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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1400년의 혈맹, 한국과 이란의 끈끈한 인연

 ‘불량국가(rogue state)’, ‘악의 축(axis of evil)’.
 모두 이란을 지목하는 표현입니다. 미국은 소련의 붕괴로 동서냉전 체제가 무너지자 이란을 새로운 적을 규정했죠.

   “대량파괴무기를 생산하고, 테러를 지원하는 몹쓸 나라”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미국은 그들이 짠 새로운 국제질서를 거부한 이란과 같은 나라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겁니다.

  최근 미국-이란 간 핵협상이 사실상 타결됐지만 이란에 대한 이같은 좋지않은 인식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이란은 ‘불량국가’도 아니요, 더군다나 ‘악의 축’도 아닙니다. 물론 지금 우리 사회에 미국이 끼친 영향이 절대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이란의 관계는 1400년 동안 질기디 질긴 인연의 끈을 부여잡고 있습니다. 지난 주 대강의 내용을 소개했지만, 최근 이란에서 발굴된 대서사시 <쿠쉬나메>는 1400 년 전 신라-페르시아의 혈맹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사산조 페르시아 왕족의 후예가 신라로 망명한 뒤 신라 공주와 혼인하고, 그 아들이 이란으로 귀국하여 아랍의 폭정자인 자하크를 타도하고 이란의 영웅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깁니다. 이란에서 구전으로 전해졌다는 이 <쿠쉬나메> 이야기는 마냥 허황된 신화나 전설이었을까요.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의 단군신화도 역시 신화입니다.

   하지만 신화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만큼이나 엄청난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화를 입증할만한 고고학 자료들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쿠쉬나메> 이야기는 어떨까요.

   지금부터 <쿠쉬나메>의 내용을 문헌기록과 고고학 유물로 비교 검토해보겠습니다.

   아래의 블로그 내용을 보면서 팟캐스트를 듣는다면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흔적의 역사>는 조선시대 부분만 일단 추려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습니다. 그 역시 사랑해주세요. (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사실 <쿠쉬나메> 이전부터 신라-이란간 국제교류가 활발했다는 단서는 많다. 이희수 교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는 먼저 5~6세기 신라고분에서 출토되는 여러 점의 페르시아계 유리제품을 꼽는다.
 “로마형·페르시아형 유리제품들이 주종을 이룹니다, 화려한 색깔과 아름다운 자태의 이 유리제품들은 지금 쓴다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주로 로만글래스(비잔틴)들인데 흑해~남러시아~사산조 페르시아~중국을 거쳐 신라로 유입됐다고 봅니다.”
 특히 페르시아 지방의 기법으로 제작된 ‘커트 글라스(Cut Glass·무늬를 새긴 유리)’도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황남대총 북묘에서 출토됐다. 커트 글라스는 ’쿠쉬나메‘의 주인공인 아비틴의 본향, 즉 사산조 페르시아 계통이다. 7세기 초 경북 칠곡군 송림사 5층 전탑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그릇도 페르시아 계이다. 탑의 중앙에 금동제 사리함이 있고 그 속에 높이 7㎝ 정도의 녹색유리방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다.
 유리잔 표면에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에 유행했던 고리무늬가 장식돼있는 것이다. 신라-페르시아 간 끈끈한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밖에 ‘입수쌍조문석조(立樹雙鳥文石造)’와 화수대금문금구(花樹對禽文金具)‘도 전형적인 사산조 페르시아계 유물이다. 두 유물 모두 평면이 원형이고, 가운데 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날짐승을 대칭시키며 원 박에 옥을 두른 연주대가 있다. 이는 신라로 망명했다는 아비틴의 나라인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왔거나, 혹은 영향을 받은 유물들이다.    

황남대총 은잔에 새겨진 여인상. 이란의 전설적인 여신인 아나히타상을 연상시킨다는 게 학계의 분석이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제공

 ■“(페르시아의 왕족인) 아비틴과 신라공주 프라랑은 마침내 혼인을 치른다.”(<쿠쉬나메>)
 또 하나, 흥미로운 유물은 황남대총 북묘에서 확인된 은제 잔이다. 그릇처럼 생긴 이 잔은 5~6세기 것으로 확인됐는데, 여인 한 사람이 조각돼 있다. 이희수 교수는 “이란의 아나히타(Anahita) 여신상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실제 이란 국립박물관 등에 있는 같은 시대 은제제품이 양각된 아나히타 여신상과 매우 유사하다. 아나히타는 고대 이란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여신이다. 풍요와 전쟁, 농경을 관장하는 신이다.
 “지금도 이란에서는 사산초 페르시아 시대에 축조된 아나히타 신전이 산재해 있을 정도로 고대신상의 중심인물입니다.”
 이교수가 주목하는 것은 이 대목이다. 국가의 정신적인 통합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신이 그릇이나 도구에 조각돼 있다면 그것은 일반교역품으로 보기는 어렵다.
 “최고위층의 신앙의례나 국가적인 통치의 상징으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그렇다면 신라왕실과 사산조 페르시아 왕실사이에 고도의 교류행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쿠쉬나메>에서 등장하는 페르시아 왕족의 후예인 아비틴이 신라왕(타이후르)에 귀순한 뒤 신라 공주(프라랑)과 혼인했다는 이야기와 같은….
 또 있다. 843년 신라 흥덕왕은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즐기며 해외명품만 선호한다”고 한탄하면서 몇몇 해외명품들을 국법으로 금했다.
 이 때 흥덕왕이 금지한 갖가지 해외명품 목록에 ‘슬슬전(瑟瑟鈿)’과 ‘구수’, ‘탑등’ 등 페르시아계 물건이 포함돼있다.
 ‘슬슬’이라는 단어는 이란어계인 ‘세세(Se-se)’이며 청색의 영롱한 에메랄드를 일컫는다. <신당서> ‘고선지전’은 “고선지 장군이 석국(石國·타슈겐트)에서 슬슬 10여석을 획득했다”고 기록했다. ‘전(鈿)’은 꽃 모양의 금이나 광채나는 자개 조각을 박아서 장식하는 것이다.
 결국 ‘슬슬전’은 수많은 에메랄드를 알알이 상감해서 장식한 명품이었다. 또 구수와 탑등은 양모를 주성분으로 잡모를 섞어짠 페르시아(波斯)산 직물이다.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평상·榻)에 깐다. 구수 보다는 탑등이 좀더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일반 백성들이 ‘페르시아 카펫(구수와 탑등)’을 깐 걸상까지 수입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은잔.

  ■“아비틴은 신라왕(타이후르)과 폴로(격구)를 즐긴다.”(<쿠쉬나메>)     
 신라와 이란인들이 신라 수도 경주에서 폴로, 즉 격구를 즐겼다는 <쿠쉬나메>의 내용이다. 물론 단서가 있다.
 신라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궤릉과 흥덕왕릉을 지키고 있는 무인석상은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이다. 경주 구정동 방형무덤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도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서역인상은 상의 왼쪽 옷깃만을 바깥으로 접은 절금을 착용하고 가죽장화를 신었는데,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격구)용 스틱 같은 것을 두 손에 잡고 있다.
 폴로(격구)는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유래됐고, 중앙아시아에서 크게 유행한 유목민족의 스포츠이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이희수 교수는 “바로 <쿠쉬나메>에 페르시아 이주민과 신라 귀족들이 폴로경기를 벌였다는 대목이 나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폴로 뿐이 아니다. <쿠쉬나메>의 묘사에서 의미심장한 내용들이 만만치 않게 들어있다. <쿠쉬나메>를 보면 신라왕은 왕자 2명을 항구로 보내 페르시아인들을 이끌고 망명해오는 아비틴을 영접한다. 그리곤 서울로 모신 뒤 갖가지 연회를 베풀며 환대한다. 마침내 공주와 아비틴의 혼인을 허락한다. 이 이야기의 구조를 보면 인도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의 가락국 도착을 다룬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흡사하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은 기원후 48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수행원 20여 명을 이끌고 김해 포구에 도착하자 직접 마중을 나온다. 왕은 허황옥 일행을 서울로 극진하게 모신다. 난초로 만든 마실 것과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한다.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도 내준다. 수로왕과 허황옥은 마침내 혼인해서 왕자(거등왕)을 낳는다.
 그러고 보면 가락국 김수로왕이나 <쿠쉬나메>에 등장하는 신라왕 타이후르는 해외 망명객들을 ‘쿨’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국빈으로 대접한 것도 모라자 급기야는 혼인동맹까지 맺은 세계화·국제화의 기수였음을 알 수 있다.  

 

경주 구정동 고분의 네 모서리에 부조된 무인상.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입이다. 페르시아 스포츠인 폴로경기용 스틱을 두 손에 쥐고 있다. 최근 발굴된 <쿠쉬나메>에서 페르시아 망명집단과 신라 간 폴로경기를 벌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한상 교수 제공



 ■“신라왕은  아비틴과 황금왕좌에 앉는다.”(쿠쉬나메)
 신라왕과 망명한 아비틴이 “황금왕좌”에 앉아 친밀한 대화를 나눴다?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신라=황금나라’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전성기에는 경중(京中)에 17만8936호가 있고, ~35개(실제는 39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다.”
 <삼국유사> ‘진한조’의 내용이다. 경주의 인구가 17만호를 넘어섰으며, 얼마나 황금을 사랑했는지, 서울(서라벌)에 황금을 입힌 집이 35채(실제는 39채)나 있었다는 것이다. 
 중세 아랍문헌은 ‘황금나라 신라’를 ‘동방의 이상향’으로 앞다퉈 극찬하고 있다.
 “신라를 방문한 사람들은 누구나 다시 그 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의 금은 너무도 흔하다. 심지어는 개 목걸이나 원숭이의 목테도 황금으로 만들었다.”
 중세 아랍 지리학의 거장인 알 이드리시는 그 유명한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1154)에서 신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개목걸이도 황금이었다니….
 그런데 당대 지리학의 거장인 알 이드리시의 <천애횡단갈망자의 산책>은 허투루 만든 책이 아니다. 1138년 시칠리 왕국의 로저 2세왕의 위촉에 따라 지리학자·천문학자·화가들을 총동원, 15년에 걸친 편찬작업 끝에 완성한 역작이었다. 그러니 신빙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자료이다. 알 이드리시 뿐이 아니었다.
 사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알 마크디시는 966년 “신라인들은 가옥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식사 때는 금으로 된 그릇을 사용한다”고 했다.(<창세와 역사서>)
 6세기 신라 적석총에서 출토되는 금관을 비롯한 온갖 황금유물들이 이같은 아랍인들의 언급이 거짓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아나히타 여신상을  부조한 이란의 항아리


■“신라는 낙원이다. 여성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 ”(<쿠쉬나메>)  
 쿠쉬나메를 보면 중국의 변방국왕인 마친은 아비틴에게 신라를 망명지로 추천하면서 ‘신라=낙원의 나라’로 지칭한다. 또한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 왕족 아비틴은 신라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치켜세운다. 그 말이 맞다.
 신라를 명시한 최초의 아랍어 언급은 이븐 쿠르다드비의 <도로와 왕국총람>(846~847년 사이에 최초 필사)에서 나왔다.
 “신라에는 금이 풍부하다. 그곳에 가는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해 버린다.”  
 또 지리학자 알 카즈위니(1203~1280)는 ‘알라의 은혜’로 “신라는 병을 치유하는 나라”라는 찬사를 보냈다.
 “공기가 깨끗하고 물이 맑으며, 토질이 비옥해서 불구자가 없다. 그들의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사향에 버금가는 향료)이 풍긴다고 한다. 진염병이나 질병도 드물며 피리도 없고 갈증도 없다. 다른 곳에서 질병이 걸린 사람이 이곳에 오면 곧 완치된다. 신라로 들어간 사람들은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모두 알라의 은혜 덕분이다.”(<여러 나라의 유적과 인류소식>)    
 아니 얼마나 신라에 감명을 받았으면 집에서 용연향이 풍기고, 불구자도 없으며, 어떤 질병에 걸린 사람도 신라에만 오면 완치된다고 했을까.
 알 카즈위니는 심지어 “신라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알 카즈위니는 50명에 달하는 선현들의 지리서적을 참고해서 <여러 나라의 유적과 인류소식>이라는 책을 찬술했다고 서문에 명시했다. 그만큼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쿠쉬나메>의 아비틴이 신라에 정착하기를 원했던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신라에만 오면 환자도 말끔히 치유가 되고, 전염병도 없고, 집에 물을 뿌리면 향기가 물씬 풍기며, 온통 금으로 도배했다니 누가 떠나고 싶었겠는가. 게다가 신라인들의 외모마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니….       

입수쌍조문 석조유물의 세부문양. 원형 평면의 가운데 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날짐승을 대칭시켜 원밖에 옥을 두른 연주대가 있다, 사산조 페르시아계 무늬이다. |이한상 교수 제공

  ■“중국왕은 신라왕을 협박하는 편지를 보낸다. 신라왕은 모욕감에 몸을 떤다.”(<쿠쉬나메>) 
 <쿠쉬나메>를 보면 중국왕이 신라왕을 모욕하는 편지를 쓰고, 신라의 해상을 봉쇄한 뒤 침공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그 침공은 대실패로 끝나고 쫒겨난다.
 이쯤해서 <삼국사기> 문무왕조를 보자. 671년 신라는 가림성을 공격해서 백성(부여 임천)에서 당나라군 5300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당나라 총관 설인귀가 신라 문무왕에게 모욕의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지금 문무왕은 음흉한 생각을 품고~ 천자의 명을 어기고, 이웃 나라의 우호를 속이고 있구나. 전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구나!”
 그러면서 협박한다.
 “겸손한 뜻으로 돌아가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갖는다면 제사를 제 때에 받을 것이요. 사직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을 듣지 않으면 나라가 망해 제사가 끊어질 것이니 조심하라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신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였다.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지만, 당나라가 한반도 점령의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고토에 5도독부를 설치한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배신감을 느낀 신라는 669년부터 백제의 고토를 점령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지원했다. 그러자 당나라가 신라를 협박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는 <쿠쉬나메>에서 중국왕이 신라왕을 모욕하는 대목과 흡사하다.

 

7세기초 조성된 경북 찰곡의 송림사 전탑에서 나온 사리기 유리잔. 사산조 페르시아 시애데 유행한 고리무늬가 장식됐다. <쿠쉬나메> 시대와 거의 동시대이다. |이한상 교수 제공 

 ■“중국은 신라를 침공하지만 신라·이란 연합군에 밀려 대륙으로 쫓겨간다. ”(<쿠쉬나메>)
 당나라는 실제 675년 20만 대군을 동원, 매소성에서 신라군과 맞섰다. 하지만 신라의 대대적인 반격을 받고 한반도에서 완전히 쫓겨간다. 그 때가 676년이었다.
 <쿠쉬나메>에서 중국군이 신라를 공격했지만 완패당한 뒤 중국으로 쫓겨간 상황과 흡사하다. <쿠쉬나메>에서는 신라 단독군이 아니라 신라-이란 연합군으로 표현돼 있지만….
 물론 <쿠쉬나메> 속 이야기가 실제 역사냐 하고 따져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페르시아 왕족이 신라공주와 혼인했고, 그 후손이 이란의 영웅이 됐다는 이야기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니까. 그런 증거들을 찾고 해석하는 일은 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적어도 남의 장단에 맞춰 이란을 ‘불량국가’, 혹은 ‘악의 축’으로 폄훼해서는 안되지 않을까. 혹 흐르고 있을 인연의 피를 감안해서라도….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희수, <이슬람과 한국문화>, 창아출판사, 2012
         <중동지역 한국학 관련 고문헌 및 역사 어문자료 기초조사>,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세계지역종합연구 협동연구총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1
         <고대 페르시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의 발굴과 신라관련 내용>, 한국연구재단 인문한국지원사업 지원연구소, 2009
 이한상. <황금나라 신라>, 김영사, 2004
 정수일, <한국 속의 세계 상>, 창비, 2005

   민병훈, <실크로드와 경주>, 통천문화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