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무렵과, 1932년, 그리고 1937년의 도산…. 시간을 달리한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사진 3장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첫번째 사진은 일제강점기 대정 연간(1919~1926년)의 요시찰 인물 감시 카드 양식에 붙여놓은 것이다.
1919년 도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약할 당시의 자신만만한 안창호, 즉 시쳇말로 ‘리즈’ 시절의 사진을 여러 장 복사해서 붙인 것이리라.
1932년의 사진은 도산이 그 해 4월 29일 상하이(上海)에서 일어난 윤봉길 의거 날에 일제경찰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수감되었을 때의 수형카드이다. 소화 12년(1937년) 7월 4일 촬영한 사진이다. 그나마 양복을 차려입었지만 초췌한 모습이다. 1919년의 사진과 비교하면 몰라보게 야위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봐줄만 하다. 1937년 11월 10일 사진을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재차 체포된 도산이 모진 심문과 함께 혹독한 형무소 생활을 버텨내던 도산 선생의 모습이다. 너무도 늙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다. 쌓인 연륜에 따라 당연히 주름이 패이고, 머리카락도 빠졌겠거니 하고 애써 생각해본다.
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석장의 사진을 비교하면 할수록 안타까운 심정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함께 체포된 장이욱(1895~1983)이 바라본 도산은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서대문형무소 입감절차를 밟기 위해) 옷을 벗고 나선 그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피골상접(皮骨相接)이었다. 굽어진 젓가락 같은 그 다리, 갈빗대가 아른거리는 가슴, 반 쯤 빈 자루같이 된 뱃집, 모든 비례를 잃은 듯이 길어 보이는 두 팔은 거의 저승의 시민을 보는 듯도 하였다. 앙상한 얼굴에….”
그랬다. 지금 보고 있는 이 석 장의 사진에 바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고초, 즉 간난신고(艱難辛苦)가 고스란히 투영돼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사진 3장. 위의 왼쪽은 일제가 대정연간(1919~26년)에 감시대상인물카드를 만들 때 붙인 사진이다. 1919년 무렵 도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활약할 당시의 ‘리즈’ 사진이다. 위의 오른쪽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일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수감된 때의 사진이다. 다소 여위었지만 깔끔한 양복차림이다. 아래는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재차 체포되 혹독한 심문을 받고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도산은 이때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곧 위독한 상태에 빠진 도산은 4개월 뒤인 1938년 3월10일 서거했다.
■열악한 형무소 생활
도산은 평생 4번이나 투옥됐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처단한 안중근(1879~1910) 의사의 하얼빈(哈爾濱) 의거가 일어나자 ‘살해 가담 혐의’를 받고 평양에서 긴급 체포된 것이 첫번째였다. 1927년 만주 지린(吉林)을 방문한 도산이 ‘대한 청년의 진로’를 주제로 강연하던 중 무장한 중국경찰에 연행되어 지린 경찰청 구치소에 구금된 것이 두번째였다.
윤봉길(1908~1932) 의거가 일어난 1932년 4월29일 세번째로 체포됐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上海) 홍커우(虹口) 공원 의거가 일어난 날 도산은 임시 정부 국무원 겸 재무장을 지낸 이유필(?~1945)의 집을 방문했다가 일제 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일본 영사관 경찰은 도산 선생을 국내로 압송한다.(6월2일)
이로써 1910년 4월 중국과 러시아, 미국 등을 오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존경받던 독립 운동 지도자는 23년만에 체포된 몸으로 돌아왔다. 도산은 이 경기도 경찰부에서 40여일간이나 심문을 받았다. 그 와중에 도산은 고질인 해수(咳嗽·기침)병이 악화됐고, 음식을 거의 섭취하지 못하는 소화불량으로 신음했다.1932년 7월 도산의 신병은 서대문형무소로 인도됐다. 서대문형무소의 감방은 열악했다.
동아일보 1931년 8월11일자는 ‘1평에 4명씩 수용 초열(焦熱) 지옥의 철장, 중태에 빠진 자만 3명, 사상범에 환자 속출’이라는 제목으로 사회문제로 비화한 ‘수감자 처우’를 다루고 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도산 안창호 선생 전시패널. 도산은 평생 4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제공
“출옥한 모씨의 말을 들으면 ‘사상범은 작은 방에 4명씩 수용하는데, 지금 같은 고열은 차마 견딜 수 없다. 그리고 음식물에 대하여 밥이란 겨가 반이나 섞인 좁쌀을 배급한다. 또한 형무소 안에서 사상범을 취급하는 것이 특히 가혹하여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경찰 심문과정에서 나름 대접을 받았던 도산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의 특수감방에 들어갔다.
이곳은 이른바 개전의 정이 없는 것으로 판정된 중대정치범들만 수감하는 특수 감방이었다. 도산은 7호실에 있었는데 바로 옆 6호실에는 김정련(1895~1968), 5호실에는 여운형(1885~1947), 8호실에는 오동진(1889~1944) 선생이 수감돼 있었다.
■감옥의 소통수단 타벽통보법이란?
이즈음에 도산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도산의 옆방인 6호방의 주인은 공명단 부단장인 김정련 선생이었다. 김정련 선생은 독립자금 마련을 위해 경춘가도에서 총독부 우편차를 습격했다가 붙잡혀 징역 9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이었다.
일제가 대정 14년(1925년) 10월 20일 작성한 감시대상 인물카드. 도산의 사진이 ‘복사(複寫)’라 표시된 것으로 보아 1919년 임시정부에서 활약했을 당시의 사진을 복사해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정련 선생의 회고가 드라마틱하다. 서대문형무소는 독방과 독방 사이에 두께가 2척이 넘는 시멘트 감방 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수감자들은 감방 벽을 딱딱 두드리는 소위 타벽통보법로 감방간 소통하고 있었다. 타벽통보법이란 무엇인가. 벽을 두드리는 숫자에 따라 자음은 얇게 ‘딱(ㄱ), 딱딱(ㄴ), 딱딱딱(ㄷ)…’ 하고, 그 다음은 조금 쉬었다가 모음으로 역시 두드리는 숫자에 조금 뚜껍게 ‘똑(ㅏ), 똑똑(ㅑ), 똑똑똑(ㅓ), 똑똑똑똑(ㅕ)…‘하며, 다시 조금 쉬었다가 받침의 순서로 얇게(똑) 두드려 이를 조합해서 주고받는 소통법이다.
■7번방의 비밀
그러나 아무리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젊은이라도 헷갈리지 않았을까. 그나마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지사들은 타벽통보법을 그나마 터득할 수 있었지만 해외에서 검거 투옥된 지사들에게는 ‘넘사벽’이었다. 문제는 이 타벽통보법으로 소통하다가 적발되면 무시무시한 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타벽통보법을 가르쳐 준 이도, 배운 이도 모두 교도소 당국에 끌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아야 했다. 또 수갑을 채우고, 발에는 무게가 다섯 관이나 되는 쇠땅방울(둥근 쇳덩이를 단 쇠사슬)을 발에 달고, 2~3년의 추가형과 정량의 3분의 1까지 밥을 줄이는 감식벌(減食罰)의 처분을 받아야 했다.”(김정련의 회고)
소화 7년(1932년) 7월4일 경기도 형사과에서 촬영한 도산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 사진. 양복차림의 깔끔함 모습이지만 1919년 무렵 찍은 사진에 비하면 상당히 야위었다. 국내로 압송된 이후 받은 혹독한 심문 탓이리라.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그러나 감방간 소통이 끊기지 않으려면 열외 1명없이 타벽통보법을 배워야 했다. 6번방의 김정련 역시 7번방의 도산 선생에게 이 타벽통보법을 가르쳐야 했다. 김정련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걸리기라도 하면 38살 창창한 본인(김정련)이야 견디면 되지만 55살 도산 선생은 그 혹독한 추가징벌을 감당하기는 어려울텐데….
“무서운 모험이었지만 어느 일요일, 드디어 나(김정련)는 결심을 하고, 칼 위에 올라서는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도산 선생에게 암호법을 가르치기로 했다.”
■미치광이 행세로 위기 모면
하지만 돌발사고가 터졌다. 7번방 쪽으로 바싹 대놓은 똥통 위에 올라가 도산에게 열심히 신호를 가르치던 김정련의 몸이 후들거리면서 얼결에 뛰어내리다가 똥통을 걷어차버리고 말았다. 바깥으로 순찰 중이던 간수가 감시구를 들여다보았다. 김정련은 순간 기지를 발휘했다. 미친사람 흉내를 내어 두손으로 똥을 퍼서 확 뿌렸다.
간수들에게 끌려간 김정련은 미친듯 취조관이나 의사에게 마구 달려들어 침을 뱉고 물어뜯고 고함쳤다. 간수들이 김정련을 뼈가 으스러지게 때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침내 김정련은 ‘미친 사람’이라는 판정을 얻었다.
1932년 7월4일 작성된 수형카드 뒷면. 도산의 신분은 ‘상민’이며, 신장이 5척4촌(164㎝)이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죄명은 치안유지위반죄로 표시됐고,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이 검거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정련의 회고담이 심금을 울린다.
“미친 사람 판정을 받자 나는 도산 선생을 생각하고 오히려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김정련의 ‘형무소의 도산 선생-2081호의 오물 바가지’, <새벽> 1957년 4월호)
김정련 본인이 뼈가 으스러지도록 구타를 당했지만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도산 선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쁜 마음으로’ 참아냈다는 것이다.
■“30년 독립운동에 징역 4년은 너무 짧다”
도산은 재판과정에서도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피고인은 장차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계속하여 운동을 할 생각이냐”는 판사의 질문에 도산은 단칼에 “그렇소. 앞으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운동을 할 생각이오”(1932년 10월19일 ‘안창호 신문조서 제10회’)라 대답했다. 또 “‘일제의 만주출병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야 감형 받을 수 있다”는 전언에도 도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어찌 일국의 지도자가 감형을 받아 자기 일신의 편안만 구하자고 거짓말을 하겠나.”(장성심의 ‘여성이 본 도산선생’, <기러기> 1968년 3월)
소화 12년(1937년) 11월10일 150여일간의 혹독한 심문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된 도산의 수형카드. 도산을 본 이는 “도산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으며, 마치 저승의 시민인 것처럼 병색이 완연하고 깡 말랐다”고 회고했다.|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도산은 피검된지 8개월만인 그 해(1932년) 1932년 12월 26일 징역 4년(미결 구류 50일)을 선고받았다.
도산은 항소 포기 의사를 밝히면서 나름 유머 한마디를 전했다.
“아니 30년 독립운동이 겨우 4년 징역 밖에 남은 것이 없소. 징역 4년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소.”
도산은 사상범만을 별도로 수용한 대전형무소로 이감된다. 그러나 몸이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위장병과 신경통 때문에 더 이상 감내하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 만기출소일(1935년 11월6일)을 9개월 앞둔 1935년 2월 10일 가출옥한다. 일왕의 아들(아키히토·明仁·1933~) 탄생을 축하하는 차원에서 수감자들의 특별감형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도산은 가출옥 이후 40여일간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과치료를 받은 뒤 장기 순회 여행길에 나섰다. 도산은 순회 도중 한국 민족에 대한 3가지 소감을 피력했다. 즉 먼저 “지금 조선에 진짜 친일파는 없다”고 했다. 또 일시동인(一視同仁·일본인 조선인을 또같이 취급한다)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니 하는 말은 일본의 거짓이며, 우리 동포들은 일본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아첨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1937년 수형카드의 뒷면. 치안유지위반법으로 1937년 11월1일 입소했으며, 12월23일 보석출감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마지막 시련의 결말
가출옥 후 전국여행에 순회강연에, 지병 치료 및 요양에 시간을 보낸 도산에게 마지막 시련이 찾아왔다.
1937년 6월,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일경에 체포됐다. 동우회 사건이 무엇인가,
도산의 주도로 기존의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1926년 통합한 단체가 바로 수양동우회다. 처음엔 청년남녀의 수양기관을 표방한 흥사단 계열의 합법적인 계몽단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표방한 실력양성주의를 지양하고 혁명대당으로 성격을 전환하기로 하면서 1929년 11월 동우회로 이름을 바꿨다. 민족주의로 무장한 동우회 회원들이 사회각계각층에 포진하고, 미주와 중국의 흥사단 조직이 상호 소통하며 결집했다.
당초 체제 내에서 동우회를 충분히 요리할 있을 것으로 믿었던 조선총독부는 이 동우회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1934년 1월6일 열린 동우회 이사회에서 내세운 “민족운동은 영구하고 민족은 영원한 실재(實在)”라는 명제가 일제를 자극했다. 동우회가 독립운동 단체임을 증명하려고 증거확보에 혈안이 된 일제는 도산이 1929년 2월8일 필리핀 방문에 앞서 상하이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동지 여러분에게’라는 제목으로 보낸 글을 입수했다.
1932년 4년형을 받고 용수를 쓴채 형무소로 호송되는 도산의 모습.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양단체가 아닌 혁명훈련단체
이 글에는 흥사단의 정체성이 수양단체가 아니고 혁명투사 단체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흥사단은 평범한 수양단체가 아니라 한국의 혁명을 중심으로 투사의 자격을 양성하는 혁명훈련단체입니다.”
일제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다고 믿었다. 동우회가 국내외의 민족주의자를 결집, 광범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중핵의 역할을 맡고 있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그때가 언제인가.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중일전쟁 개전(1937년 7월)을 코앞에 둔 일제로서는 사전예비단속의 차원에서도 민족운동을 탄압해야 했다.
일제는 1937년 6월 6일부터 동우회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령을 내렸다. 6월28일 도산은 평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한 지 28개월 만에 종로경찰서 제1호실에 투옥됐다.
일제경찰의 취조와 심문, 유치장 생활은 가혹했다.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로서 체포된 김여제(1853~?·시인)의 증언(‘옥중에서 도산선생을 모시고’, <기러기>, 1966년)은 더 끔찍하다.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한 조산 안창호 선생은 1935년 2월 가출옥한다. 이후 선생은 전국을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에 나섰다. 1936년 한강변 용봉정에서 동지들과 찍은 사진이다.(뒷줄 오른쪽부터 박낙준, 주요한, 이응준,안창호 선생
■만신창이가 된 도산
“…유치장 감방 하나에 15~16명…낮에도 햇빛은 전연 볼 수 없고…감방 마루 밑의 변소가 24시간 악취를 풍기고…빈대들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오고 담요에는 무수한 이와 벼룩이 득실득실하고…. 보리밥에 소금 넣고 삶은 멸치 몇 마리, 그 분량은 세 끼를 다 합해도 보통 사람의 한끼 분량도 안되고…. 낮에는 온종일 무릎 꿇고 부처님처럼 정좌하고, 밤에는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하고…”
당시 함께 체포된 송창근(1898~1951)의 증언에 따르면 훗날 가출옥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피골이 상접하고 초췌해져서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도 그럴진대 오랜 투옥생활 중에 위장병과 치통, 해수병으로 고생했던 도산은 견뎌낼리 만무했다. 도산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종로경찰서의 불결하고 추운 환경에서 도산의 치아는 또다시 말썽을 일으키고 위장과 폐 상태는 더 악화됐다. 여기에 3~4일씩 대변을 보지못했으니…. 끊이지 않은 기침소리와 폭발하는 트림, 요란한 방귀 소리…. 도산의 건강은 이제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급박한 적신호가 켜졌음을 보여줬다.”(송창근의 증언)
타벽통보법의 실례. 이에따르면 ‘조직’이라는 단어는 ‘딱×9번(ㅈ), 똑×5번(ㅗ)=조, 딱×9번(ㅈ), 똑×13번(ㅣ), 딱(ㄱ)=직’으로 친다. |박경목의 <식미지 근대감옥 서대문형무소>에서
■비행기태우기. 물들이붓기….
일제는 동우회가 단순한 수양단체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야만적인 고문이 자행됐다. 즉 동우회의 목적이 무엇이냐 물을 때 ‘인격수양’이라 대답하면 무자비한 고문이 시작됐다. 배화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체포된 김윤경(1894~1968)의 회고담은 끔찍하다.
“‘조선독립’이라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별별 야만적 고문을 썼다. 물 먹이기와 ‘비행기태우기’(학 춤추기), 발길로 차기, 몇시간이든 꿇어앉히기, 상자나 의자같은 무거운 물건을 들고 반쯤 꿇어 엉거주춤하고 서 있게 하기, 피가 맺히도록 따귀 때리기, 동아줄 바로 얽어매기, 총이나 죽도로 뼈가 어긋나도록 쥐어지르기, 목을 숨 막힐 정도로 옭으려 매기, 뭇매질하기….”
김윤경이 종로경찰서 경기도 순사인 구보타(窪田政雄)에게 당한 고문의 체험기 또한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수건인지 걸레로 입을 덮어 움직이지 않도록 누르더니 바케스에 물을 담아 가지고 와서 코 위로 물을 줄줄 쏟아 붓는다… 물은 한없이 폐와 위로 들어간다…숨은 막히어 질식하게 되고…배는 점점 부르고…. 그 고통 때문에 기절하고 의식을 잃게 된다.”
이 정도가 되면 웬만한 이들은 ‘억울한 10년 징역을 살더라도 이 고통은 못 견디겠다’면서 “마음대로 하라”고 자포자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행된 고문 때문에 최윤세·이기윤 등은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김성업(1886~1965)은 불구가 되었다.
도산이 1915년 미국 하와이에서찍은가족사진. 왼쪽부터 이혜련 여사, 장남 필립, 도산 선생, 차남 필선
■저승의 시민, 피골상접한 도산의 얼굴
도산 등 동우회원들은 종로경찰서에서 무려 135일간 혹독한 취조를 받고 경기도경찰부를 거쳐 1937년 11월 1일 서대문형무소로 입감됐다. 도산과 함께 체포된 장이욱이 이때 도산의 서대문형무소 입감 장면을 ‘피골상접한 도산’으로 표현한 것이다.
“수감되기 전에…시멘트 바닥에 가지런히 꿇어앉힌 후 한사람씩 불러내 의복을 전부 벗기고 강력한 펌프질의 소독수를 쏘았다… 도산의 차례가 되자 옷을 벗고 나선 모습은 문자 그래도 피골상접이었다….”
장이욱은 그러면서 “그렇게 엉성한 그 몸 전부를 용하게도 견뎌내고 세차게 발사되는 차디찬 소독수의 세례를 받았다”면서 “생사고락의 경지를 벗어나 오직 민족의 죄와 동지들의 허물을 달게 받는 제단 위의 희생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장이욱은 그런 도산의 모습은 “엄연한 태도와 거룩한 몸가짐은 조선의 참된 혁명가 애국자를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1937년 11월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찍은 바로 그 마지막 사진은 장이욱의 표현대로 ‘저승의 시민 같은 피골이 상접한’ 도산이었던 것이다. 도산 등은 치안유지법위반의 정치범으로 분류되었고 일체 면회가 두절된 가운데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각각 투옥되었다. 도산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는 이의 회고담….
“잡곡밥에 소금뿌린 주먹밥…길게 줄을 서서 저마다 저녁 식사(양철반자위에 콩밥 한 덩이와 소금 한 줌)를 손에 들고…도산의 차례가 왔다. 콩밥 한 덩이를 정중하게 들고 그 앙상한 몸을 움직여 걸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멀리 복도 저 끝에서 사라져 버릴 때까지 바라보았다…내가 이 세상에서 도산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바로 이 때다.”(장이욱의 회고담)
1920년 상하이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오른쪽 네 번째) 등이 이승만(9명 중 가운데) 환영식을 열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죽기도 죄스럽소. 병이 나아봐야 갈 곳은 감옥이고…”
1937년 12월 23일 도산의 건강이 회복할 가망이 없어지자 서대문형무소측은 ‘병보석’으로 급히 출소시켰다.
도산 같은 지도자가 옥사한다면 형무소로서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도산은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이와이(岩井) 내과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위장병 및 폐결핵증의 병세가 갈수록 위독해졌다. 1938년3월9일 주치의(김용필)가 도산에게 “마지막을 준비하시라”고 알려주었다.
도산은 “알겠다”면서 덤덤히 유언을 남겼다. 선생의 유언이 심금을 울린다.
“알았소…. 소위 몸을 혁명운동에 바쳤다고 하면서…더구나 동지들을 옥중에 둔채 나만 이렇게 뜨뜻한 병실에서…죽기도 죄스럽소…병이 나아봐야 갈 곳이 감옥 뿐이요, 적의 발악이 점점 더 심할 모양이니 이 때에 죽는 것이 몸으로서는 편하오마는….”(오기영의 ‘도산 선생의 최후’, <동광> 1047년)
■편히 묻히지도 못한 도산
도산은 1938년 3월10일 0시 5분 서거했다. 일제는 도산의 서거가 끼치는 파급 효과를 우려했다. 가족들에게 “추도회를 열지 말 것과, 장례식 주관 및 참석자는 가족 친지 등 몇 명에 한하고, 고별식에도 이들 이외는 들어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일반인의 조문이 금지되었으며 친족이 상복을 입는 것까지 금지됐다. 영안실에는 정사복 경찰관 40여 명과 고등계 형사들을 배치해서 조문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그들의 언행을 사찰했다.
도산의 유해는 망우리 묘지에 묻혔다. 망우리로 향하는 출입로에는 ‘불온언동자’를 색출하고‘소요’ 사태를 방지하려는 경찰들이 쫙 깔렸다. 영구차 앞뒤로는 경찰 자동차가 경계를 폈으며 경관들은 가로수 수효만큼 나열하여망우리로 향하는 길가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경계를 폈다. 당시 영구차가 묘지로 갈 때 망우리 방향 통행은 일절 금지됐다. 망우리에 도착한 도산의 관은 즉시 매장됐다. 묘지에 심으려고 가지고 갔던 무궁화 묘목은 압수됐다.
■도산의 직업은 무엇?
언젠가 일제 경찰이 혁명가이자 교육자이며 웅변가이자 사상가이기도 한 도산에게 “당신의 직업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산은 당연하다는 듯 또렷하게 대꾸했다.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해왔다.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일제의 요시찰 목록과 서대문형무소의 수형카드에 박힌 사진 3장은 바로 직업이 ‘죽어도 독립운동’이라 천명한 도산의 이력서 같은 것이다. 그런데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독립운동을 한” 도산과 달리 동우회원들은 1941년 8월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모진 고문과 위협, 일제의 회유에 굴복해서 전향서를 제출하고 성명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민족주의를 포기하고 황국화로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일제는 이를 기화로 동우회 같은 민족주의 단체는 거의 박멸되었다고 보고했다. 1938년 11월 3일 보석으로 출소한 이광수(1892~1950)와 주요한(1900~1979) 등은 사상전향회에서 “앞으로 천황의 충량한 일본신민으로 살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래서인가. 도산이 남긴 석 장의 사진, 그 중에서도 서거 3개월 전의 얼굴이 왠지 더욱 늙고 초라해보인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이 기사는 이명화의 논문(‘도산 안창호의 서대문형무소 투옥과 수감생활’, <독립운동사연구> 제46집 46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을 주로 참고 했습니다. 또 최근 박경목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이 박사논문을 보완해서 펴낸 단행본(<식민지 근대감옥-서대문형무소>, 일빛, 2019)도 기사 작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박관장은 관련 사진도 풍부하게 제공해주었습니다. 이밖에 최근 개정판이 나온 이태복의 <안창호 평전>, 동녘, 2019와 안병욱 외의 <안창호 평전>, 청포도, 2004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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