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우리나라(조선)에서 화친을 무너뜨렸다고 해서 혁연(赫然)히 노해서~곧바로 정벌에 나서~우리나라 임금(인조)과 신하의 죄는 더욱 피할 길이 없다.”
높이가 395㎝, 너비 140㎝에 달하는 삼전도비, 즉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에 새겨진 비문은 쓰라린 역사의 상징이다. 비문을 쓴 이는 병자호란 당시 도승지와 예문관제학을 역임한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4년).
그러면 이 ‘치욕의 비문’을 쓴 이경석 역시 ‘치욕의 인물’인가. 그가 찬술한 이 삼전도비문은 그가 죽은 지 30~40년이 지난 뒤부터 벌어지는 노·소론 간 치열한 이념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은순(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백헌 이경석의 정치사상과 대외인식’은 그동안 조명되지 못한 이경석의 생애와 그를 둘러싼 이념논쟁 등을 잘 풀고 있다.
이경석이 삼전도비문을 찬술한 경위를 살펴보자. 1637년 1월 인조가 항복하자 청나라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10만이 넘는 포로를 잡아가면서 수항단 터에 ‘청태종 공덕비’를 세우라고 명한다.
조정은 비문에 새겨 넣을 글을 청으로부터 받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신들이 쓰라”는 청의 요구 때문에 이경석 등 3명이 선택된다. 이경석 등은 마지못해 비문을 썼다.
하지만 청나라는 “내용이 매우 소략하고 포장(舖張)이 되어있지 않다”면서 “다시 쓰라”고 강요한다. 다급한 인조의 부탁을 들은 이경석은 비문을 개찬, 드디어 1,009자를 완성했다.
그런 이경석은 청으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척화파 인물들에 대한 구명환국운동을 벌여 무사히 귀국시켰다. 효종의 북벌계획을 눈치 챈 청나라가 사신들을 잇달아 파견, 혐의를 집요하게 캐자 이경석은 국왕을 끝내 두둔하면서 모든 책임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이 때문에 위리안치되고, ‘영불서용(永不叙用·다시는 기용하지 않는다)’의 처분을 받는다.
그는 관직생활에서 당색을 철저히 배제하는 인사정책으로 인재들을 발탁했다. 그가 발탁한 인재 가운데 10명의 정승과 4명의 대제학이 배출된다.
그는 말년에 왕(현종)으로부터 인신의 최고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모든 공경대부들을 궤장연(几杖宴)에 초대한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에서 자신이 발탁한 송시열의 공격을 받을 줄이야. 송시열은 이른바 ‘궤장연서(궤장받은 일을 詩文으로 하례하는 것)’에서 “~하늘의 보우를 받아 ‘수이강(壽而康)’하여~성상의 대우하심을 받았으니~”하고 이경석의 행적을 기렸다.
그런데 이 ‘수이강(오래 편안히 산다는 뜻)’이 삼전도 비문 찬술을 비꼰 것이었다.
과거 송나라 흠종 때 금(金)에 잡혀가면서 그들에게 아첨하여 ‘수이강(여기서는 하는 일없이 오래 편히 산다는 뜻)’했다는 손적(孫覿)을 이경석에 비유한 것이다.
당시 유림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이경석이 비록 부득이한 데 몰리기는 했지만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데 신경 쓰며 비문을 쓴 것”이라고 공격했다.
이경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경석의 사후 서인의 집권으로 송시열의 지위가 갈수록 높아질 즈음 소론의 박세당이 송시열을 겨냥, 포문을 연다.
이경석을 군자의 상징인 ‘봉황’으로, 송시열을 그 봉황을 모욕하는 ‘올빼미(악인의 상징)’로 지칭한 것이다. 노론 당인들은 박세당을 사문난적으로 규정하는 등 반격에 나선다.
이렇게 촉발된 노·소론 간 논쟁은 당파 간 정치적·이념적 논쟁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렇다면 이경석을 비난한 송시열이 소인배인가. 아니다.
“현실론으로 나라를 구한 이경석이나, 주자학적인 숭명의리론으로 국가를 재건하고 민생을 회복하자는 송시열이나 모두 평가돼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싸움은 양란(兩亂)이후 새로운 질서수립을 위한 이념투쟁이자 시국인식 차이에 따른 정론대립이라는 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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