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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왕수석' 정약용의 무단이탈기

 만약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청와대 왕수석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했다면?

 그것도 야당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던 수석이 3일이나 잠수를 탔다면? 다산 정약용(1762~1863년)을 두고 하는 얘기다.

 요즘 같으면 도하 각 언론에 ‘왕(정조)의 남자’ 정약용의 근무지 무단 이탈 소식을 대서특별하며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1797년 단옷날을 앞둔 초여름이었다.
 당시 36살의 다산은 훌쩍 도성을 빠져나갔다. 당시 승정원 좌부승지로 일했던 다산으로서는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법에는 벼슬하는 자라면 임금을 뵙고, 허락을 구하지 않고서는 도성 문을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뵙고 재가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출발했다.”

 다산의 열초산수도. 다산이 고향마을 앞을 흐르는 한강(열수)에서 산수를 유람하면서 그린 작품이다. |실학박물관 제공

■“고기잡이 생각이 나서”
   왜 그랬을까. 다산은 <여유당전서>에서 “불현듯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 ‘쿨’하게 전한다.
 “석류가 처음 꽃을 피우고, 보슬비가 깔끔하게 개자 불현듯 초천(苕川)에서 고기잡이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여유당전서> ‘유천진암기’)
 초천은 다산의 생가(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앞을 흐르는 실개천이다, 한걸음에 고향으로 달려간 다산은 형제들과 함께 투망으로 고기를 잡았다.
 “잡은 물고기가 모두 50여 마리였다. 작은 배가 감당을 못했다.~배를 남자주(濫子洲·두물머리의 작은 섬)에 정박시키고 즐겁게 배불리 먹었다.”

 

 ■3일간의 일탈
 오랜 만의 추억여행에 한껏 들뜬 다산은 형제들과 ‘낭만파’의 기분을 낸다.  
 “물고기는 이미 맛을 보았으니, 지금 산나물이 한창 향기로울 때인데 천진암(경기 광주 퇴촌의 암자)에 가서 노는게 어떻습니까.”
 “그거 좋지. 맘껏 놀아보세.”
 다산 형제들은 천진암에서 ‘술 한 잔에 시 한 수 씩 지으며(一觴一詠以窮日)’ 지내다 3일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 때 지은 시가 모두 20여 수가 되었다. 냉이와 고사리, 두릅 등 이 때 맛본 산나물도 5~6종이나 됐다.(<여유당 전서>)
 다산이 속한 승정원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이다. 더욱이 좌부승지는 병조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국방수석’의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수석비서관이 대통령에게 보고도 없이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것이다. 더욱이 정조 임금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왕수석의 일탈’이라니….

 

 경기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

■예비고사 수석을 불합격 처리한 까닭
 정조와 다산은 다산이 22살 때(1783년) 진사과에 합격한 뒤 임금을 처음 알현했다.
 “고개를 들라.”
 정조는 특별히 다산을 호명한 뒤 그의 나이를 묻고는 재능을 인정해주었다. 그 뒤부터 다산을 아끼는 정조의 사랑은 끔찍했다.
 24살 때인 1785년 11월3일, 다산은 제주도에서 올라온 누런 감귤을 앞에 두고 치른 시험의 초시(과거의 1차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런데 웬일로 본시험에서는 불합격했다. 예비고사 수석을 본고사에서 탈락시킨 것이다. 무슨 곡절이 있었을까. 바로 다산을 담금질하려는 정조의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 정조는 탈락의 고배를 마신 다산의 시험답안을 읽게 했다. 그리고 무릎을 탁 치며 칭찬했다.
 “네가 지은 것이 사실은 (과거시험의) 장원에 못지 않다.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암연보>)
 정조는 다산의 6촌 처남인 홍인호를 특별히 불렀다.
 “정 아무개 같은 사람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야.”
 과연 군계일학이었다. 이후 다산은 모든 시험마다 대부분 수석을 차지했다.

 

  ■“줄 선물도 바닥났구나.”
 그 해(1785년) 12월, 정조가 춘당대(창경궁 후원에 쌓았던 석대) 식당에서 음식을 드시며 식당명(食堂銘)을 짓도록 했다.
 다산은 여기서도 수석을 차지했다. 붉은 비점(批點·시문의 잘된 곳을 찍는 점)이 찬란했다. 다음 날 유생들을 성정각으로 불러 비궁당명을 짓도록 했는데 역시 수석이었다.
 정조의 격려와 칭찬이 분에 넘칠 지경이었다.
 26세 때인 1787년에 열린 두차례 시험에서 합격할 때마다 정조 임금은 <팔자백선(정조가 당송팔대가의 글을 뽑아 간행한 책)>과 <국조보감> 등 그 해에 출간된 신간서적을 하사했다. 8월23일의 시험에서도 붉은 비점이 가득했다. 정조는 다산에게 하사할 신간서적을 꼽아보았다. 
 “<팔자백선>은 받았는가?”
 “예.”
 “<대전통편>은?”
 “그것도 이미….”
 “그렇다면 <국조보감>은?”
 “그것도….”
 “그러냐. 최근에 내각에서 인쇄한 서책을 모두 네가 얻었구나. 줄 책이 없구나.”
 정조는 크게 웃었다.
 “그럼 할 수 없지. 술이라도 마셔라.”
 정조는 술에 취해 나서는 다산에게 다른 책을 하사했다. 그것이 바로 <병학통(兵學通·군사훈련 교범)>이었다.     

 

 다산 생가를 가로지르는 초천. 당시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일하던 다산이 무단이탈해서 고기잡이를 했던 곳이다.

■‘풍운지회와 어수지계’
 28살 때(1789년)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다. 정조는 그에게 집과 정자를 하사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임명한다. 초계문신은 정조임금이 전도유망한 젊은 신하들을 규장각(奎章閣)에 소속시켜 재교육과정을 밟게 한 제도이다. 다산은 이후 정조의 끔찍한 사랑으로 승승장구한다.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라 한다.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서로 존경하고 믿으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경우를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한다. 물고기가 좋은 강물을 만나 활발하게 헤엄칠 수 있는 모습인 것이다.”(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조와 다산의 관계가 바로 ‘풍운지회’이자 ‘어수지계’라 할 수 있다. 임금은 그런 다산을 지근거리에 놓고 싶어했다. 1년에 3품계씩 뻔질나게 승진시키더니, 승정원(대통령비서실) 동부승지-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1796년)에 앉혔다. 다산이 고향의 추억을 잊지 못해 2박3일의 무단 이탈을 감행했을 때의 직책은 좌부승지였다. 

 더욱이 그 무렵, 다산은 혹독한 종교·사상검증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조선판 매카시즘의 선풍이 불어닥친 때였다. 20대 초반인 1784년부터 광암 이벽(1754~1785) 등의 영향을 받아 서학(천주학)의 서적을 보았던 게 화근이었다. 이 때 나름대로 감명을 받았던 이력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반대파들은 천주교를 서학(西學), 즉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면서, 다산과 이가환 등을 사학도로 지목한다.
 1795년(정조 19년) 조진정이 올린 상소를 보자.
 “‘사학’은 세도(世道)에 해를 끼치는 것이 홍수나 맹수와 같습니다.~ 저 이가환과 정약용의 무리들이 몰래 서로 전하였으니 그들이 마음 속으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정조실록>)
 천주교를 삼강오륜을 범한 강상죄(綱常罪)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한 ‘시역죄(弑逆罪·부모와 임금을 시해하는 행위)’으로 보았다. 1791년 홍낙안이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총명하고 재주있는 선비들의 십중팔구가 사학(邪學)에 빠져있습니다. ~나라의 금법이 무서워 골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지금은 환한 대낮에 멋대로 돌아다니며 공공연히 전파하며….”
 “무지한 하천민과 부녀자들은 한 번 이 말을 들으면 목숨을 걸고 뛰어든다. 영원한 천당 지옥설에 끌려 들어간 뒤에는 현혹된 것을 풀 길이 없습니다.”
 “(제사를 거부하는) 사학은 아비도, 임금도 없으며 윤리를 무시하고 어지럽힙니다. 우리나라는 장차 침몰해서 짐승과 오랑캐의 구역이 될 것입니다.~마땅히 대로변에 목을 매달고~역적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무작정 탈출로 정신 가다듬다.
 정조는 반대파들이 아우성 칠 때마다 다산을 좌천시키지만 곧바로 불러들인다.
 정조는 1796년 12월 정적들의 서슬퍼런 눈초리 속에서 다산을 병조참지-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로 승직시켰다. 1797년 5월(음력) 다산이 2박3일 간의 ‘근무지 무단이탈’을 감행했을 때, 살벌한 사상검증의 칼 끝이 다산을 겨누고 있었다.
 다산은 이 ‘하수상한 시절’, 복잡한 심중을 훌훌 털고 형제들과 뛰놀던 고향 땅으로 ‘무작정’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형제들과 천진암으로 놀러 가면서 남긴 시에서 심경의 일단을 밝힌다.
 “~흐르는 물에 발 씻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臨流濯足知何意) 조선 천지 많은 먼지를 밟았기 때문일세.(曾踏東華萬斛塵)”(<여유당전서>)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시름 다 잊고 속된 말로 ‘잠수’를 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다산은 다시 꿀맛 같은 ‘일탈’을 감행한 뒤 속세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슬아슬 칼 끝을 걸어야 하는 정치의 세계였다.

 

다산이 고향 소천의 사계절을 읊은 ‘소천사시첩’, |실학박물관 제공

■“잘못했으니 사직하렵니다.”
 다산이 속세로 들어온 지 불과 한 달도 안된 1797년 6월. 정조는 다산을 동부승지로 발령냈다. 반대파들의 아우성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다산은 자신을 ‘무한사랑’ 해준 정조 임금에게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는 먼저 어릴 때 서양서적을 보았고, 한동안 서학의 교리에 마음이 이끌린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저 젊은 날에 “지리·기이·달변·해박한 글에 미혹되어 견문을 넓히려는 것이었다”고 양해를 구한다.
 “신은 약관의 초기에~ 소위 서양의 사설(邪說)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설은~ 옛날에 보았던 책에는 없던 것이며, 승냥이나 수달도 놀랍게 여길 것입니다.”(<정조실록>)
 당시 서학의 ‘폐제지설(廢祭之說)’, 즉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강상의 죄’나 ‘시역(弑逆)의 죄’와 같이 삼강오륜을 저버리는 대역무도한 범죄행위로 지탄받고 있었다. 다산 역시 그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자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 때마다 서학에 빠진 자신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양심이 회복되자~ 지난 날 좋아했고 사모했던 것들을 돌이켜 보니 허황되고 괴이하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하늘을 거스르고 귀신을 업신여겨서 그 죄가 죽어도 용납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는 “서학에 ‘물들었던 것(染跡)’은 ‘아이들 장난(兒戱)’이었다”면서 ‘그것은 한낱 과거의 일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이제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서학의) 남은 찌꺼기가 없다”고 결백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사의를 표명했다. 반대파들의 집요한 공세에 더는 버틸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위로는 군부(君父)로부터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꾸지람을 당하니~ 입신한 것이 단 한 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와장처럼 깨졌습니다.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다산처럼 ‘일탈의 기분을 맛볼까’
 그런데 정조는 다산의 ‘사직의 변’에 또 한 번 감동하면서 사직서를 반려했다..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 싹트듯 하는 구나.(善端之萌) 상소문에 열거한 말들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직하지 마라.”
 하지만 반대파의 서슬에 너무 시퍼렇자 정조는 다산을 곡산(황해도)부사로 제수했다. 그를 ‘피신’시켜 준 것이다.
 그러면서 다산에게 친필편지를 전달했다.
 “(자네를) 등용하려 하는데 웬 잡음이 그렇게 많은 지 모르겠다. 1~2년 늦어도 무방하다. 곧 다시 부를 테니 염려하지 마라.”
 그야말로 ‘무한사랑’이다. 지금 이 순간 혹 유혹에 시달리는 사람이 생길 지 모르겠다.
 ‘다산처럼 한 번 훌쩍 떠나볼까.’
 하지만 그만 두어라. 정조와 다산처럼 임금을. 신하를 무한 신뢰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 문화·체육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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