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명필 김생의 일화 중 아주 재미있는 것이 있다.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김생의 필법을 이어받은 서예가인 홍관(?~1126)이 송 휘종 연간(재위 1100∼1125)에 진봉사(進奉使·중국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려고 파견한 사신)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김천 수도암비’에서 확인된 ‘김생서(金生書)’ 글자(왼쪽)와 제작연대를 밝힌 연호인 ‘원화 3년’(808년) 글자(가운데), 그리고 제작목적을 알린 ‘비로자나불’ 글자.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은 “이 비문은 ‘김생서 수도암 비로자나불 조성비’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 제공
■왕희지의 재림을 몰라본 중국인들
어느날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빈관에 머물고 있던 홍관을 찾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송나라 한림대조 양구와 이혁이었다. 홍관이 김생의 ‘행초(行草·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야 오늘 여기서 왕희지의 글씨를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두사람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자 홍관은 손사래를 치며 “이것은 왕희지의 글씨가 아니라 신라 사람 김생이 쓴 것”이라고 고쳐주었다. 하지만 양구와 이혁은 ‘우릴 놀리냐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 놀리지 마세요. 천하에 왕희지를 빼놓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습니까. 말도 안됩니다.”
홍관이 “아니다 진짜 김생의 글씨다”라고 몇번을 말했지만 두사람은 ‘농담하지 마라’는 듯 웃어넘겼다. <삼국사기> ‘열전·김생전’이 소개한 일화이다. 중국인들이 김생의 글씨를 보면서 ‘왕희지의 재림’이라고 놀라면서도 끝내 신라인 김생의 글씨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갈항사지 동탑 명문(왼쪽)과 탁본. ‘김천 수도암비’와 품격과 서체, 형식이 비슷하다. 박홍국 관장은 “이 역시 김생의 진적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박홍국 관장 제공
■신품제일의 서예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 이런 평판이 있었으니 당대 김생의 글씨는 극찬의 대상이었다.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인 이인로(1152~1220)은 “계림인(신라인) 김생은 용필이 신과 같아서 초서도 아닌 듯 행서도 아닌 듯 하다”거나 “신라인 김생은 필법이 기묘하니 위·진 사람들이 발돋움하여 바라볼 수 없었다”고 극찬했다.(<파한집>) 천재 문인인 이규보(1168~1241) 또한 역대 명서가를 품평하면서 김생을 ‘신품제일(神品第一)’이라 했다.(<동국이상국집>)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극찬이 이어졌다. 조선 초기의 문인인 서거정(1420~1488)은 “우리나라 글씨를 논한다면 김생이 제일이며 학사 요극일과 스님 탄연, 영업 등이 그 다음인데 모두 왕희지를 법으로 삼았다”고 치켜세웠다.(<필원잡기>)
또 17세기 명서예가인 미수 허목(1595~1682)는 “경주에서 들었는데 원성왕 때 사람인 김생은 산 속에 들어가 나무를 꺾어 땅에다 획을 그으면서 왕희지의 필법을 배워 신품(神品)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기언>) 18세기 명필인 이광사(1705~1777) 역시 “우리나라 필법은 김생을 종(宗)으로 삼는다 오늘날 그의 진적으로 전하는 예는 거의 없지만 탑본(석판이나 목판에 글씨를 새겨 찍은 것) 역시 기위(奇偉·기이하고 훌륭함)하고 법도가 있어서 고려 이후 누구도 견줄 수 없었다”(<서결>)고 극찬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홍양호(1724~1802)도 “김생은 동방 서가의 시조”(<이계집>)라 했다.
갈항사지 동탑 명문 탑본과 낭공대사비 탁본과의 비교. 서체가 매우 흡사하다. |박홍국 관장 제공
■김생의 글씨 3180자를 집자한 보물탑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전하는 김생의 진적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김생의 글씨 3180자를 한자 한자 집자(集字·문헌에 있는 글자를 찾아서 모음)해서 새긴 비석은 남아있다. 그것이 경북 봉화에 있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보물 제1877호)이다. 낭공대사탑비는 나말여초의 고승인 낭공대사(832~916)의 행적을 기록해 고려 때인 954년(광종 5년) 세운 비석이다.
비문에 따르면 낭공대사가 입적하자(917년) 경명왕(재위 917~924년)이 낭공대사라는 시호와 백월서운이라는 탑명을 내렸으며, 당대의 명문장가인 최인연(868~944)에게 명문을 짓게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고려 광종 때인 954년(광종 5년) 낭공대사의 문하법손인 순백이 후기를 지어 함께 새겼다. 글자는 바로 자경 2~3㎝의 행서로 새겼는데, 낭공대사의 문인인 단목이 김생의 필적을 하나하나 집자했다고 한다. 몇십자 몇백자도 아니고 3000자가 넘는 글자를 찾아내 새겼다는 것은 대단한 공력이다. 그만큼 김생의 필적을 귀히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세운 비석은 태자사가 폐사된 다음 묻혀버린채 방치됐다. 그러다 조선 중종 때인 1509년(중종 4년) 영천 군수 이항(1499~1576)이 경북 영천으로 옮겨놓았다. 이항이 비석의 옆면에 새겨놓은 탑의 이건(移建) 내력을 보면 흥미롭다.
“이 비석의 글씨는 김생의 필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내가 잘 옮겨놓았다. 1100년 동안 버려진 김생의 글씨가 이렇게 잘 옮겨져서 세상의 보배로 거듭났으니 양반 호사가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항 덕분에 김생의 집자비(낭공대사탑비)가 있는 영천은 조선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이곳을 방문한 조선의 문인들은 물론이고 소문을 들은 중국의 문인들도 앞다퉈 탑본을 떠갔다.
신행선사가 입적한 지 35년만인 813년 건립된 단속사 신행선사비문의 탁본. 획이 굵고 가늘고 굽고 곧은 것이 자유자재였다는 김생 글씨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홍국 관장 제공
■김천에서 나타난 김생의 진적
그런데 중국인들조차 ‘재림 왕희지’임을 믿지못했던 전설적인 김생의 진적이 확인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더나아가 김생의 진적이 남아있는 것만 3건 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가 있다.
불교고고학이 전공인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65)이다. 때는 바야흐로 2016년 11월 중순 박홍국 관장은 김선덕 서진문화유산보존연구소장으로부터 제보 한 건을 받았다.
“경북 김천 청암사의 부속암자인 수도암(해발 970m) 약광전 앞에 있는 비석의 여백에 작은 글씨들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판 것으로 짐작되는 ‘창주도선국사비’라는 커다른 글자가 새겨져 있는 화강암 비석이었다. 그 큰 글자 옆 여백에 훨씬 이전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희미한 글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박 관장은 2차례 암자를 방문해서 비석의 명문을 읽었다. 그러나 ‘산(山)’자와 ‘불(佛)’자, ‘지(之)’자만 판독한 것으로 그쳤다.
그로부터 2년 반 후인 지난 5월초 연휴를 앞둔 박 관장은 잊혀진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에 읽어내지 못한 ‘김천 수도암비’의 명문을 확인하고픈 욕심이 들었다. 박관장은 어린이날 연휴의 시작일인 5월4일수도암에 올라 비석의 탁본을 떴다. 암자의 주지인 원직스님은 “연구용이라면 얼마든지 해보라”고 허락해주었다. 이틀 뒤 전문가들인 정현숙 박사(원광대 서예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및 이영호 경북대 교수 등과 함께 다시 암자에 올라 비문을 판독했다. 판독결과 높이 177㎝, 너비 60~61㎝의 ‘김천 수도암비’에는 8행에 걸쳐 모두 200여 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그중 ‘부진(夫眞)’을 비롯해 ‘불은(佛恩)’ ‘성덕(聖德)’ ‘산밀(山密)’ ‘자(者)’ ‘입차비야(立此碑也)’ ‘대(大)’ ‘진(眞)’ 등의 글씨가 보였다.
‘김천 수도암 비석’. 일제강점기에 판 것으로 짐작되는 ‘창주도선국사’라는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여백에서 신라 명필 김생의 글씨 200여자가 보였다고 한다. |박홍국 관장 자료에서
■‘김생서(金生書)’ 명문의 출현
5월 중순의 2차 판독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비석 끝부분 8행에서 흐릿하지만 다른 글자보다 조금 작게 새긴 ‘김생서’(金生書) 세 자를 찾았다. “김생이 썼다”는 움직일 수 없는 기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뿐이 아니었다. 또 6행 중간에서 ‘원화3년(元和 三年)’이라는 연호가 발견됐다. 이 연호는 후대(일제강점기)에 판 ‘도(道)’자에 의해 원(元)자가 가로로 절단됐으나 일부 획이 남아 판독이 가능했다. 또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이 제1행에서 판독한 ‘비로자나불’을 통해서는 비석을 세운 목적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박홍국 관장은 “따라서 이 ‘김천 수도암비’는 ‘김생서 수도암 비로자나불 조성비’라는 명칭을 붙여야 할 것 같다”고 제안했다. 박관장은 “불교 용어와 옛 글자를 잘 아는 연구자가 모여서 판독하면 15∼25자는 더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김생서’라는 글자와 함께 서체 또한 전체적으로 김생의 친필로 보인다는게 전문가인 정현숙 박사의 판단이다. 정현숙 박사는 이 ‘김천 수도암비’와 김생 글씨의 집자비인 ‘태자사 낭공대사탑비’와 비교검토를 통해 김생의 글씨로 판단했다.
발견된 비문의 서체가 행서의 필의가 많은 북위풍 해서로 김생의 해서·행서 집자비인 낭공대사탑비의 글자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생의 친필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비문의 대(大), 비(碑), 야(也), 자(者) 등의 글자는 획의 삐침 등 여러 면에서 낭공대사탑비의 글자와 닮았다”고 말했다.
■‘808년 김생이 쓴 수도암 비로자나불 조성비’
작자가 김생이 맞다면 제작연대를 알려주는 ‘원화 3년’의 연호 명문은 어찌 된 것인가.
‘원화’는 당나라 헌종(재위 805~820)의 연호이다. 806년 1~820년 12월까지 15년간 사용됐다. 따라서 ‘원화 3년’이라면 808년(애장왕 9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삼국사기> ‘열전·김생전’에 등장하는 김생의 탄생연도와 비교하면 곤혹스러울 수 있다.
“김생은 출생이 한미해서 그 가계를 알 수 없다. 경운 2년(711년)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며…나이가 80이 넘도록 붓을 잡고….”
한가지 이상한 대목은 있다. 김부식(1075~1151) 등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열전에 등장하는 인물 69명 중 유이(唯二)하게 김생과 김유신(595~673)의 출생연도만 기록했다. 그랬으니 김생의 출생연도가 711년(성덕왕 10년)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어찌된 것인가. 이번에 확인된 ‘김천 수도암비’의 판독이 맞다면 711년 태어난 김생이 97살 때인 808년 이 비석을 썼다는 얘기가 된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박홍국 관장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조심스레 지적한다.
<삼국사기> ‘열전’에 유이(唯二)하게 등장하는 김생의 정확한 출생연도가 오히려 이례적이라는 것이다. 박관장은 “문무왕이나 그의 동생인 김인문조차도 비문 사망 연도를 기점으로 출생 연도를 파악한다”면서 “신분이 미천한 김생의 탄생연도를 적었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강조했다. 박관장은 “따라서 김부식과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김생 출생 연도의 근거로 삼은 원전이 정확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쿠킹호일로 탁본한 비문 내용. 연호인 '원화삼년(元和三年)'의 '화(和)'자와 '삼(三)'자가 보인다. |박홍국 관장 제공
■김생의 진적이 2건 더 있다
박관장은 한발 더 나아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김생의 진적이 2건 더 있다고 보았다.
경북 김천의 갈항사지 동탑 상층 기단 명문과 경남 산청 단속사 선행선사비의 탁본이다.
갈항사지 동탑 명문은 ‘김천 수도암비’의 특징, 즉 ‘한 줄에 해서와 행서가 같이 있고, 서체가 낭공대사비와 유사하며, 품격이 매우 높은 점’ 등이 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갈항사지 동탑은 ‘수도암비’와 함께 김천지역에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김천은 김생의 주활동무대였을 수도 있다.
갈항사지 동탑의 명문은 원성왕 시대에 쓴 것으로 짐작된다. 근거는 무엇일까.
탑의 명문에는 ‘경신(敬信)’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경신은 원성왕(재위 785~798)의 본래 이름이다. 죽은 뒤에 붙인 이름인 시호(원성왕)가 아닌 생전의 이름(경신)을 탑의 명문에 새긴 까닭은 무엇일까.이 갈항사지 동탑이 원성왕의 생전(재위 785~798)에 새겼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만약 <삼국사기>에 나온 김생의 출생연도가 맞다면 갈항사지탑 비문은 김생이 75~80세 때 썼다는 얘기가 된다. 박홍국 관장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생의 탄생연도가 30~40년 정도 빠른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정해본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갈항사지 동탑 명문은 지금까지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김생 진적이라 할 수 있다.
박 관장이 김생의 진적으로 추정하는 또하나의 유물이 경남 산청의 단속사 신행선사비이다. 비석은 혜공왕(재위 756~780)대의 선승인 신행선사가 입적한 지 35년 만인 813년에 건립됐다. 지금은 비석의 탁본만 남아있다. 비문에 따르면 “김헌정이 찬하고 동계사문 영업이 쓴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비문의 탁본 글씨를 보면 이른바 태세곡직(太細曲直·획이 굵고 가늘고 굽고 곧은 것)이 자유자재였다는 김생 글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비를 썼다는 ‘영업’이라는 인물은 누구일까. 박홍국 관장은 “영업은 바로 김생의 법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박관장은 “이 비의 글씨는 당대 김생의 제자나 후배가 모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신품”이라면서 “이 탁본은 비문이 마멸되기 전에 제작된 것이어서 지금 이 순간 김생 글씨의 절묘함을 실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의 진적”이라고 평가했다. 박관장의 주장이 사실로 판명되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김생의 진적이 새롭게 3건이나 확인된 셈이다.
■<삼국사기> 기록 뒤엎을 자료
<삼국사기> 기록을 뒤집고, 서예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김생을 흔히 ‘동방의 서성’이라 칭송한다. 혹은 ‘왕희지의 재림’이었는데 중국인들이 몰라봤다는 일화도 남겼다. 하지만 김생은 왕희지의 서풍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변모시켜서 독창적인 예술성을 발휘했다. 그런 점에서 극찬을 받는다.
박홍국 관장은 “<삼국사기> 기록을 뒤집을만한 김생의 진적이 나온만큼 이제는 ‘김생서 수도암 비로자나불 조성비’로 일컬어야 할 ‘김천 수도암비’를 축으로 김생의 진적으로 추정되는 갈항사지 명문과 단속사 신행선사비 탁본 등을 연구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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