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3년, 신라 흥덕왕이 벌컥 역정을 냈다.
“풍속이 점점 경박해지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즐긴다. 외제물품의 진기함을 숭상하고 국산은 수준이 낮다고 혐오한다. 이로써 신분에 따른 예의가 거의 무시됐고, 풍속이 쇠퇴하여 없어지는 데까지 이르렀다.(俗漸요薄 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왕은 해외명품만을 좇고 국산을 무시하는 등 사치향락이 빠진 세태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왕은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옛 법에 따라 다시 교시를 내린다. 만약 고의로 죄를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固有常刑)”(<삼국사기> ‘잡지·신라 색복조’)
이때 흥덕왕이 신분에 따라 정해놓은 규제는 저인망 그물처럼 촘촘하기만 하다. 지금의 패션에 해당하는 <색복> 규정을 보자.
“~진골 여자의 겉옷은 계수금라(계繡錦羅)를 금한다. 속옷·반비(半臂)·바지·버선·신발은 모두 계수라를 금했다. 목도리(표)는 계수에 금은실(金銀絲)·공작꼬리(孔雀尾)·비취모(翡翠毛)을 쓴 것을 금하였다. 빗(梳)은 슬슬전(瑟瑟鈿)과 대모(玳瑁)를 금했다. 비녀(釵)는 무늬 새긴 것과 구슬 꿴 것을 금하고, 관(冠)은 슬슬전을 금했다.”
■명품 숄에서 에메랄드 빗까지….
‘계’는 양털에 무명·명주실 등을 섞어 짠 라사(Raxa)계통의 모직물이다. 또 ‘금라’는 정교하고 질좋은 비단을 뜻한다. 지나치게 화려한 서역계의 모직물과 비단을 입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 언급된 목도리는 어깨에 걸치는 천이다. 요즘으로 치면 ‘숄(shawl)’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진골 이상의 여인들은 진귀하고 값비싼 ‘명품 숄’을 다투어 걸쳤던 게 분명하다,
신라 때는 “개(犬)도, 원숭이도 황금목걸이를 찼다”니까 금은실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비취모’은 진랍국(眞臘國·지금의 캄보디아) 등에서나 겨우 잡히는 비취조, 즉 물총새(Kingfisher’ Feathers)의 털이었다. 13세기 지리서인 <제번지(諸蕃志)> ‘비취조’를 보자.
“지극히 사치스러운 자들은 진귀한 비취털로 색을 맞추어 무늬를 넣고 두툼하게 짠 부드러운 요로 만들어 사용했다. 해마다 조정에서 엄격히 사용을 금했지만 귀족들은 몰래 사용했다. 상인들은 옷소매나 사타구니 속에 넣어 밀수했다.”
‘공작꼬리’의 경우도 인도와 아프리카, 동남아 일대에서 서생하는 진조(珍鳥) 공작새의 꼬리를 뜻한다. 역시 고가의 수입품이자 명품이었을 것이다.
‘슬슬전’도 마찬가지였다. ‘슬슬’은 이란어계인 ‘세세(Se-se)’이며 에메랄드를 일컫는다. <신당서> ‘고선지전’을 보면 고선지 장군이 석국(石國·타슈겐트)에서 슬슬 10여석을 획득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당서> ‘우전(호탄)전’을 보아도 “당나라 덕종(780~804)이 호탄에 사자를 보내 슬슬 백척을 얻었다”고 했다. ‘전(鈿)’은 꽃 모양의 금이나 광채나는 자개 조각을 박아서 장식하는 것이다. 결국 슬슬전은 수많은 에메랄드를 상감해서 장식한 명품빗이나 명품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골여인들만 이런 해외명품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6두품 여자들은 금은실·공작꼬리·비취털로 허리띠를 하지마라. 슬슬전으로 만든 빗도 안된다, 비녀는 순금에 은을 아로새긴 것과 구슬로 꿴 것도 안된다.”
흥덕왕은 6두품 여인들에게까지 만연한 호화사치품의 사용을 엄금한 것이다. 신라귀족여인들이 얼마나 이 명품에 열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모’ 역시 명품 가운데 명품이었다. 대모는 거북등껍질이다. <제번지>에 따르면 보르네오(渤泥)와 필리핀 군도, 자바(도婆) 등에서 포획한 사치품이었다.
■수레에 튜닝까지
신라인들은 지금으로 치면 자가용에 속하는 <거기(車騎)>의 치장에도 열을 올렸다. 흥덕왕이 공포한 규제 조항을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진골은 수레의 재목(車材)은 자단(紫檀)과 침향(침香)을 쓰지 못한다. 대모(玳瑁)를 붙일 수 없으며, 감히 금·은·옥으로 장식하지 못했다.”
당시의 수레는 사람의 상체가 드러나는 무개차와, 양쪽 벽면을 나무판으로 막고 앞 뒤에 휘장을 치고 천으로 지붕을 덮는 밀페형의 유개차가 있었다. 흥덕왕이 규제한 수레는 아마도 후자인 유개차였던 것 같다. 당시 진골들은 경쟁적으로 외국산 자재로 수레를 꾸민 것이다.
진골들 뿐이 아니었다. 다시 흥덕왕의 교시를 보자.
“6두품 여자는 물론 5두품에서 4두품, 아니 백성여자들까지 자단과 침향을 말안장틀로 사용하지 못한다. 금·은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
자단은 유향목재이다. 인도와 스리랑카 원산의 상록활엽교목이다. 재목이 향기롭고 견고하며 속은 암홍자색을 띠어 아름다워 건축 및 가구 등에 쓰인다.
침향은 점성국(占城國·베트남)과 수마트라가 주산지였다. 나무를 베어 몇 년 후 껍질을 썩여 없앤다. 그러면 견고하고 검은 심재가 남아 물에 가라앉는데 이를 목재로 쓴다. 이것이 참향이다. 그런데 흥덕왕의 규제내용을 보면 신라인들의 가없는 마차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귀족들은 물론 일반백성, 아니 백성여자들까지…. 흡사 고급승용차를 타고, 차의 치장에 열을 올리는 요즘 사람들의 심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여자들까지 다투어 말안장만큼은 금은옥을 장식하고, 고급외제목재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보다못한 왕이 나서서 ‘외제명품에만 혈안이 돼있다’고 호통을 치면서 규제법을 만든 것이다.
■황금으로 도배한 호화주택에 페르시아 걸상까지
지금으로 치면 주택인 <옥사(屋舍)>와 생활용품인 <기용(器用)>도 사치향락의 상징이었다.
“진골의 집은 길이·너비가 24자를 넘지 못한다. 당와(唐瓦)를 덮지 않고 금·은·유석·오채로 장식하지 않는다. 진골은 물론 6두품까지 침상을 대모·침향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침상까지 외제인 대모와 침향으로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살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진골과 6두품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 ‘집을 금은으로 장식하지 마라’고 규정한 것이다. 하기야 12세기 아랍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신라에서는 개(犬)의 목걸이도 황금이었다”고 할만큼 신라는 황금의 나라였으나까.
생활용품(기용)도 외제품으로 가득했다.
“6두품에서 일반백성들까지 금·은 도금한 그릇과, 호랑이 가죽과 구수와 탑등을 쓰지마라.”
금은 그릇과 호랑이 가죽은 물론 구수와 탑등까지…. 구수와 탑등은 양모를 둘다 주성분으로 잡모를 섞어짠 페르시아(波斯)산 직물이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평상·榻)에 까는 모직물이다. 구수 보다는 탑등이 좀더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일반백성들이 페르시아의 직물(구수와 탑등)을 깐 걸상까지 수입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1966년 불국사 다보탑에서 발견된 유향(乳香)도 아랍산이다. 아라비아 반도 남단의 하드라마우트(Hahdramaut) 연해에서 생산되는 향료이다. <제번지>는 “유황은 수마트라 파램방(Palembang)에 집화되어 중국으로 수출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을 신라가 수입한 것이다.
■사치향략의 신라
신라가 언제부터 이토록 외제명품을 사랑한 사치와 향락의 나라가 되었을까.
4세기 후반부터 6세기초까지 신라의 독특한 묘제는 적석목곽분이었다. 목곽을 조성한 뒤 그 위에 돌을 쌓는 묘제였다. 그랬으니 쌓인 돌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 훗날 많은 부장품들이 온전하게 나왔다. 그 가운데는 서역의 문물이 많이 보였다. 예컨대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에서는 유리용기, 즉 로만그라스와 봉수병이 다수 출토됐다. 경주 계림로 14호 무덤에서 나온 장식보검도 중앙아시아산이다.
법흥왕-진흥왕을 거치면서 신라는 제도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장한다. 한강유역을 접수하고(553년) 대가야를 멸하면서(561년) 해상교역로를 확보한다. 급기야 삼국통일을 이뤄 고구려-백제의 문화까지 흡수한다. 또한 당나라의 개방정책은 신라의 국제감각을 드높였다. 외교사절과 상인, 유학생, 망명객 등이 당나라로 밀려 들어갔다. 서역의 문물도 서역인과 함께 경주로 들어왔다. 경주의 귀족들은 앞다퉈 해외명품을 사들였다. 차츰 일반백성들에게까지 사치향락의 풍조가 번졌다. 경주는 완전한 국제도시가 되었다. 경주 괘릉(원성왕릉?)의 외호석물인 무인상과 흥덕왕릉의 외호석상은 서역인이 분명하다. 메부리코에 턱수염을 한 소그드인이….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나온 도용 가운데도 서역인이 있다. 경주시 서악동 고분에서 나온 신장상도 마찬가지이다.
■절정기의 경주는?
어떻든 경주는 최절정기에 이른다. 당대 경주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증거들이 도처에 있다.
880년 9월9일, 왕(헌강왕)이 월상루(月上樓)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인가.(覆屋以瓦 不以茅 炊飯以炭 不以薪 有是耶)”
민공이 답했다.
“모두 성덕의 소치이십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하하! 모두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삼국사기> ‘신라본기·헌강왕조’)
<삼국유사> ‘우사절유택조’와 ‘처용랑과 망해사조’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헌강왕 때에는 성 안에 초가집은 하나도 없고, 집의 처마와 담이 이웃집과 서로 연해 있었다. 또 노랫소리와 피리 부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차서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왕은 ‘요순시대’를 자화자찬하고, 신하들이 ‘지당하십니다’를 연발하고 있다.
■사치의 그늘에서 싹튼 망조의 기운
그런데 말이다.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이 있다. 신라의 ‘전성기’라는 대목이다.
880년 월상루에 올라 치세를 자랑한 헌강왕은 6년 뒤 죽는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2년 후에 등극한 진성여왕(997~897) 때 온 지방에서 난리가 난다.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킨다. 신라는 그때부터 후삼국시대로 접어든다. 헌강왕이 치세를 자랑한지 불과 9년만의 일이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라가 단 9년만에 급전직하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니 사실 급전직하가 아니었다. 이미 보이기 시작한 망조를 몰랐을 뿐이다. 신라는 이미 망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100여년 전인 혜공왕(재위 765~780)부터 진골귀족 사이에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등장했다. 재위기간도 평균 7~8년에 불과했다.
그 사이 귀족들은 저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예컨대 <삼국유사> ‘진한조’를 보자.
“신라의 전성기에는 경중(京中)에 17만8936호, 1360방, 55리, 35개(실제는 39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문자 그대로 경주에는 ‘금으로 도배한 집’ 혹은 ‘금이 들어가는 집’이 39곳이나 됐다는 이야기이다.
39곳에는 김유신의 종갓집도 포함돼 있다. 오죽했으면 흥덕왕이 “진골·6두품은 물론 일반백성들의 집까지 금은으로 장식하지 마라”는 법령을 공표했을까. 금테두른 집이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아니면 명문귀족들의 집에 금이 수없이 들어갔다는 것, 즉 금 뇌물이 엄청났음을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통제불능이었던 1000년 사직
<화랑세기> ‘17세 염장공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이 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이라 했다. 금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마치 홍수와 같았다.(人指公家爲水望宅 謂基金入望如洪水也)”
‘수망택’은 바로 <삼국유사> ‘진한조’에 나오는 39개 금입택 가운데 하나이다. <신당서> ‘동이열전·신라조’를 보자.
“(신라의) 재상가는 녹이 끊이지 않는다. 노동(奴童)이 3000명이다. 갑병(甲兵)과 소·말·돼지의 숫자도 그 수와 비슷하다. 바다 가운데의 산에서 목축을 하고 사냥해서 잡아먹는다.”
세상에 재상가의 집에는 노복이 3000명이나 되었단다. 일부 귀족들에게 부의 편중이 극심했다는 이야기이다. 또 증거가 있다. 경북 문경의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의 명문이다. 탑은 924년 건립됐고,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다. 비문에는 17살에 구족계를 받은 지증대사(824~882)가 자신의 토지 500결을 사찰에 희사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런데 일본 쇼소인(정창원)이 소장중인 ‘신라촌락문서’를 보면 1개 촌락인구 462명이 경작하던 땅이 564결이라고 돼있다.
이 내용과 견주면 지증대사가 내놓은 땅 500결은 400명 이상이 경작할 정도의 대단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지증대사 집안의 재력이 얼마나 엄청났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랬다. 헌강왕이 흐뭇하게 바라본 경주의 화려한 외형은 이미 망조의 기운으로 치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는 사치향락의 풍조에 푹 젖어들었다. 스스로를 통제할 힘이 없었다. 1000년의 나이…. 그러고보면 무얼 깨닫고 새출발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였던 것이다.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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