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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한국인의 게놈과 ‘멜팅포트’

한국의 건국신화는 천손신화와 난생신화로 나눌 수 있다.

백성 3000명을 이끌고 태백산으로 내려온 고조선 단군의 아버지 환웅과, 오룡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북부여왕 해모수는 대표적인 천손신화의 주인공들이다.

반면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가락국의 김수로왕 등 6가야 임금은 모두 알(卵)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대목이 있다. 천손신화와 난생신화의 교묘한 융합이다.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천전리에 있는 고인돌. 남방계 문화를 대표하는 청동기 시대의 산물이다.

주몽은 천손신화의 주인공인 해모수와 정을 통한 어머니(유화부인)이 낳은 알에서 태어났다. 하늘의 빛이 자꾸만 유화부인에게 비치면서 주몽(알)을 임신했다.

또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의 옆에서 기다리던 천마는 사람들이 다가오자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싸인 황금그릇 안에서 알 6개가 확인됐다. 이들이 6가야의 시조가 됐다.

나무에 매달린 황금 궤짝에서 태어난 김알지도 천손(나무)과 난생신화(궤짝)의 융합을 의미한다.

천손신화의 주인공은 나무·산·하늘 등에서 땅으로, 난생신화의 주인공은 알·박·궤짝·배(舟)의 안에서 밖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몽·혁거세·김수로 등 한사람의 탄생과정에 두가지 신화가 섞인 이유는 무엇일까.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는 “정신적인 고향이 다른 두 종류의 종족의 사회결합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천손신화는 북방유목 문화, 난생신화는 남방농경 문화를 각각 뿌리로 두고 있다.

만주와 한반도는 바로 두 신화의 융합지점인 것이다. 남방의 고인돌, 북방의 금관 문화가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북방계 유물이 확실한 금관. 신라 적석목곽분인 서봉총에서 발굴했다.

울산과학기술원이 러시아 극동의 악마문 동굴에서 수습한 7700년 전 인골의 게놈을 분석한 결과도 다르지 않다.

한국인의 뿌리가 수천년간 북방계와 남방계 아시아인이 융합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인의 실제 유전적 구성은 남방계 아시아인에 가깝단다. 당연하다.

설령 천손신화로 무장한 유목 세력이 난생신화 지역을 지배했다해도 절대다수의 백성은 토착농경민이었을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유목민보다 농경민의 인구확장세가 두드러졌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예로부터 한반도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연을 안고 이주해왔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그 나라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옛날 진(秦) 나라의 괴로운 노역을 피해 도망오자 마한인들이 동쪽 국경 지역에 살 곳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진나라 이주민들의 언어는 마한과 다르다.”(<삼국지> ‘동이전·한전’)

여기서 진나라는 진시황이 세운 제국을 가리키지만 원래 그들의 뿌리는 유목민이었다. 어쨌든 부국강병으로 강해진 진나라는 농경민의 나라였던 초·연·조·한·위·제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진시황과 그 아들 진2세의 폭정 때문에 백성이 괴로워졌고, 반란이 일어났다. 진나라는 결국 기원전 206년에 멸망하는데, 이 무렵 유민들이 지금의 신라 땅으로 대거 이주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고조선 멸망 이후의 유민(기원전 108년), 낙랑 투항민(기원후 27년) 등이 남으로 남으로 향했다.
고구려에서 쫓겨온 온조·비류 세력이 마한 지역에서 백제를 세운 것도 마찬가지다. 이외에도 머나먼 인도 아유타국에서 허황후가, 왜의 동북 1000리밖 용성국에서 석탈해(알에서 태어난 탈해는 상서롭지 못한 아이‘라 해서 버림받았다)가 한반도로 속속 이주했다.

미국을 두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융합된 ‘멜팅포트(melting pot)’라 일컫는다. 그렇다면 8000년 전부터 북방계와 남방계가 융합해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운 한반도·만주는 동아시아의 멜팅포트라 할 수도 있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