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 때에 문자를 이해하여 사람을 놀라게 했고…용모만 바라보면 속세 사람같지 않았다. 마음이 관대하여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으며, 예의와 법도를 실천했다.”

1560년(명종 16년) 1월16일 <명종실록>이 기록한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졸기(부음기사)다. 절대 다수의 <실록> 부음기사는 고인의 잘잘못을 엄정하게 따졌지만 김인후의 졸기는 그야말로 찬양일색이다. 

그런데 그런 김인후의 유언 한마디가 심싱치않다.

“(내가 죽은 뒤) 옥과(전남 곡성)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김인후는 지금으로 치면 곡성군수(옥과현감)를 지낸 뒤에도 명종 시대에 성균관 전적(정6품), 홍문관 교리(정 5품)와 성균관 직강(정 5품) 등의 관직을 명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런 직함은 내가 죽은 뒤에도 절대 쓰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연유를 따져보자.

인종이 세자시절 스승이자 절친이었던 하서 김인후에게 그려준 ‘묵죽도’. 김인후 역시 이 묵죽도에 충성을 다짐하는 시를 썼다.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호남 유일의 동방 18현

사실 하서는 역사적으로는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하서는 이 땅에 유교가 들어온 이후 이른바 문묘에 종사된 18현 중 한 분이다. 18현은 설총·최치원(신라), 안유·정몽주(고려), 김굉필·조광조·이황·이이·김장생·김집·송준길·정여창·이언적·성혼·김인후·송시열·박세채(조선) 등이다. 문묘종사란 성균관이나 향교의 대성전(공자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제향하는 일을 가리킨다. 유교의 교조인 공자 사당에 올라 함께 제사를 받는 일이니 유학자로서는 어떤 부귀영화가 부럽지않은,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다. 오죽하면 “정승 10명이 현(賢·문묘에 종사된 성현) 한사람만 못하다”(十相不如一賢)는 말이 나왔겠는가.  

중흥군주인 정조는 김인후의 문묘배향결정을 내리면서 “정몽주(1337~1392)가 처음 제창하고, 조광조(1482~1519)가 크게 드날린 (조선 성리학의) 맥이 중간에 도가 막혀 실낱같이 아슬아슬했지만 호남에 공(김인후)이 나타났다”고 극찬했다. 당대의 인물인 참찬관 정유길(1515~1588)은 “학술이 있으면서 물러간 사람은 이황이고, 문장이 있으면서 출사하지 않는 사람은 김인후”라 말했다.(<명종실록> 1555년 5월4일조) 18세기 학자 김원행(1702~1772)은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의병이 많이 거병한 것도 하서의 영향”이라고 평가했다. 우암 송시열(1607~1689)도 “국초 이래 도학·절의·문장을 두루 갖춘 이는 바로 선생(김인후)”이라 콕 찍어 말했다.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된 선비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하나 있다. 조선 선비의 귀감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가 1년에 꼭 한 번 ‘두 얼굴의 사나이’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때가 6월 그믐~7월 그믐 사이다. 그때가 되면 뭇선비들의 롤모델인 김인후는 뒷산인 난산에 올라가 며칠 밤낮 통음하면서 미치광이처럼 대성통곡하다고 돌아왔다. 결국 죽을 때까지 관직에 나서지 않았던 김인후는 “옥과현감 이후의 관직은 (미안하지만) 받지않은 것으로 하겠으니 절대 내 이력에 쓰지말아달라”는 유언까지 남긴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도학자이면서 문묘종사된 만고의 선비가 왜 해마다 7월이 되면 그렇게 미치광이가 되는 것일까. 잠깐 시계를 16세기 중반으로 돌려 놓아보자. 

1518년(중종 13년) 9살이던 김인후를 만나본 홍문관 교리 기준(1492~1521)은 아주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긴다. 

“이 소년은 후일에 마땅히 세자(인종)을 모시는 신하가 될 것입니다.”

과연 그랬다. 31살 때인 1540년(중종 35년) 대과에 급제한 김인후는 기준의 예언대로 세자(훗날 인종)인 이호(1515~1545·재위 1544~1545)의 교육기관인 세자시강원의 설서(정7품관)가 됐다. 세자와는 5살 차이였지만 두 사람은 세자-스승 이상의 절친이 되었다. 인종은 6살 때인 1520년(중종 15년) 책봉된 이후 세자 신분으로만 25년간이나 살았다. 인종은 친모인 장경왕후(1491~1515)가 산후증으로 7일만에 승하하면서 새어머니인 문정왕후(1501~1565)의 영향을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문정왕후에게도 아들(경원대군·훗날 명종)이 있었다. 문정왕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옥좌에 올려놓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랬으니 인종의 25년 세자 생활은 칼끝을 걷는 듯한 위태로운 하루하루였다. 

그럼에도 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성군의 자질을 물씬 풍겼다. ‘요순이 될 소년 임금’이라는 칭찬이 자자했다. 부왕(중종)의 질문에 ‘어느 책에서 나왔고 그 뜻은 이러이러 하다”고 막힘없이 대답했다. 

훗날 우여곡절 끝에 즉위한 인종을 보고 명나라 사신이 내뱉은 한마디….

“조선의 임금은 성인이지만 너무도 조그만 나라다. 조선인들은 실로 복이 없도다.”(<아성잡기>) 

우암 송시열이 쓴 하서 김인후의 신도비. 송시열은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하서 김 선생을 태어나게 했고, 태산북두와 같은 백세의 스승”이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필암서원

■세자의 선물 3가지

이때 세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스승 겸 동무가 바로 5살 연상의 하서 김인후였다. 스승은 성군의 자질을 흠모했고, 세자는 김인후의 높은 학문과 덕행, 절의를 알고 있었으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마음문을 열었다.

세자-김인후 간 브로맨스를 일러주는 일화가 꽤나 많다. 즉 세자 시절 김인후에게 싱싱한 배 3개를 하사한 일이 있었다. 김인후는 이중 한 개는 맛을 보고. 나머지 두 개는 보자기에 잘 싸서 간수했다.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올리고, 그 씨는 받아두었다가 밭에 심었다. 자손이 대대로 그 배나무를 보호했다. 

또 하나 세자가 김인후에게만 특별히 주었다는 <주자대전> 한 질이 주목을 끈다. 원래 세자가 스승(시강원 관리)들에게 국화 화분 등 이런저런 선물을 하사하는 것은 일상사였다. 

그러나 세자가 숙직실까지 친히 왕림해서 김인후에게 글을 질문하고, <주자대전> 한 질을 하사한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성리학의 전범인 <주자대전>은 1543년(중종 38년) 수입된 신간이었다. 한마디로 격이 다른 선물이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인종은 ‘훗날 내(인종)가 옥좌 위에 오르면 국가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의 해석을 그대에게 맡기려 한다’는 심모원려(深謀遠慮)를 <주자대전>에 담았을 것이다. 김인후는 세자가 하사한 이 책을 달달 외웠다. “주묵(붉은 색 먹)으로 구절구절 표점까지 찍으며 아껴 읽었다”고 했다. 

하루는 김인후를 불러 비단 위에 손수 대나무를 그려 하사했다. ‘묵죽도’다. 대나무가 애곡(涯谷·절벽과 골짜기) 사이에서 솟아나 곧게 하늘을 떠받드는 형세였다. 김인후는 ‘묵죽도’에 충성을 맹세하는 시를 남겼다.

“뿌리, 가지, 마디와 잎새, 모두 정미하다.(根枝節葉盡精微) 굳은 돌,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石友精神在範圍) 조화를 바라시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닫노니(始覺聖神모造化), 천지에 한결 같으신 뜻을 어길 수 없도다.(一團天地不能違)”

대나무는 세자(인종)을, 돌덩이는 충성스러운 신하를 각각 상징한다. 따라서 인종이 손수 그린 묵죽을 하사하고, 김인후가 잘 받았다는 시를 남긴 것은 바로 임금이 될 세자와 충성을 바치겠다는 신하 사이에 맺은 맹약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인종과 김인후가 주고받은 ‘묵죽도’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됐다.

단적인 예로 송시열은 “인종은 김인후의 도덕과 학문의 휼륭함을 알아 성심으로 예우했고, 김인후 선생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남을 알아 장차 요순의 정치를 펼 것으로 여겼다”면서 “두 사람의 만남이 날로 더욱 짙어지고 기대도 날로 더욱 높아졌다”고 했다. 


■비통한 단명 임금

하지만 영조 시대의 승지 박사창(1687~1941)의 표현대로 ‘백왕보다 더 높다는 인종의 성덕’은 채 피지도 못한채 8개월 단명으로 끝나고 만다. 인종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지나친 효도 때문에 얻은 병’으로 알려져 있다.   

1544년(중종 39년) 중종이 병에 걸리자 세자(인종)는 부왕 곁을 지키면서 밤낮으로 관과 띠를 풀지 않았고, 곡기까지 끊었다. 세자를 모시던 측근들은 “저렇게 하다가는 필시 몸이 상할텐데….”하고 걱정했다. 그런 지극정성에도 아버지 중종이 승하하자(1544년 11월 15일) 인종은 머리를 풀고 뜰 밑에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다섯달 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인종의 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다. 

겨우 8개월간 재위하던 인종은 승하하기 전날(1545년 6월 29일) 마지막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선정신 조광조의 관작을 복구하라”는 특명과 함께 “현량과(과거없이 천거하는 제도)를 회복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인종은 “이제 정신을 차릴 수 없다”면서 경원대군(중종)에게 전위하고는 이튿날인 1545년 7월1일 경복궁 정침에서 31살의 춘추로 승하했다.

“이제야 태평시대를 열겠구나”라 기대했던 백성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먼 지방이나 궁벽한 시골 유생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대궐 밖에서 우는 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서 김인후를 모신 필암서원. 전남 장성 황룡 필암리에 있는 서원이다. 호남 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를 배향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인종은 ‘의문사’ 했다

그런데 인종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여론이 퍼졌던 것 같다. 

문정왕후와 왕후의 오라비인 윤원로(?~1547)·윤원형(?~1565) 형제가 인종을 해코지 하려고 갖은 술수를 썼다. 특히 윤원형 등은 일찍이 절에 불공을 올려 임금의 수명이 길지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한밤중에 남산에 올라 손수 향을 피워놓고 등불을 켜놓고는 “제발 임금이 빨리 죽게 해달라”는 등 참담한 기도를 해댔다. 또 궁중에 나무로 만든 사람을 묻어서 요망한 방술을 했다.(<영남야언>, <풍암집화>) 

1543년(중종 38년) 1월7일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다. <중종실록>은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불이 번졌는데도 세자가 어디로 피신했는지 아무도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1468~1544)가 “세자가 어느 곳으로 피했느냐”고 묻자 승지들은 “창졸간이라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연려실기술>은 을사사화(1545년)로 화를 입은 인물들의 전기를 모은 <유분록>을 인용하여 “동궁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세자의 침소가 밖에서 잠겨 있었으며 누군가 불지른 혐의가 역력했는데, 다들 윤원로(문정왕후의 오라비)를 지목했다”고 썼다. 

또 어떤 이들은 역시 문정왕후의 오라비인 윤원형을 찍기도 했다. 이때 사간원 정언 심령(1513~1547)은 “동궁 화재에는 방화의 혐의가 역력하다”면서 “사간원에서 동궁을 모해한 자의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이때 좌중에서 ”맞다” “무슨 말이냐”는 고성이 오갔고, 결국 “막중한 일이니 내일 다시 의논해서 아뢰자”는 것으로 유야무야됐다. 구구한 억측이 나왔다.

세자가 누구(문정왕후 측)의 짓인 줄 알고 부인(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한 다음 “차라리 조용히 타 죽겠다”고 했다는 것, 그러다 급히 세자 처소를 찾은 귀인 정씨(송강 정철의 누이)의 손에 이끌려 현장을 빠져나왔다는 것, 또한 인종은 범인이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모른체 했다는 것 등이다.


■착한 세자를 괴롭힌 문정왕후

인종의 스승이자 절친인 김인후도 당연히 이런 수상한 기미를 감지했다. 

부모 공양을 위해 옥과(전남 곡성) 현감으로 나가있던 김인후는 1545년(인종 1년) 4월 조선을 방문한 중국사신을 맞이하는 직책(제술관)을 맡아 상경했다. 인종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던 때였다. 김인후는 스승의 자격을 내세워 “약제의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당신의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김인후는 큰소리를 지르고 가슴을 치면서 “제발 참여하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도저도 안되자 김인후가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그렇다면 전하를 제발 다른 궁궐로 옮겨야 한다. 다른 곳에서 건강을 돌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마저 허용되지 않았다.(<공사견문>) 김인후는 문정왕후를 의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문정왕후는 어지간히 세자를 괴롭혔다. 세자 때문에 자신의 친아들인 경원대군이 옥좌에 오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루는 문정왕후가 인종 임금에게 뜬금없이 “이제 홀로 된 첩(문정왕후 본인)과 약한 아들(경원대군·훗날 명종)이 어떻게 몸을 보전할 수 있겠느냐”고 괴롭혔다. 

김인후의 문집을 새긴 목판. 전남 도유형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됐다.|필암서원 소장

효심이 남달랐던 인종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아 ‘햇빛이 쨍쨍 쬐는’ 무더운 날에 맨 땅에 오랫동안 엎드려 문정왕후의 노여움을 풀어주었다. 장례를 치르느라 만신창이가 된 인종을 더욱 사지로 내몬 문정왕후의 악행이었다. 

인종은 이후 문정왕후의 심기를 건드릴까 전전긍긍했다. 승하하기 4일 전인 6월27일 벼락이 경회루 기둥을 때려 쇠기둥이 부서지자 그 위독한 몸에도 불구하고 “벼락이 어디를 때렸느냐. 대비전(문정왕후)께서 놀라셨을까 걱정이다”라면서 내관을 보내 문안했다. 그 정도로 인종은 효자였다.

그런 지극한 효자를 문정왕후가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질에 시달린 인종에게 이질과 상극인 닭죽을 매번 바쳤다는 이야기와, 혹은 독이 든 떡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난생 처음 살갑게 대하는 계모(문정왕후)가 먹어보라고 준 떡을 덥석 받아먹었다는 그럴싸한 이야기까지 돌았다. 


■“인종이 돌아가신 것은…” 내관들의 수근거림

그러나 마냥 가짜뉴스만은 아니었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고도 3년이 지난 1548년(명종 3년) 8월30일 <명종실록>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인다. 즉 이틀 전인 28일 내관들이 한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관 김준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이다.

“인종께서 돌아가신 것은 김충후와 석씨 등의 소행이야.”   

<명종실록>은 이 해괴한 말을 내뱉은 내관 김준을 의금부에서 추국했다는 사실만 기록하고 끝냈다. 김충후가 누구인지, 석씨가 누구인지도 더 밝히지 않았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른 두사람을 어찌 처리했다는 것일까. 의문투성이다. 어떻든간에 인종의 죽음이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뭔가 석연치 않은 의문사였음은 분명하다.

인종의 절친 김인후는 범인을 문정왕후라 확신했다. 김인후는 측천무후와 양귀비를 비판하면서 “삼강오륜이 쓸어낸 듯 다 없어졌네. 사람의 짓이 개돼지와 마찬가지네”라 했다. 궁궐 안 욕심많은 한 두 여자가 권세를 손에 쥐자 인륜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 것이다.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의 오라비인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1565)을 지칭한 말이다.


■인종 승하의 내막 듣고 오열하고 기절한 김인후  

숱한 의혹을 남긴채 인종이 서거하자 옥과에서 비보를 들은 김인후는 기절하고 말았다.

어떤 이가 김인후에게 인종 승하의 곡절을 말하자 듣고 놀라 울부짖었고, 이후 몸이 수척하여 문을 닫고 병을 핑계삼아 세상 일을 물리쳐 버리고 다시 벼슬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인종 승하의 곡절이 과연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겠다. 이때 김인후가 남긴 시 한편(‘유소사·有所思’)이 심금을 울린다.

“님(인종)의 나이 바야흐로 30이요, 내 나이도 서른하고도 여섯이로세.(君年方向立 我年欲三紀) 새 정을 반도 다 못누렸는데 이별은 화살과 같구나.(新歡未渠央 一別如弦矢) 내 마음은 변할 줄 모르는데, 세상일은 동편으로 흘러가는 물이로다.(我心不可轉 世事東流水)….”

김인후는 술과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특히 해마다 인종의 기일(7월1일)에 다가오면 실성한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울부짖었다.

“김인후는 항상 6월 그믐 이전부터 7월 그믐까지 술을 실컷 마시고 몹시 취해 정신 잃고 말았다. 때로는 통곡하며 슬퍼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했다.”(<명신록>)

송강 정철(1536~1593)은 김인후의 기일만 되면 산중에 올라 통곡하는 김인후를 위해 “해마다 7월이 되면(年年七月日) 만산중에서 통곡한다.(痛哭萬山中)”는 시를 남겼다.

송시열은 김인후의 친구인 정황(1512~1560)의 묘갈에서 “하서(김인후)는 인종이 승하하자 문을 닫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다”면서 “김인후가 당시 어의의 처방을 살펴보겠다고 자청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송시열도 인종의 죽음에 의문부호를 표했던 것이다.


보물 제587호 ‘필암서원 문적 일괄’. 보물로 지정된 유물은 총 14책 64매이다. 창건당시부터 보존되어 온 것이 아니라 인조 2년(1624)부터 1900년 무렵까지의 자료들이다. 필암서원의 역대 원장들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학생들의 수업을 담당한 교관, 강의에 참석한 인물의 명단 등을 기록한 ‘보강안’ 등이 있다. |필암서원 소장

■‘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마라’

김인후는 이후 여러번 명종의 부름을 받았지만 발에 습종(붓는 병)이 났니 어떠니 하면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끝내 응하지 않았다. 명종의 등극과 함께 소윤(윤원로·윤원형)이 대윤(윤임·1487~1545)을 공격하는 을사사화(1545년 8~9월)가 일어나 잔혹한 피의 숙청이 자행되고 이후 20년간 문정왕후와 소윤의 국정농단이 이어졌다. 

김인후 같은 고결한 선비가 들어서기에는 조정은 너무 더러운 냄새가 풍기는 난장이었다. 명종은 1553년(명종 8년) 7월과 8월, 11월 연속 세번에 걸쳐 김인후를 성균관 전적(정 6품), 홍문관 교리(정 5품), 성균관 직강(정 5품) 등으로 제수했다. 그러나 김인후는 응하지 않았다. 

8월 홍문관 교리로 명받았을 때의 일화는 유명하다. 임금의 명을 마냥 거절할 수 없어 김인후는 일단 “명을 받든다”면서 수임길에 올랐다. 하지만 대나무와 꽃이 있으면 문득 시상이 떠오른다면서 말에서 내려 술을 한잔 씩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10여 일쯤 지나 술을 떨어지자 “병이 났다”면서 발길을 돌렸다. 김인후는 명종에게 “병든 몸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고향에서 목숨을 마치도록 허락해달라”면서 “강호에 살면서 그저 임금(명종)이 잘 되기만을 바랄 것”이라고 완곡한 고사(固辭)의 뜻을 전했다. 

김인후의 글을 받아본 명종은 “병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임금을 섬기는 대의(大義) 또한 중요하니 신병을 조리하고 임명장을 받으라”는 명을 다시 내렸다. 그래도 김인후가 “아파서 도저히 안되겠다”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명종은 성균관 직강으로 고쳐 임명하면서 “과인이 병이 날 때까지 기다리마”라 약속했지만 이마저 거절했다.

1554년(명종 9년) 9월3일 참찬관 정유길은 “초야에 묻힌 김인후를 어떻게든 활용해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김인후의 처지를 아뢴다.

“지금 김인후는 몹쓸 병이 들었기 때문에 주상께서 불러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그가 사는 집이 매우 곤궁하여 비와 바람을 가리지 못하고 처자가 의탁할 데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전라관찰사에 명해서 김인후의 병이 나은 뒤에 그 지방에서 어느 한가한 지방에서라도 문한(文翰·문장)에 관한 일을 맡긴다면 인재를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경기 고양 서삼릉에 있는 인종과 부인인 인성왕후 박씨(1514~1577)의 무덤. 

김인후는 이때 매우 곤궁한 처지에 놓였지만 끝내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정유길에 이어 참찬관 박민헌(1516~1586) 역시 “초야에 묻힌 이황과 김인후를 반드시 블러야 한다”(1555년 11월7일)고 거듭 주장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때 <명종실록> 사관의 논평이 의미심장하다.

“사신은 논한다. 이황·김인후 같은 유신(儒臣)이 있었지만 끝내 등용하지 못했으니 잘못된 정사(政事)가 아닐 수 없다. 또 참찬관 박민헌의 말이 채택되지 않고 그의 직책도 중임(重任)에서 외무(外務)인 천문으로 좌천됐으니 오늘날의 정사가 어찌 그리 경중의 차례를 잃었는가.”

이황·김인후의 등용을 주장했던 박민헌이 참찬관에서 경질되어 당시로서는 외무직인 천문 분야로 좌천되었다는 것이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농단하던 조정의 분위기를 전한 것이다. 이 사관이 덧붙인 ‘김인후 논평’은 다음과 같다.  

“김인후는 재행(才行)이 있고 영진(榮進)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독서를 좋아했고, 글을 잘 지었으며, 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담담했다. 만년에는 성리학을 좋아하여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했다. 여러 번 불렀지만(발탁) 나오지 않았다.”


■너무도 짧은 만남

최근 유네스코의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유네스코 세계위원회에 한국의 서원 9곳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것을 권고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ICOMOS의 권고에 따라 이변이 없는한 오는 6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리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서원의 등재가 최종 결정될 예정이다.  

등재될 서원은 소수서원(안향)·도산서원(이황)·병산서원(류성룡)·옥산서원(이언적)·도동서원(김굉필)·남계서원(정여창)·무성서원(최치원)·돈암서원(김장생)과 함께 바로 하서 김인후를 모신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등 9곳이다. 다들 쟁쟁한 유학자들의 이름과 정신이 깃든 서원이다. 그중 하서 김인후는 정조 때인 1796년(정조 20년) 호남 지방에서 유일하게 문묘(공자 사당)에 배향된 분이다. 

경기 파주에 있는 윤원형과 그의 애첩인 정난정의 무덤. 명종 시대에 누이인 문정왕후의 뒷배를 믿고 국정을 농단했다. 정난정의 무덤은 윤원형 무덤의 뒤에 아주 작게 조성되어 있다.

■“국정농단세력이 내린 관직은 받을 수 없다”

신흠(1566~1628)의 <상촌선생문집>은 인종의 묵죽도에 발문을 쓰면서 두사람의 기구한 만남을 애달파했다.

“인종대왕은 하늘이 낸 성인이다. 취미인 서예가 묘경(妙境)에 이르렀으니 모름지기 성인이란 모든 능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하서 김인후의 어짊으로 인종대왕을 만난 것은 천재일우였다. 그러나 한 해를 못 넘기고 인종대왕을 잃은 애통을 만났으니….”

신흠은 두사람의 짧고 애통한 만남을 두고 “천명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짜 천명은 어디 있다는 말이냐”고 한탄하고 있다. 신흠은 “이 묵죽도를 보는 이는 반드시 깊이 탄식하면서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감개무량 여길 것”이라 했다. 

무엇보다 ‘옥과현감 이후의 관직은 절대 거론하지 말라’는 김인후의 유언이 심금을 울린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그리고 그의 애첩인 정난정 등 국정농단 세력이 내려준 ‘부끄러운 관직’은 절대 받을 수 없다는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김경호, ‘그리움의 분노’, <한국인물사연구> 19집, 한국인물사연구소, 2013

백승종, <대숲에 앉아 천명을 그리네>, 돌베개, 2003

허경진 옮김, <한국의 한시 49-하서 김인후 시선>, 평민사, 2000

김정수, <전라도 사람들-김인후편>, 장문산, 2009

이용수, ‘김인후 연구’, <한국시가문화연구> 28, 한국고시가문학회, 2011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