 그를 채용하여 제나라 풍속을 바꾸려한다면 그건 잘못입니다.”

 

절망한 공자는 자신이 편찬한 춘추에 그해 첫 번째 사건으로 哀公十四年春 西狩獲麟이라 적어 놓고는 더 이상 쓰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절필이란 말의 기원이 되는 획린절필(獲麟絶筆)’이다. 이 말은 공자학술 생명의 종결을 의미한다. 병이 난 공자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진단 말인가(泰山其頹乎). 기둥이 부러진단 말인가(梁柱其壞乎). 철인이 시들어 버린단 말인가(哲人其萎乎).”

 

공자는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지 오래다라고 말했고 1주일 뒤 세상을 떠났다. 이재중은 공자의 빛나는 역사서 춘추는 일명 린경(麟經)’이고 기린은 유교에서 인수(仁獸)로서 유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고 밝혔다.

 

상상이 동물 기린의 옛 그림. 기린이나 천마나 사실 구별하기 어렵다.

 

◇여전히 만만치않은 천마도설

더구나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천마도 그림을 적외선 카메라로 짝었다. 그랬더니 머리 위에서 뿔의 흔적을 보였다. 

 

뿔이 보였다면 천마의 흔적이라고 볼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제 천마총이 아닌 기린총이라 바꿔 불러야 할까.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다.

 

여전히 논쟁이 뜨겁다.

 

2014년 국립경주박물관이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1971년 발굴 당시 찾아낸 또하나의 말다래, 즉 금동죽제 말다래(대나무로 짠 삿자리에 올린 금동판 말다래)에 주목했다. 지금 국보 207호로 지정된 자작나무 껍질 천마도와 함께 수습된 또하나의 말다래다. 

 

이 말다래는 1971년 발굴 이후 지금까지 수장고에 있었다. 왜냐. 발굴 당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분무기로 유물을 굳히는 경화용제를 뿌리고 이발용 드라이기로 급히 말린게 화근이었다. 약물이 유기물과 엉겨붙어 시커먼 얼룩이 생겼고, 말다래판 문양까지 덮어버렸다.

 

그랬으니 이 말다래판은 수장고로 직행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국립경주박물관이 40여년 만에 꺼내 한층 진전된 보존기술로 복원해보니 그림에서 갈기가 선명히 보였고, 말머리 같은 문먕도 드러났다.

 

당시 특별전을 준비하던 장용준 학예관(현 국립대구발물관 학예실장)은 "여러모로 보니 천마가 분명하다"고 했다. 말다래 자체가 말의 장식품이 아닌가. 

 

장용준은 "40여 년 만에 복원된 말다래의 문양이 천마라면 같은 무덤에서 나온 자작나무 껍질 말다래(천마도, 국보 207호) 역시 천마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다.

 

몇몇 언론에서도 "이제 논쟁을 종식됐다. 천마총의 말다래는 천마도가 분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어디 학술논쟁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끝나는 것인가. 천마총 주인공과 함께 살아보지 않았으므로 전문가 나름의 논증으로 펼쳐지는 학술논쟁은 계속될 것 같다.

 

어차피 기린이나 천마는 상상의 동물이 아닌가. 천마나 기린이나 인간이 그리는 상상의 동물 모습은 비슷하지 않은가. 비근한 예로 기린은 말의 갈기와 발굽과 같다고 하지 않은가. 

 

지금 이 순간 천마총의 이름을 기린총이라고 바꿔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학술논쟁을 종식시킬만한 완전한 증거가 나오든지, 혹은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나온다면 혹 모를까.

 

무령왕릉처럼….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