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5월21일 새벽 4시, 필리핀 20대대 수색중대 제2소대가 작전을 개시한다.
작전목표는 임진강 지류인 연천 역곡천 지류에 이어진 야트막한 고지군(群)의 일부분인 에리고지(Eerie·해발 183m)였다.
에리고지는 아스널, 요크, 엉클과 함께 티본고지(T-bone·290m)의 전초기지 노릇을 했다. 이미 3일전인 5월18일부터 고지를 두고 수류탄과 총검으로 대결한 치열한 백병전이 8차례나 이어지고 있었다.
이날 작전을 이끈 제2소대장은 피델 V 라모스 중위였다. 그는 1950년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런 그가 ‘중공군이 고지 정상에 설치한 8곳의 벙커를 폭파,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가능하면 적병을 생포하라’는 임무를 받은 것이다. 라모스 중위는 저격조(9명), 척후조(10명), 소총조(13명) 등으로 구성된 44명의 돌파대를 이끌었다.
■피델 라모스의 무용담
라모스 중위는 800m 밖에 안되는 잔솔밭과 논밭을 2시간여에 걸쳐 야금야금 침투한 뒤 고지 정상에서 400m 떨어진 수로에서 기다렸다. 오전 7시. 작전을 엄호하기 위한 전폭기와 전차, 포병이 총동원된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됐다. 10분 후 라모스 돌격대가 고지를 뛰어올랐다. 필자가 <한국전쟁사 제11권-유엔군참전편>(국방부 전사편찬위, 1980년)을 읽다가 우연히 찾은 자료를 보면 마치 전쟁영화를 보는 듯하다.
“에리(Eerie·해발 183m)고지 제3벙커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라모스 중위는 호 안의 적병이 모두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벙커 입구 4m까지 다가왔다. 그 때였다. 별안간 중공군 2명이 소총을 난사하며 뛰쳐나왔다. 놀란 라모스 중위는 칼빈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중공군 3명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라모스 중위는 미군공병대 병사들에게 중공군이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도록 다이너마이트로 벙커를 폭파시키도록 명령했다. 적의 반격이 거세지자 라모스 돌파대는 철수하기 시작한다.
“라모스 돌파대는 불과 30분 간의 격전 끝에 임무를 완수한 뒤 뒹굴다시피 철수했다. 작전에 임한 장교 3명과 사병 41명은 단 1명의 손실도 없이 기적적으로 복귀했다. 반면 5~6명이 활동할 수 있는 벙커 7개를 완파했고, 중공군 70여 명을 살상했다. 부대는 훗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을 받았다.”
■500페소 짜리 필리핀 지폐
주인공인 피델 발데스 라모스 중위가 누구냐. 바로 1992년부터 96년까지 필리핀 대통령을 지낸 바로 그 ‘피델 라모스’를 말한다.
그는 대통령이 된 이후 한국전에 참전, 전투를 벌이다 어깨를 다쳤다는 등의 이력을 누누이 자랑했다. 하지만 라모스 중위의 참전기록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무용담이 늘 그렇듯 약간의 ‘초’를 친 자랑거리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찾은 공식적인 ‘전사(戰史)’는 라모스 소대의 무용담이 마냥 허풍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피아간 전사 역시 다소간 과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라모스 소대가 육박전을 방불케하는 전공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라모스 전 대통령 뿐이 아니다. 필리핀 민주화의 영웅인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1932~83)도 한국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필리핀의 500페소짜리 지폐를 보면 알 수 있다. 지폐뒷면에는 18살에 불과한 아키노가 <마닐라타임스>의 종군기자로 활약한 모습이 담겨있다.
군복을 입고 펜과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젊은 아키노가 송고한 기사가 보인다. ‘필리핀 기갑부대가 38선을 넘어 진격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선명하다. 기사내용에는 ‘Korea’, ‘Seoul’, ‘Kaesong’ 등의 낯익은 단어가 보인다. 베니그노는 1951년 귀국한 뒤 한국전쟁을 소재로 ‘Korea’라는 영화시나리오를 써 필리핀 영화아카데미의 최고영화상을 받기도 했다.
또 유엔총회 의장이던 카를로스 로물로 전 외무장관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마자 유엔군의 참전을 주도했다. 일요일이었음에도…. 또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전대통령의 아버지인 마카파갈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필리핀 상원외교위원장으로서 필리핀군의 파병을 이끌었다.
■끈질긴 인연
필리핀은 미국과 영국에 이어 3번째로 지상군을 파견한 나라가 됐다. 그러나 사실 선뜻 한국전쟁에 파병할 입장이 아니었다. 1946년 독립했으나 공산게릴라인‘후크단(Huks)’의 반란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필리핀은 스페인의 봉건지주와 미국의 총독통치를 받는 동안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5%에 달하는 지주가 5%의 중농을 제외한 나머지 90%의 소작인을 지배했다.
그런데 1942년 일어난 ‘소작제 폐지운동(hukbalahap)’이‘후크단(huks)’으로 조직됐다. 후크단은 독립(1946년)이후 공산주의로 변모했고, 극렬한 반정부 테러를 자행했다. 독립 이후 막사이사이 국방장관이 시작한 후크단 토벌작전은 8년간이나 지속됐다. 그러나 필리핀은 한국전 참전결정이 내려지자 후크단 토벌작전에 투입된 10개대대 가운데 정예부대인 1개대대를 차출했다. 1950년 9월2일 제10대대 전투단 장병들이 파병행사 참석을 위해 리잘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모였다. 국교인 가톨릭을 대표한 레예스 대주교의 축사와 로물로 유엔총회 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6만 시민의 열렬한 격려와 함께 필리핀은 사상 처음으로 해외파병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필리핀과 한국과의 끈질긴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컨대 500페소 지폐의 주인공인 베니그노 아키노를 보자. 그는 마르코스 독재 반대운동을 벌이다 1983년 암살되고 만다. 하지만 그와의 인연은 500폐소 지폐와 함께 60년 넘게 연결된다.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에 이어 셋째아들인 아키노 3세는 2010년 필리핀 15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그런데 ‘노이노이(Noynoy)’란 애칭으로 유명한 아키노 3세는 최근 한국계 여성과 연인관계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에티오피아 사전엔 포로란 없다!’
그렇게 보면 필리핀 뿐이 아니다. 에디오피아는 또 어떤가.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즉각 국제연맹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무위로 끝났다. 그런 아픈 기억을 간직한 에티오피아였기에 한국전 발발 직후 참전을 결정했다. 사실 군대는 보잘 것 없었다. 이탈리아에게 무장해제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하일레 살레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1200명을 선발했다. 충성심 덕분이었을까. 하도 많은 병사들이 앞다퉈 지원하는 바람에 오히려 선발난을 겪었다. 각 부대에서 골고루 선발하는 고육책을 썼다. 황제는 파병부대에‘가그뉴(Kagnew)’라는 이름을 붙였다. 에티오피아어로 ‘관통하기 어려운 물체’ 혹은‘상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거나 그를 괴멸시키는 것’을 뜻한다. 셀라시에 황제의 아버지인 무스 메넬렉 1세의 애마이름이 바로 ‘가그뉴’였다. 메넬렉 황제가 이 말을 타고 1886년 이탈리아 침략군의 진지를 분쇄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에디오피아군은 화천 봉당덕리 전투와 적근산·펀치볼 전투와 철원·금화지구 전투 등에서 맹활약했다.
에디오피아 군은 참전기간 동안 121명의 전사자와 536명의 부상자를 기록했다. 참전국 가운데 유일하게 포로는 단 한 명도 집계되지 않았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포로가 되는 것을 가장 불명예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설령 실종되어 복귀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상황에 봉착하면 아예 목숨을 끊는 것을 명예로 삼았다. 따라서 부대가 포위당했을 때는 전멸할 때까지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한 에디오피아 파병군은 집과 땅을 하사받는 등 영웅대접을 받았다. 1968년 춘천 호반에 에디오피아 참전기념비를 건립됐으며, 그 제막식에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도 참석했다. 하지만 1974년 쿠데타로 셀라시에 황제가 피살된 이후 참전용사들의 입지도 급전직하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배신자로 낙인찍혔다고 한다. 지금도 참전병사들은 아디스아바바에서 20분 거리인 ‘코리아 빌리지’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
■기억하기 싫은 전쟁의 추억
또 다른 참전국인 태국군도 ‘리틀 타이거’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2년 11월1일부터 벌어진 역곡천(연천) 북쪽의 포크찹 고지전에서 세운 혁혁한 공 덕분이었다. 해발 234m에 불과한 포크찹 고지는 인근 불모고지와 티본고지 등과 한 묶음의 고지여서 전략적 가치가 컸다. 태국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태국군은 세번에 걸친 중공군의 공격을 백병전과 역습으로 물리쳤다.
영국은 호주·캐나다·뉴질랜드·벨기에·룩셈부르크 등과 함께 영연방 제1사단을 구성했다. 연인원 1만7000명이 참전해서 4500명에 이르는 인명피해를 당했다.
특히 1951년 4월 예하 글로스터 대대가 임진강 캐슬고지에서 궤멸당하는 패전을 기록했다. 하지만 3일간이나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한 덕분에 서울재점령을 막을 수 있었다. 프랑스의 경우 2차대전 당시 프랑스군 장군이었던 몽클라르의 일화가 재미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외인부대 출신의 중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강등을 자처, 임시 중령으로 현역에 복귀해 대대장이 됐다. 터키군은 언어소통 문제로 피아(한국군과 북한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악조건에서도 전투에 임했다.
제대로 된 실탄훈련도 받지 못한채…. 남미의 콜롬비아도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도 대대급 규모의 파병군을 보냈다. 이천 부근 381고지 방어전투 등에서 활약한 그리스군과 공군부대를 파견한 남아프리카 군도 한국전쟁에 직접 참전한 유엔 16개국에 속해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미군의 피해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미국은 연인원 180만명을 파견했다. 이는 1812년의 미·영 전쟁(28만명)과 1898년 미·스페인전쟁(30만6000여명)을 훨씬 넘어서는 규모이다.
3년 간의 전쟁기간 동안 미군의 인명피해는 14만명(전사 3만4000여명 포함)에 이르렀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육군 소령을 비롯해 미군 장성 아들 142명이 참전했다. 그 가운데 35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그 중 제8군 사령관인 제임스 밴플리트 육군중장의 아들은 지미 공군중위는 야간폭격임무를 수행하다가 실종됐다.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빌 대위는 미 제9연대 G연대장으로 참전해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귀국했다.
■200만명이 희생된…
비록 총부리를 겨눈 적군이지만 중국의 젊은이들도 빼놓을 수 없다. 신생국 중국은 연인원 300만명을‘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의 기치를 들며 한반도에 보냈다.
미국을 무찌르는 전쟁을 도와야 집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은 ‘순망치한(脣亡齒寒) 호파당위(戶破堂危)’의 고사를 인용했다. 즉 ‘입술(북한)이 없어지면 이(중국)이 시리고 현관문(북한)이 깨지면 집 안채(중국)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중국군은 전쟁기간 동안 97만명이 넘는 인명피해(전사 14만8000여명 포함)를 냈다.
특히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은 유엔군의 소이탄 공격에 희생됐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소식을 듣고 “자기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지만 희생없는 전쟁은 없다”며 아들의 시신을 하반도에 묻으라고 지시했다.
물론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전쟁당사자인 남북한이었다. 한국군 32만명, 북한군 60~80만명의 인명피해가 났으니까. 모든 통계를 합하면 한국전쟁에서 사상자와 포로 및 실종자를 합하면 피아간 모두 200만명의 청년들이 희생됐다. 이렇듯 한국전쟁은 직접 참전국 20개국(소련 포함) 젊은이들의 추억을, 넋을 전장에 뿌려놓았다.
그렇다. 피델 라모스에게는 평생의 무용담으로 남은 그곳은…. 라모스의 총탄에 희생된 중국의 젊은이는 채 피어나지 못한 꽃한송이처럼 스러진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보잘 것 없는 저 땅을 차지하려 수많은 젊은 넋이 죽어간 그곳…. 하지만 지금은 철책너머, 비무장지대에 무심한 모습으로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문화체육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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