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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코끼리가 유배를 떠난 까닭은?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됩니다. 전라도의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
 1413년(태종 13년)의 일이다. 병조판서 유정현의 진언에 따라 ‘코끼리’가 유배를 떠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문제의 코끼리가 그만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李玗)를 밟아죽인 것이다. 이우가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화가 난 코끼리가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대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는데,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장도(獐島)였다. 6개월 후 전라 관찰사가 눈물겨운 상소문을 올린다.
 “(코끼리가) 좀체 먹지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태종 임금조차 ‘울컥’하게 만든 상소로 줄쌍한 코끼리는 유배지에서 풀려 육지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코끼리의 운명은 기구했다.  

  

최근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인 뒤 조사내용을 토대로 그린 만부교의 상상도. <조선신보>는 발굴과정에서 낙타의 어금니가 출토됐다고 전했다.

■‘제발 죽이지 마라.’
 6년 뒤인 1420년(세종 2년) 전라도 관찰사는 코끼리 사육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다.
 “귀양에서 풀린 코끼리를 도내 4곳의 변방 지방관들이 교대로 사육했사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먹이를 축내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습니다. 제발 충청도와 경상도 지방에서도 돌아가며 키우게 해주소서.”
 전라·충청·전라도 등 3도가 코끼리 한마리 사육을 맡는, 이른바 ‘순번사육’을 제안한 것이다. 상왕(태종)은 전라도 관찰사의 상소를 가납했다.
 이로써 코끼리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를 떠돌며 사육 당하는 처지가 됐다. ‘떠돌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까.
 문제의 코끼리가 또 사고를 친다. 1421년(세종 3년), 충청도 공주에서 코끼리를 기르던 사육사가 그만 코끼리에 채여 사망하는 사건이 또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폭발했다.
 “코끼리는 나라에 유익한 동물이 아닙니다.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은 됩니다.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 먹는데, 1년으로 치면 쌀 48섬, 콩 24섬입니다. 게다가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니, 도리어 해만 끼칠 뿐입니다. 다시 바다 섬 가운데 목장으로 보내소서.”
 상소를 들은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코끼리를 두라”고 명한 뒤 신신당부한다.
 “제발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공작새가 귀양한 사연
 어디 코끼리 뿐이랴. 코끼리 귀양사건은 그래도 잘 알려졌지만, 공작새가 유배를 떠나야 했던 사연을 아는 이는 드물다.
 1589년(선조 22년)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이다. 일본의 사신인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가 공작 1쌍과 조총, 그리고 창과 칼 몇 점을 바쳤다.
 당시 종의지는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밀명에 따라 조선을 방문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일단 생전 처음보는 조총을 군기시(軍器寺)에 신주처럼 간직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공작새는 ‘노 생큐’였다. 조정은 공작의 처리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허성 같은 신하는 ‘공작은 돌려보냄이 옳다’면서 나름의 묘책을 냈다.
 “일본 사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습니까. ‘(일본의 성의는 가상하지만) 내(선조)가 원래 진금(珍禽)·기수(奇獸)를 좋아하지도 않고 조선의 풍토에도 맞지 않으니 되돌려 보낸다’고…. 그러면 외교적인 결례는 범하지 않을 것인데….”
 선조는 “그 말이 맞지만, 저들이 공연한 의심을 하면 안될 것”이라고 고개를 내젓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궁여지책을 내놓었다.
 “할 수 없지. 이렇게 하자. 일본 사신(종의지) 일행이 떠난 뒤를 기다렸다가 공작을 제주도로 보내라.”
 그러나 예조는 “공작을 제주까지 수송하기는 어렵다”는 간했다. 그러자 선조는 “그렇다면 공작을 ‘수목이 울창한 남양(고흥)의 외딴 섬’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이 ‘공작새 유배사건’이다.

 

코끼리가 유배됐던 전라도 장도. 노루섬으로 일컬어진 장도에는 조선시대부터 동물들의 방복장으로 활용됐다. 지금은 율촌산업단지 개발로 육지와 연결돼있다.

■주나라 무왕의 고사
 사실 조선으로서는 외국에서 보내는 ‘동물사절’을 100% 환영할 수는 없었다.
 임금이 토종도 아닌 해외의 진귀한 짐승에 빠지면 뜻을 상하게 되고 나라마저 위태롭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고사에서 비롯된 관념이다. 즉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기원전 1046년 무렵) 주나라를 건국하자 각지에서 외교사절을 보내 갖가지 선물을 바쳤다. 그 가운데 서려(西旅)라는 서방의 소국이 오(獒)라는 명견(名犬)을 바쳤다. 크기가 4척이나 되는 사냥개였다. 당시 80살이 넘은 무왕에게는 말년의 소일거리로 더없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태보인 소공 석은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글을 지어 바친다.
 “개와 말은 토종이 아니면 기르지 말고, 진귀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소서. 잘못하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旅獒)’)
 진기한 동물, 특히 토종이 아닌 외국산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간언에 따라 무왕도 일절 진상동물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대 임금들은 외국에서 보내온 진금기수(珍禽奇獸)를 100% 환영할 수 없었다. 국가간 선물이나 당연히 받아야 하지만, 주 무왕의 고사 또한 늘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반전매력
 예컨대 성종 임금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 “내가 바로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했다”고 전했다.(1478년·성종 9년)
 흥미로운 것은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의 일화이다. 1502년(연산군 8년) 일본이 암원숭이를 바쳤다. 그 때 연산군은 예의 그 ‘주 무왕의 일화’를 자세히 인용하면서 “받지말라”는 명을 내린다.
 “일본이 예전에(세조 때의 뜻함) 앵무새를 바쳤는데 이 앵무새는 값만 비싸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지금 또 암원숭이를 바치고자 하는데 도로 돌려주고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점잖게 타이르라.”
 세조 때 일본이 바친 앵무새는 무려 명주 1000필의 값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받은 앵무새의 가격이 비싼만큼 조선도 일본에 그만큼의 하사품을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그걸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산군은 “대마도주가 조선에 말(馬)을 바치는 관례 또한 폐지하라”고 한발짝 더 나간다. 
 그러나 대신들은 “외교적인 결례이며 자칫하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면서 “암원숭이를 받아야 한다”고 간한다.
 “진상품을 받지 않으면 대국(조선)으로서 먼나라(일본) 사람들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성준) “요즘 대마도 왜인들의 원망이 많은데 만약 원한을 품고 돌아간다면….”(이극균) 
 백성들의 삶에 되레 해를 끼칠 뿐이라는 임금과, 외교적인 결례로 자칫 분쟁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간언하는 신하들…. 과연 폭군이라는 연산군 시대, 그것도 말년의 일화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세종실록> ‘오례 제기도설’에 그려진 상준(象樽), 즉 코끼리 문양의 술통. 조선왕조가 가을과 겨울제사를 드릴 때 썼다. 코끼리는 용, 기린, 봉황 등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 꼽혔다.

■만부교 사건의 교훈
 ‘동물외교’가 파국을 불러 단교를 낳고 결국은 전란으로 이어진 생생한 예가 있다. 
 바로 고려 태조 때 일어난 ‘만부교 사건’이다. 942년 10월, 북방의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거란이 3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파견, 태조 왕건에게 귀한 선물을 보낸다. 낙타 50필이었다.
 그런데 태조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거란의 사절단 30명을 모두 절도에 귀양보내는 한편, 낙타 50필을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만든 것이다. 이후 송도 보정문 아래에 있는 만부교는 낙타교라는 별칭을  얻었다. 태조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고려사절요> 를 보자.
 “거란은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 갑자기 옛 맹약을 돌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다. (거란의)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으면 안된다.”    
 이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는 단교했으며,  3번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받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 만부교 사건은 당대인 고려시대 때는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설왕설래가 많은 ‘의아한’ 외교분쟁이다. 만부교 사건이 일어나고 360여 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 1308~1313)은 이제현(1287~1367)에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었다.
 “아니 임금이 수십마리 낙타를 기른다고 그 피해가 백성들에게 이르지는 않을 것 아닌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낙타를 돌려보내면 될 일을 태조께서는 왜 굶어죽이셨는지 모르겠구나.”
 누구나 당연히 생기는 궁금증이었으라. 외교를 생각한다면 태조의 결정은 전화(戰禍)의 싹이었으니까…. 이제현도 충선왕의 송곳질문을 듣고 대답이 매우 궁했던 것 같다.
 “창업군주(태조)의 소견은 원대하고 속이 깊어 후세 사람들이 깨닫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태조께서 오랑캐(거란)의 간계를 꺾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경계하고자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것은 전하(충선왕)께서 스스로 알아내셔야 할 것이며, 신(이제현)이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임금에게 공을 넘겼다. 한마디로 “내가 알게 뭐냐”며 나자빠진 것이다.
 태조 왕건의 심모원려가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외교사절 자격으로 온 낙타 50마리를 굶어죽임으로써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극단의 외교가 낳은 대가치고는 너무도 엄청난 결과가 아니었을까.  문화체육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