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중국 애국주의 영화인 ‘장진호’가 중국 대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개마고원 장진호 부근까지 진격했던 미군이 중국군에게 포위된 뒤 천신만고 끝에 철수한 ‘장진호 전투’를 중국의 시각에서 다룬 작품입니다. 웨이보 등 중국 SNS에는 영화가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서 거수 경례를 하는 관객 모습을 담은 영상이 올라왔는데요. 영화에서는 한국군과 북한군이 등장하지 않고 중국과 미국의 전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군요.
지난해 10월 개봉된 이후 국내 수입허가로 논란을 빚은 영화 ‘금강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휴전 협정을 앞둔 1953년 7월 강원도 화천 북쪽에서 벌어진 금성 전투를 배경으로 다룬 작품인데요. 역시 미군-중국군의 대결이 주된 내용이랍니다.
아무래도 미·중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중화의 위대한 부흥’을 강조하고 있는 중국이 철저히 자국 관객들을 겨냥해 만든 애국주의 영화인 셈이죠. 게다가 올해가 중국 공산당 성립 100주년을 맞이한 해이거든요.
■백악관 만찬장에서 울려퍼진 반미영화 주제곡
그런데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중국의 애국주의 영화 원조가 있습니다. 바로 1956년 개봉된 ‘상감령’입니다.
‘상감령(上甘嶺)’은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김화의 오성산 능선에서 42일간 벌어진 이른바 ‘상감령 전역(투)’를 역시 중국군의 시각으로 그린 영화인데요. 당시 ‘상감령 전역’의 전황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중국 대륙에 전해졌구요. 중국 위문단은 중국군이 싸우는 전선을 찾아가 공연을 펼치고 대륙에서 보낸 대량의 위문품과 위문편지를 중국군에게 전달했답니다.
1950년대에 이 ‘상감령 정신’이 대륙을 풍미했다고 합니다. ‘상감령 정신’이란 “어려움을 극복하고 조국과 인민의 승리를 위해 봉헌하는 불요불굴의 의지, 그리고 일치단결로 용감하고 완강하게 전투에 임해 끝까지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정신을 뜻했답니다.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 ‘나의 조국(我的祖國)’은 중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는데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리허설 때 가장 먼저 울려 퍼진 곡이 바로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이었습니다.
기막힌 에피소드도 있어요. 2011년 1월 19일 백악관에서 미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 주석을 위한 국빈 만찬이 열렸는데요. 이 때 중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의 손끝에서 웅장한 서사시가 연주됐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는데요.
하지만 이 곡의 정체를 알았다면 만찬장 분위기는 싸늘했을 겁니다. 이 곡이 바로 1956년 중국에서 개봉된 영화 <상감령>의 주제가인 ‘나의 조국(我的祖國)’이었습니다. 내용을 알았다면 미국인들이 기절했을 겁니다.
‘승냥이와 이리가 침략해오면(若是那豺狼來了), 엽총으로 맞이할 것이네(迎接的有獵槍).’
가사에 나오는 ‘승냥이와 이리’(豺狼)는 미군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니까요.
하기야 랑랑 뿐이 아닙니다. 2019년 미국의 제재로 곤경에 처한 중국 화웨이(華爲)의 런정페이(任正非) 창업주 겸 회장이 CNN과의 대담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이끌고 상감령으로 진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상감령 정신’이야말로 미국과의 한판승부를 상징하는 원조 구호가 된 겁니다.
■250㎞ 전선에 구축된 개미굴 갱도
그런데 이 ‘상감령’과 관련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전쟁의 비화가 숨어 있습니다.
중국이 한국전쟁 와중에 전 전선에 걸쳐 지하갱도를 팠고, 그것을 ‘지하(만리)장성’이라 칭했으며, 그 덕분에 이른바 ‘상감령 전역’에서 그들의 주장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때는 휴전협상을 벌이던 1951년 8월쯤부터였습니다. 중국은 2차대전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하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려고 고지의 후사면을 이용, 땅굴과 참호를 파고 전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요새를 만든 겁니다. 쌍방이 협상을 통해 더는 확전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면서 전선이 교착화 한 데 따른 것입니다.
쌍방은 문산 서측 11㎞ 떨어진 임진강 어귀에서 판문점 서방~삭녕 북방~철원 서북방~김화 북방~금성 남방~어운리~문등리~고성 동남방 6㎞ 지점에 이르는 전장 237㎞의 전선에서 대치했습니다.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과 포병 탱크 등을 내세워 1개진지에 수 만 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는데요. 장비가 낙후돼있는 상황에서 전선수호는 중국군의 최고덕목이 되었죠. 이때부터 중국군은 유엔군의 맹포격을 방어할 ‘고양이 귀’ 모양의 갱도를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일부 부대의 갱도전법이 연천 마량산과 216.8고지에서 효력을 발했답니다.
이에 고무된 중국군은 1951년 10월 21일 “주요진지는 반드시 갱도식으로 하되 깊이는 5m 이상으로 하라”고 지시하는데요. 일부 구역에선 북한군이 동원됐죠. 중국측 전사는 “석탄이 없으면 나무를 땠고, 흙을 운반할 도구가 없으면 손수레를 만들었다. 비밀유지를 위해 낮에는 흙을 동굴입구로 운반했고, 야간에 산기슭으로 옮겨 동이 틀 때까지 위장하면서 공사를 계속했다”(<중국군의 한국전쟁사>,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고 기록했다.
이로써 1952년 말까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 길이의 모든 전선에 종으로 20~30㎞의 두터운 방어선을 갖추고 땅굴을 거점으로 한 거점식 진지방어체계, 즉 지하갱도가 구축됩니다. 그러면서 중국은 그 갱도를 ‘지하(만리)장성’이라 했습니다.
250㎞의 전선에 공산군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의 제원을 계산하면 총 갱도수 9519개, 갱도길이 287㎞, 엄체호 78만4600개, 엄체호 총 길이 3683㎞, 그리고 각종 시설물 10만1500개였답니다.
총연장 4000㎞에 육박하는 철옹성이 지상이 아닌 지하에 건설된 셈이죠. 공산군의 방어진지는 공중 및 야포공격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매우 견고하게 설계됐답니다.
공산군이 구축한 지하요새는 고지 정상으로부터 깊이가 2m나 되는 여러 갈래의 교통호가 반사면을 따라 보급소나 취사장으로 보이는 동굴로 통하고 있었답니다. 공중에서 보면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전 전선에 걸쳐 폭 20~30㎞의 커다란 개미집이 형성되어 있는 것 같았다는군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은 1952년 8월 “어떤 사단도 3개월의 식량을 보관할 지하창고가 있었으며, 강당도 있어 생활은 대단히 좋았다”면서 “2층으로 굴을 파면 상대가 공격해올 경우 우린 1층으로 지하도로 들어간다. 상대가 위층을 점령해도 아래층은 우리에게 속해있다”고 자랑했습니다. 일례로 국군 5사단이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는 갱도 진지 내에서 공산군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식당까지 마련돼 있었다는군요.
중국군이 수행한 이 지하만리장성의 개념은 전쟁 후 북한군에게 고스란히 전수됐고요. 남한을 공포로 몰아넣은 땅굴 작전 역시 이 갱도작전의 하나였습니다.
■“오성산을 차지하라!”
중국이 구축한 지하만리장성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바로 ‘상감령 전역(戰役ㆍ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였던 겁니다. ‘상감령’은 강원도 평강-철원에 걸쳐있는 오성산(해발 1062m)에 딸린 능선군의 중국 명칭입니다. 598고지와 파이크스봉, 제인러셀고지(여배우 제인러셀의 가슴을 닮았다고 붙인 명칭) 등을 합해 삼각고지라 했고요. 삼각고지 동쪽에 저격능선(538m)이 있었는데요. 중국은 이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을 합해 ‘상감령(上甘領)’이라 한겁니다.
바로 이곳이 2만(한국군 자료)~3만7000명(중국군 자료)의 젊은이들이 피를 뿌린 곳입니다.
즉 1952년 제임스 밴 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유엔군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이른바 ‘쇼다운(Show Down)’작전을 감행하는데요. 유엔군의 작전목표는 바로 오성산의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삼각고지(미 제7사단)과 저격능선(한국군 제2사단)이었습니다.
오성산 일대는 쌍방간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적의 생명줄인 철원-평강-김화의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를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고 공언했죠. ‘철의 삼각지대’의 왼쪽 어깨가 ‘백마고지’라면, 김화, 즉 삼각지대의 오른쪽 꼭짓점은 바로 이 오성산 일대였던 겁니다.
중국군도 “상감령을 잃게 되면 오성산이 직접 위협을 받으며 유엔군이 높은 지형에서 아래를 바라보게 되어 지원군(중국군)이 평강평원에서 버티기 힘들다”면서 “상감령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결의를 다졌죠.
마침내 1952년 10월 14일 유엔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는데요. 이 전투는 무려 42일간이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면서 이어졌다. 중국군 자료에 따르면 유엔군은 3개 사단 넘는 6만 병력과 300여문 화포, 200여대의 탱크, 3000여대의 항공기를 투입했고, 포탄 190만발, 폭탄 5000여 발을 쏟아 부었답니다.
중국군 역시 3개 사단(4만 명)과. 산포와 야포·유탄포 133문, 로켓포 24문, 고사포 47문, 박격포 292문이 35만발의 포탄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이 전투로 상감령 산봉우리는 2m나 낮아졌고, 융탄폭격으로 1m가 넘는 흙먼지가 쌓였다고 하죠.
한국군 자료로는 2만 명(중국군 1만4815명, 유엔군 4683명), 유엔군 자료로는 2만8000명(중국군 1만9000명, 유엔군 9000명), 중국군 자료로는 3만7000여 명(중국군 1만1529명, 유엔군 2만5498명) 등 피아간 엄청난 손실을 입었답니다. 우리 측 전사에서도 “백마고지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했답니다.
■저격능선은 점령했지만…
그렇다면 이 길고 치열한 전투의 승자는 누구였을까요. 40일이 넘는 작전결과 유엔군은 목표인 삼각고지를 빼앗는데 실패하고 저격능선의 일부인 A고지와 돌바위 고지를 점령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물론 ‘저격능선 전투’로만 한정할 경우 ‘유엔군의 승리’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실패한 전투’라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가 낸 <한국전쟁사:유엔군참전편-제11권>은 “쇼다운 작전은 겨우 저격능선 일각만 확보하는데 그치고만 실패한 작전”이라고 했어요. 반면 중국은 “이 상감령 전역은 전쟁 막바지 대공세였던 금성전역(금성전투)과 함께 지원군이 조선전쟁에서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왜 실패라 할까요. 유엔군은 맨 처음 쇼다운 작전을 펼칠 때 삼각고지와 저격능선에 미군과 한국군 1개 대대씩만 투입한다 해도 5일간 약 200명의 인명손실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이루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고, 무려 40여일간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삼각고지 확보에 실패하고 저격능선 일부만 확보하는데 그쳤습니다.
특히 미 7사단이 맡은 삼각고지에서 미군 2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하자 미국 언론은 “한국전선에서 미군이 명분 없는 싸움에 쓰러져 가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기에 이르는데요.
■“지하에 들어가보니 사통팔달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이 ‘삼각고지+저격능선’ 전투가 실패로 끝난 으뜸요인은 중국군이 1년 가까이 전 전선에 구축해놓은 지하갱도, 즉 ‘지하 만리장성’ 때문이었답니다. ‘저격능선’ 전투를 지휘한 당시 정일권 한국군 제2사단장의 회고가 인상적이었는데요.
“동굴입구는 작은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안에 들어 가보니 사통팔달이었다. 중공군의 반격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라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동굴진지에 숨어 있다가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중국군 45사단은 오성산 일대에 총연장 8.8㎞의 갱도 306개와 엄개참호 160개, 교통호 53㎞, 대전차호 4개를 구축해놓았다고 하는데요. 이외에 참호 2400개와 노루방책 2.6㎞, 철조망 2.3㎞, 동굴양식 창고 61개, 동굴탄약창고 65개, 갱도와 연결된 엄폐식 취사장 140개, 각급 지휘소 및 관측소 204개를 건설했다는군요.
그러니 “설령 원자폭탄을 사용했다 해도 저격능선과 오성산의 공산부대를 모두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는 말까지 미국 군사전문가들 사이에서 돌았겠죠. 만약 유엔군이 오성산을 차지했다면 군사분계선은 20㎞ 북방까지 전진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평강 고원도 차지할 수 있었겠죠. 무엇보다 지금도 오성산 일대에는 유사시에 6만명의 병력이 숨을 수 있는 지하갱도가 있답니다. 그걸 중국은 지하장성이라 하는거죠. 이기환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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