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평왕대(재위 579∼632년)의 일이다.
경주 율리에 절세미인이 살고 있었다. 설(薛)씨의 성을 가진 여인이었다. 비록 평민의 빈한하고 외로운 집 처자였지만 용모단정한 뜻과 행실로 유명했다. 뭇 남성들은 곱고 아리따운 여인을 흠모했지만 감히 말 한 번 걸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설씨 집에 큰 일이 생겼다. 나이 많은 설씨의 아버지가 병역의 대상으로 징발됐다. 아버지는 정곡(正谷·경북 의령)의 수자리(국경수비) 당번으로 차출된 것이다.
사량부 출신으로 가실(嘉實)이라는 청년이 그 설씨녀의 딱한 소식을 들었다. 그 역시 상사병이 걸릴 정도로 설씨녀를 짝사랑하던 소년이었다. 그는 잽싸게 설씨녀를 찾았다.
“제발 이 몸으로 아버지의 일을 대신케 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사랑을 위해 군대까지 간’ 가실
설씨녀는 뛸 듯이 기뻐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고했다. 그러자 설씨녀의 아버지가 가실 청년을 불렀다.
“이 늙은이의 일을 그대가 대신하여 주겠다니…. 고맙지만, 두려움을 금할 수 없소. 보답할 길을 생각해 보았소. 자. 우리 딸을 주어 그대의 수발을 받들도록 하겠소.”
가실 청년과 설씨녀는 거울을 둘로 쪼개 신표로 삼고 “후일 합치자”고 약속했다. 가실 청년은 자신이 키우던 말 한 필을 설씨녀에게 주면서 “잘 길러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나라에 변고가 생겨 3년 예정이었던 수자리 근무교대가 계속 연기됐다. 6년이 되도록 가실청년이 돌아오지 못하자 아버지는 딸을 위해 중대결심을 한다.
“3년 기약이었는데…. 가실청년이 돌아오지 못하는구나. 더는 기다릴 수 없으니 다른 집에 시집가야겠다.”
하지만 설씨녀는 “배신할 수 없다”며 눈물로 하소연했다.
“아버지를 위해 굳게 약속한 것인데…. 가실이 이것을 믿고 군대에 나갔는데~ 신의를 버리고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인정이리요? 아버지 명을 좇을 수 없사오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시오.”
그러나 이미 늙어 마음이 조급해진 아버지는 혼기를 지난 딸이 걱정되어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 동네사람과 몰래 혼인을 약속했다. 이윽고 혼인날이 되자 그 남자를 끌어들였다.
설씨는 도망가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채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두고 간 말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 마침 가실이 교대되어 왔다.
“설씨녀. 저 못알아보겠소?”
“….”
그 모습이 마치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가실이 깨진 거울 한 쪽을 던지니 설씨가 주워 들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와 집안 사람이 기뻐하여 어쩔 줄 몰랐다. 둘은 드디어 혼인해서 해로했다.(<삼국사기> ‘열전·설씨녀’)
볼수록 ‘지독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사랑하는 집안을 위해’ 대신 군대를 갈 수 있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절개의 끝’을 보여준 도미부인
백제 개로왕대(재위 455~475년)에 도미(都彌)라는 사람이 있었다.
부역의 대상이 되는 일개 평민이었지만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내의 미모와 절조를 둘러싼 소문 또한 백제 안에서도 자자했다. 개로왕이 그 말을 듣고 도미를 살짝 불렀다.
“대저 부인의 덕은 비록 지조를 지킴을 앞세운다. 그러나 그윽하고 어두우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드물지 않겠느냐.”
그러나 도미는 고개를 던호히 내저었다.
“사람의 정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 제 아내는 비록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빈정이 상한 개로왕은 ‘도미를 붙잡아둔채’ 도미 부인을 시험했다. 즉 신하 한 명에게 거짓으로 왕의 의복을 입고 말을 타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하였다. 그러면서 거짓으로 고했다.
“내(왕)가 네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도미와 내기를 걸어서 이겼다. 내일 너를 들여 궁인(宮人)으로 삼을 것이다. 지금부터 네 몸은 내 것이다.”
왕의 복장을 한 자가 도미 부인을 겁간하려 하자 부인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헛말을 하시진 않을 것입니다. 제가 따를 터이니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 입고 들어오겠습니다.”
도미 부인은 대신 계집 종을 치장시켜 바쳤다. 개로왕은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는 크게 노했다. 남편 도미에게 ‘국왕을 기망한 죄’를 적용, 두 눈알을 빼고 작은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 그리고 나서 그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음행을 하고자 했다. 그러자 부인은 ”잠깐 기다려달라”고 개로왕을 설득했다.
“제가 지금 낭군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왕을 모시는 일이라면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청컨대 다음 날 목욕을 하고 오겠습니다.”
개로왕이 깜빡 속아 허락해주었다. 도미 부인은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닿았다. 하지만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 그 때 한조각 배가 물결을 따라 다가왔다. 도미 부인은 이 배를 타고 천성도에 닿았다. 천만다행으로 남편은 아직 죽지 않았다. 두사람은 풀뿌리를 씹어먹으며 함경도 산산(원산) 아래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구려에서 옷과 음식을 구걸하며 평생 나그네로 일생을 마쳤다.
■첫사랑 택한 ‘아이돌 스타’ 강수
신라의 대문장가인 강수(?~692)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 중 한사람인 강수의 신분은 육두품이었다. 누구보다도 신분상승의 야망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강수는 10대 중반부터 대장장이 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둘은 서로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됐다. 20살이 되자 부모가 강수의 결혼을 서둘렀다. 이미 강수의 학문은 모든 사람이 다 알 정도였다.
태종무열왕 즉위년(654년)에 당나라 사신의 조서를 막힘없이 해석한 일로 유명해졌다. 이미 20살에 신라의 ‘천재’ 소리를 듣는 ‘아이돌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부모가 맞이하려 했던 배필은 강수의 연인인 대장장이 딸이 아니었다.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유지의 딸이었다. 하지만 강수는 “다른 여자와는 절대 안된다”고 나자빠졌다.
“너(강수)는 이미 이름난 사람이 됐다. 그런데도 그 미천한 대장장이 딸을 배필로 삼는 것은 수치스럽지 않느냐?”(부모)
이 때 강수가 두 번 절을 하고 말하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조강지처는 뜰 아래로 내려오지 않게 해야 한다(糟糠之妻 不下堂)’고 했습니다. ~천한 아내를 어찌 차마 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강수는 이렇게 출세보다는 첫사랑을 택했다. 신라의 아이돌스타는 이렇게 ‘최고의 로맨티스트’가 된 것이다.
부인도 강수 못지 않았다. 훗날 강수가 죽자 조정에서는 일체의 장례비용과 각종 옷가지, 그리고 물품을 대주었다. 하지만 부인은 이것을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불사에 바쳤다. 남편의 극락왕생을 빈 것이다. 강수의 부인은 점점 궁핍해져 먹고 살 것을 걱정할 처지가 됐다. 할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조 100섬을 주었다. 하지만 부인은 극구 사양했다.
“전 천한 사람입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고, 나라의 은혜가 많았습니다. 이제 제가 홀로 되었는데, 어찌 감히 후한 하사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라의 대표 ‘잉꼬 부부’ 문노
<화랑세기>을 보면 8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인 문노·윤궁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문노(536~606)의 어머니는 가야왕의 딸(왜국왕의 공녀라는 말도 있다)인 문화공주였다. ‘망한 나라 공주의 아들’ 혹은 ‘왜국 공녀의 아들’이었으니 신분은 높지 않았다. 반면 윤궁은 이미 동륜태자(진흥왕의 맏아들)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던 경력이 있다. 동륜태자가 죽은 뒤 과부가 됐다. 유명한 거칠부 장군(?~579)의 딸이었다. 신라조정을 좌지우지했던 미실궁주와는 종형제였다. 골품제도가 확실한 신라사회에서 문노는 윤궁 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노는 워낙 출중한 능력을 갖춘 남성이었다. 화랑정신의 표상’, ‘사기(士氣)의 종주(宗主)’로 추앙받았다. 훗날 김유신은 문노를 일컬어 ‘통일대업의 공이 문노공으로부터 나왔다’고 했을 정도였다. ‘골(품)’이 낮은 신분이었던 게 걸렸지만, 윤궁 측에서 욕심을 낼 만 했다. 윤궁은 “지위가 낮은 게 흠”이라는 미실 궁주의 걱정에 이렇게 답한다.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을 논하겠습니까.”
윤궁은 또 ‘맞선자리’에서 문노를 보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군(君·문노)을 그리워한 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腸已斷矣)”
문노는 급기야 ‘진지왕의 폐위(579)’에 참여한 공로로 풍월주가 됐다. 관위도 아찬(신라 시대의 17관등 중의 6번째)으로 승격됐다. 비로소 골품을 얻은 것이다. 사실혼 관계에 머물렀던 둘은 그때서야 진흥왕이 허락을 얻어 정식부부가 되었다. 윤궁은 5살 연하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받들었다. 문노가 종양을 앓았을 때는 고름을 직접 입으로 빨아서 낫게 했다.
문노도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다. 유화(遊花·풍월주에게 색을 제공하는 여인)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술도 먹지 않았다. 늘 집에 있었고, 마음은 화락했으며,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윤궁은 한술 더 떴다.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는데…. 낭군님은 술도, 색도 절제하니 오히려 제가 부끄럽습니다.”(윤궁)
“하하.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할 것 아닙니까? 또 술을 좋아하면 그대가 할 일이 많아질 것 아닙니까?”(문노)
“잠자리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제 일을 대신하게 됩니다. 제겐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침첩을 두시지요.”(윤공)
보통의 아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편에게 “둘째마누라를 두라”고 권하고 있으니 말이다.
원래 문노의 성격은 칼 같았다. 하지만 부인을 잘 둔 덕분에 화목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사람들은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皆以爲婦人之化男子若是)”고 했다. 신라 사람들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아비를 택할 때는 반드시 문노를, 부인을 얻을 때는 반드시 윤궁과 같아야 한다.”
■유리왕의 ‘빗나간 사랑’
물론 ‘빗나간 사랑’도 많았다.
“훨훨 나는 꾀꼬리/암수 서로 정답구나/외로운 이 내 몸은/누구랑 돌아갈까.(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삼국사기> ‘고구려본기·유리왕조’)
‘황조가’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사연을 상기해보자.
기원전 17년, 고구려 유리왕은 두 여인을 처로 삼았다. 한 사람은 고구려 여인인 화희였고, 다른 여인은 한나라 출신 치희였다. 임금의 사랑을 받으려는 두 여인의 투기는 지독했다. 언젠가 유리왕이 일주일간 사냥하러 궁을 비웠다. 그 틈에 사단이 일어났다. 두 여인이 심하게 다툰 것이다. 고구려 여인 화희가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
“한나라 출신의 천첩인 니가 그렇게 무례할 수 있느냐?”
모욕감을 느낀 치희는 그 길로 친정(한나라)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급보를 들은 유리왕이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유리왕이 나무 밑에서 쉬다가 꾀꼬리가 모여드는 모습을 보았다. 문득 치희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부른 노래가 ‘황조(黃鳥·꾀꼬리)가’이다. 이 황조가는 그래도 떠나간 님을 그린 애절한 사랑가로 간직됐다.
■‘긴 생머리’ 관나부인의 최후
관나부인의 최후를 보면 그래도 투기를 일삼았던 화희와 치희는 정말 운이 좋았다.
“남녀가 음탕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해서, 이미 죽은 (부인의) 시체를 남쪽 산 위에 버리고 썩게 놔둔다.”
끔찍한 이야기이다. 남의 역사가 아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나온 2000년 전 부여의 습속이다. 아니 부인이 샘 좀 부린다고 해서 죽이는 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버리고 방치한다니 말이다. 방치된 시신을 수습하려면 ‘여자의 친정에서 소나 말을 바쳐야 했다.’(<삼국지>) 여인네의 신세가 곱씹을수록 비참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중천왕(재위 248~270) 때인 251년의 일이다. 중천왕은 관나부인을 총애했다. 얼굴도 예쁘고, 긴 생머리가 아홉자나 되는 관능미 만점의 여인이었다. 임금은 그녀를 ‘소후(小后)’로 삼으려 했다. 왕후 연씨의 눈에서 가시가 돋았다. 두 여인도 유리왕의 두 여인처럼 치열한 사랑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중천왕이 사냥을 한 뒤 돌아오자, 관나부인이 가죽주머니를 들고 울고 있었다.
“왕후(연씨)가 저를 이 속에 담아 바다에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차라리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난리가 났다. 하지만 관나부인의 말이 거짓임이었다. 왕후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꿰차겠다는 모함이었던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중천왕은 관나부인에게 소리쳤다.
“그래? 네가 꼭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느냐?”
임금은 사람을 시켜 관나부인을 자루에 넣고 바닷속으로 던져버렸다. 물론 두 여인을 둘러싸고 어떤 정치적인 음모가 진행됐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때 그토록 아꼈던 여인을 그렇게 수장시켜 버릴 필요가 있었을까.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비정하기 이를 때 없는 작태다. 하기야 ‘부부’는 촌수가 없다고 했던가. 죽고 못사는 사랑이 되었다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넌 불구대천의 원수로 변하는…. 그렇다면 우리 부부는 어떠한가. 문화에디터 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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