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초겨울이었지. 이곳(안양)에서도 ‘다자이(大寨)에서 배우자’는 운동에 따라 농지정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어요.”
지난 2008년 11월, 필자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安陽)에서 열린 ‘갑골문 100주년’ 학술대회에 참가하던 중 인쉬(殷墟)박물관을 찾았다. 함께 간 이형구 교수(전 선문대)가 감회어린 표정으로 전시유물을 보고 있던 할머니 한 분을 소개해주었다. 150㎝나 될까말까한 평범한 촌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1949년 신중국 탄생 이후 첫 여성 고고학자로 이름을 알린 정전샹(鄭振香·당시 79살)이었다.
특히 이곳 인쉬에서 상나라의 여장군 부호(婦好)의 무덤을 조사한 고고학계의 여장부였다. 동이족의 일파가 세운 상(기원전 1600~1046년)은 한족의 나라인 하(夏·기원전 2070~1600년)를 멸하고 중국 중원을 차지했다. 부호는 중국 역사시대에서 밝혀진 최초의 실존 여인이자, 동이족이 낳은 최초의 여장군이었던 것이다.
‘부호묘’ 발굴은 중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굴조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필자는 이내 정전샹이 들려주는 부호묘의 발굴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정전샹이 말하는 ‘다자이에서 배우자’는 운동이 무엇인가.
■여성 고고학자가 발굴한 것은?
‘다자이’는 산시성(山西省) 시양현(昔陽縣)에 있는 83가구의 작은 고을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 이곳에서 벌어진 농지정리가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으로부터 모범사례로 꼽혔다. 마오 주석은 1964년 말, ‘농업은 다자이에서 배우라(農業 學大寨)’는 지시를 전국에 하달했다. 이 운동은 1978년까지 무려 15년 가까이 계속됐다.
안양의 농민들도 대대적인 농지개간을 벌이고 있었다. 문제는 안양이 상나라(상나라 말기를 은나라라고도 한다) 마지막 도읍이었다는 것. 특히 멸망한 은나라의 폐허라는 뜻인 인쉬(은허·殷墟)의 궁전종묘 유적에서 불과 120m 떨어진 곳에서도 농민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고고학자들이 긴급출동했다.
“일단 공사를 중단시키고 시굴갱을 넣었어요. 그랬더니 은(상) 말기의 문화층이 걸리는 거야. 큰 일이다 싶어 당장 보호조치를 취하고 대대적인 발굴에 들어갔지요.”
이듬해인 1976년 봄, 중국사회과학원은 정전샹을 대장으로 한 발굴단을 투입했다. 5월16일, 정전샹 발굴단의 삽 하나가 선홍색의 칠피(漆皮), 즉 목관을 건드렸다. 환호성이 터졌다.
“와! 무덤이다. 터졌다.”
■‘婦好’라는 상형문자
대박이었다. 끊임없이 걷어올린 유물은 모두 1928점이었다. 청동기 468점, 옥기 755점, 골기 564점…. 또한 16개체의 순장인골과 8마리 분의 개(犬) 유골들…. 그러나 정작 정전샹의 숨이 멎은 까닭이 따로 있었다.
“발굴한 청동기 가운데 190건에서 명문이 보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 반이 넘는 109건의 명문에서 ‘부호(婦好)’라는 상형문자가 보였습니다.”
고고학계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부호’라면 그 때까지 확인된 숱한 갑골복사에서 보였던 상나라의 중흥군주 무정(재위 기원전 1250~1192년)의 법정배우자인 바로 그 ‘부호’가 아닌가.
갑골복사란 상 시대 왕이나 무(巫)가 거북등을 비롯한 짐승뼈를 이용, 나라와 개인의 대소사를 점친 뒤 그 점복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 갑골기록을 종합하면 ‘은국대치(殷國大治)’를 이룬 무정왕의 여인은 64명에 이른다. 그런 무정왕에게는 비무(비戊)·비신(비辛)·비계(비癸) 등 3명의 법정배우자가 있었다. 이 가운데 ‘비신’은 부호가 죽은 뒤 받은 시호이다.
부호묘 출토 청동기 중에는 ‘사모신(司母辛)’이라는 명문 청동기가 5건이나 나왔다. ‘사모신’이 바로 ‘비신’ 혹은 ‘부호’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976년 홀연히 발굴된 이 무덤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부호’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성발굴대장’의 삽 끝에서 3300년 전의 ‘여걸’이 현현했으니 이것도 운명이 아니었을까.
■상나라 중흥군주 무정왕의 왕비
학자들은 ‘婦好(부호)’라는 이름을 흥미롭게 해석한다.
‘婦’의 갑골문 글자형태는 빗자루를 상형한 것이다. 부녀자들이 빗자루를 들고 집안을 청소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녀(女)자’를 붙어 ‘부(婦)’자가 됐다. 그러니까 ‘부호’의 ‘婦’는 부녀자를 뜻한다. 그렇다면 ‘호(好)’자는 무엇인가. 해당 부녀자(婦)의 ‘성(姓)’을 뜻한다. 은(상)나라 왕족의 성(姓)씨는 ‘자(子)’였다. 여기에 여성에게 ‘여(女)’자를 붙인다는 당대의 관습에 따라 ‘好’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자(子)씨인 무정왕은 역시 자씨 여자인 ‘부호’와 동성끼리 혼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의 왕족인 부호의 집안은 무정왕이 봉한 방국인 자방(子方)의 수장이었을 것이다. ‘사모신(司母辛)’이라는 청동명문에서 보듯 집안의 직책은 ‘사(司)’ 즉 ‘제사’를 담당했을 것이다. 갑골복사에 나오는 부호도 나라의 중요한 제사를 여러 차례 집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는 포로로 잡아온 노예의 목을 베어 지내는 제사와 짐승을 불에 태워 지내는 제사도 주재했다. 부호는 무정에게 점복에 쓸 거북판 50개를 진상했고, 5개의 귀갑을 정리하기도 했다. 동이족은 하늘신과 조상신을 위한 제사를 끔찍하게 여겼으므로 제사를 집전하는 일은 국왕에 버금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부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만3000명 대병력 이끈 여장군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부호의 가장 큰 업적은 군사활동이었다.
사실 무정왕 초기에는 국가기반이 확고하지 않아 외침이 잦았다. 심지어 북방의 오랑캐인 토방이 도읍(안양) 근처까지 쳐들어와 수도권 읍락 2곳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정은 귀방(鬼方)과 토방(土方), 강방(羌方), 파방(巴方) 등 주변국들과의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부호는 지알·사반 등 남성 대장군들을 이끌고 전선에 나서 맹활약한다.
“이번에 왕이 부호에게 명을 내려 토방을 정벌하려고 하는데 신의 보호가 있을까요?(今或王登人 乎婦好伐土方 受有又)”
이 갑골문은 무정왕이 토방(북쪽의 오랑캐) 정벌에 부호를 지휘관으로 파견하면서 점을 친 내용을 거북판에 남긴 것이다. 과연 갑옷을 입고 청동꺾창을 들고 출전한 부호는 단 한 번의 정벌 만으로 토방을 격퇴시켰다. 그녀는 만족하지 않고 토방을 맹렬하게 추격, 결국 전멸시켰다. 그후 토방은 상을 넘보지 못했다.
또 하나의 강적은 파방(巴方·서남쪽 오랑캐)이었다.
“부호가 지알(상나라 장군 이름)과 연합해서 파방을 치게 하고, 대왕은 친히 동쪽으로 파방을 진격하면 적군은 부호의 매복지를 쳐들어올까요?(婦好其比沚알 伐巴方 王自東探伐戎 陷于婦好立)”
이 갑골의 내용이 무엇인가. 상이 파방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양동작전을 펼 것인데 성공할 것인지를 묻는 내용이다. 즉 부호가 지알 장군과 연합하여 매복하면, 무정왕은 정예병을 이끌고 파방의 정면을 공격한다는 치밀한 작전을 펼친 것이다.
무정시대 정벌전쟁의 백미는 역시 서방의 강자인 강방(羌方)과의 싸움이었다. 강방은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했다. 또한 강족의 용맹성은 자타가 공인했다. 강족은 끊임없이 은(상)을 괴롭혔다. 이 때 강방 정벌의 주역 역시 부호였다.
“부호에게 군사 3000명을 징집하게 하고, 또 1만명을 징집하여 강방을 정벌하라고 할까요?(登婦好三千 登旅萬 呼伐羌)”
부호가 상나라 시기 전쟁 사상 최다병력인 1만3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강방을 정벌했음을 알려주는 갑골문이다. 구체적인 출병규모까지 나온 보기드문 기록이다.
■아들에 집착한 남편
부호는 이렇듯 전장을 호령한 여전사였지만, 남편(무정)의 사랑을 독차지한 영락없는 여인네였다.
특히나 부호의 임신과 출산은 무정왕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갑골문을 보면 남편 무정왕은 부호의 임신과 출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부호에게 출산능력이 있을까요.(婦好有受生)” “부호에게 아이가 있다는 소식이 있을까요? 3월에?(婦好有子 三月)” “부호가 아이를 갖겠습니까? 4월에?(婦好 有子 四月)”
남편은 부호의 임신여부를 월 단위로 묻고 있다. 어지간히 안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임신하고 출산에 임박하면 또 불안에 떨었다. 아들을 원했기 때문이다.
“부호(왕비)가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아들일까요?(婦好娩 嘉)” “신(申)일에 낳으면 길(吉)하니 아들일 것이다.(申娩吉 嘉)” “(하지만) 갑인일에 아이를 낳았다.(甲寅娩) 길하지 않았다. 딸이었다.(不吉 女)”
갑골문을 보면 무정왕은 아들을 어지간히 바랐지만, 결국 출산날짜를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딸을 낳았다. 그래서 매우 실망했음을 알 수 있다. 갑골의 내용을 보면 아들을 낳으면 ‘길(吉)’하고, ‘기쁘다’는 뜻의 ‘가(嘉)’로 표현했다. 반면 딸은 ‘불길(不吉)’하고 ‘기쁘지 않다(不嘉)’라 했다. 은(상)말기엔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만 왕비로서의 자격을 얻었다. 정벌작전을 지휘했던 여걸이었지만 엄습해오는 남아선호사상의 그림자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벌써 3200년 전에 출산 날짜를 계산했다는 것이니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호는 또 자신이 낳은 갓난아기가 죽는 아픔도 맛봤다.
“각(殼·점을 친 관리이름)이 점을 치며 물었다. ‘부호가 출산하는데 불길하겠습니까.’ 왕이 점궤를 보고 길흉을 판단해서 말했다. ‘길할 것 같기도, 불길할 것 같기도 하다.’ 결과는 불길했는데, 과연 아이가 죽었다.(殼貞 婦好娩 不其嘉 王占曰 不嘉 其嘉 不吉 于□若 玆주死)”
부호의 출산을 앞두고 점궤가 불길했는데, 결국 그 점궤대로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슈퍼우먼’의 비애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철의 여인’이었지만, 잦은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염 여인네 역할까지 해야 했던 부호…. 그랬으니 몸이 고장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갑골문에는 남편인 무정왕이 부인인 부호의 잦은 병치레를 걱정하는 대목이 자주 보인다.
“부호가 감기(혹은 신경통)에 걸릴까요?(好骨凡有疾)” “부호의 질병에 재앙이 있을까요?(婦好又疾추有)”
이밖에 부호는 복통과 잇병, 귀병 등과 함께 악몽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남편은 부호의 쾌차를 기원하는 갖가지 제사를 드린다. 하지만 부호의 병세는 점점 위독해진다. 남편은 불안에 떨면서 잇달아 점을 친다.
“부호가 죽을까요?(好其死)” “부호가 병으로 죽지않겠지요?(好病不死)
그러나 남편의 지극 정성에도 불구하고 부호는 숨을 거둔 것 같다. 남편인 무정왕은 ‘돈(敦)이라는 시냥터에서 부호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 곳에서 곡제(哭祭)를 지냈다.
부인이 죽은 뒤 남편은 악몽을 꾸었다.
“왕이 불길한 꿈을 꾸었는데 부호의 혼령에 해를 끼치지는 않겠습니까?(王夢婦好不추)”
그러자 남편은 죽은 부인의 혼령을 달래려 갖가지 제사를 지낸다. 이 가운데는 잡아온 여자노예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도 있었다.
■부호묘에 바쳐진 순장자들
정전샹이 발굴한 부호묘에는 그렇게 제물로 희생된 노예 인골 16구와 개(犬) 8마리가 순장돼 있다. 16명 가운데는 성별과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인골이 8명분 있었는데, 남성 4명과 여성 2명, 그리고 아동 2명 등이었다. 그 중 청년 남성의 머리는 잘려 있었고, 두개골도 파쇄돼 있었다. 1명은 허리가 잘려 있었고, 역시 두개골은 파열됐다. 아래턱도 잘려 있었다. 그외에 철모르는 어린아이의 시신들까지….
이들은 순장될 때 끝까지 저항하다가 끝내 몸이 잘리는 비참한 명운의 노예들이었던 것이다. 갑골문에는 인간 제물의 참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예기> ‘단궁상’은 “은(상)나라 사람들은 백색을 숭상했다(殷人尙白)”고 했다. 그런 탓일까. 백인이나 서방의 오랑캐로 피부가 하얀 강족이 ‘제수품목’의 단골메뉴였다.
“당·대갑·대정·조을에게 어제를 지내려는데 강인(羌人) 100명과 양 100마리를 올릴까요?(御自唐大甲大丁祖乙 百羌 百宰)”
당·대갑·대정·조을은 은(상)의 조상 이름이다.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는데 강족 노예 100명과 양 100마리를 바친다는 것이다.
“오늘 저녁 피부가 흰 강족 사람 3명을 제물로 올려 정(조상 이름)에게 제사 드릴까요?(唯今夕用三白羌于丁)”, “백인을 요제, 즉 불에 태우는 제사에 쓸까요?(燎白人)”
■파란만장한 여인
어쨌든 동이족 최초의 여장군이자, 역사상 최초의 실존여성이기도한 부호의 삶은 이처럼 파란만장했다. 부호는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남성우위사회로 접어든 상 말기를 풍미했다. 이후 부호가 지켜낸 ‘여권(女權)’은 상의 뒤를 이은 한족(漢族)의 나라인 주나라 때부터 급전직하했다. 여인의 지위가 신권-족권-부권의 밑인 최저층으로 추락한 것이다. 새삼 부호의 삶을 돌이켜보면 과연 동이족의 여인 답다. 결혼에, 임신에, 출산을 모두 감당하면서도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여기에 나라까지 구했다니 그야말로 ‘슈퍼우먼’이 아닌가. 여기에 나라까지 구했다니 그야말로 ‘슈퍼우먼’이 아니었던가. ‘가정의 신’이자 ‘직장의 신’을 강요받는 3200년 후 요즘의 여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무려 3300년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참고자료>
양동숙, <갑골문자로 본 상대 무정비 부호>, ‘아시아여성연구’ 31,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1992년
<갑골문 해독>, 서예문인화, 2005년
曹定雲, <殷墟婦好墓 銘文硏究>, 雲南人民出版社, 2007年
王宇信·徐義華, <商周甲骨文>, 文物出版社, 2000年
古力, <紅粉帝國的 幽夢-圖說 殷墟婦好墓>, 重慶出版社, 2006年
陳志達, <殷墟>, 文物出版社, 2000年
李付强 等, <世界遺産-殷墟>, 中國對外飜譯出版公司, 2008年
이기환·이형구,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성안당,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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