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미국 경매에서 구입 환수된 특별한 문화유산 1점이 공개됐는데요.
공개 때 ‘일영원구(日影圓球)’로 명명된 유물입니다.
지구본처럼 생겼는데, 각종 장치를 조정하면서, 어느 지역에서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휴대용 해시계’입니다.
지름 11.2cm, 전체높이 23.8cm 정도 됩니다. 저는 이른바 ‘일영원구’의 환수 소식을 접하고도 정확한 작동원리와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전공자인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와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한국과학기술사 과장, 그리고 유물의 성분분석을 맡은 권혁남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부 학예연구관 등의 도움말로 유물의 작동원리와 의미 등을 풀어보겠습니다.
■해 그림자를 맞춰 측정하는 휴대용 시계
이 휴대용 해시계는 아래위의 두 반구(半球)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위쪽 반구는 고정되어 있고, 아래 반구는 좌우로 돌릴 수 있습니다. 위쪽 반구에는 시간을 표시한 간지(2시간 단위) 글자와, 시각을 나타나는 세로선 96각(하루 1440분을 15분 단위로 나눔)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간 표시 아래에는 둥근 구멍을 뚫어놓았는데요. 세부시각을 알려주는 창문이라는 뜻에서 ‘시보창’이라 합니다.
아래쪽 반구는 좌우로 돌릴 수 있다고 했죠.
그 아래쪽 반구를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돌려 맞추면 위쪽 반구에 표시된 간지가 시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밑에 뚫린 구멍 속에서 역시 간지가 새겨진 시각표시(시패·時牌)가 ‘까꿍’ 하고 나타납니다.
위의 간지는 시간을, 밑의 구멍속 간지는 시각을 나타낸다고 보면 이해가 되죠. 세종 시대에 발명한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국보)와 자명종인 혼천시계(국보)에도 시보창이 뚫려 있는데요. 그 시보창의 전통을 이은 겁니다.
그럼 태양을 어떻게 시계에 맞출까요. 휴대용이고, 해시계이니만큼 이 시계를 처음 세팅할 때는 사람의 손이 필요합니다.
시계에 달린 ‘추를 매단 줄’(다림줄·이 시계에서는 흔적만 남아있음)로 수평을 확인한 뒤, 별도의 휴대용 나침반으로 해시계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죠. 그런 뒤에는 해시계에 달려있는 위도 조절 장치로 현재 있는 곳의 위도를 맞추죠.
그런 다음 좌우 회전이 가능한 아래쪽 반구를 태양 쪽으로 돌려 맞추는데요.(해시계니까)
아래쪽 반구에는 태양이 비춰서 그림자를 낼 수 있는 영침(影針·일종의 시계침)이 설치되어 있구요. 그 영침에 비친 태양의 그림자가 홈(길게 난 구멍) 속에 쏙 들어가 보이지 않게 맞추면 ‘측정 준비끝’입니다. 그런 뒤 영침을 위로 올려서 영침이 가리키는 위쪽 반구의 간지가 나타내는 시간과, 구멍(시보창)에 쓱 하고 보이는 시각표시(시패)를 보고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겁니다. 흥미로운 것은 원구에 표시된 간지(시간표시)는 12간지 중 9간지 뿐인데요. 해시계라 굳이 해(亥·21~23시), 자(子·23~01시), 축(丑·01~03시) 등 해가 뜨지 않은 밤시간을 표시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듣도 보도 못한 해시계
이 휴대용 해시계에 담겨진 갖가지 의미가 조명되었습니다. 우선 생전 처음보는 물건이었구요.
앙부일구보다 진전된 해시계라는 점도 부각되었습니다. 즉 하늘을 향한 가마솥 형태(반구·半球)인 앙부일구에는 태양의 그림자를 비춰 시간을 확인하는 영침(影針)이 고정되어 있죠. 그래서 오로지 한 지역에서만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나 구입 환수한 ‘일영원구’는 두 개의 반구가 맞물려 각종 장치를 조정하면서, 어느 지역에서나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는 겁니다. 회전축을 자구 자전축과 일치하도록 맞추면 남반구 여행 중에도 쓸 수 있답니다.
제작자와 제작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글자와 낙관(도장)이 새겨져 있는 것도 이 유물의 장점입니다.
즉 ‘대조선 개국 499년(1890년) 7월 상순에 제작했다’(大朝鮮開國四百九十九年庚寅七月上澣新製)’는 명문과 함께, ‘상직현 인(尙稷鉉印)’이 새겨져 있는데요. 상직현(생몰년 미상)이라는 인물이 제작(혹은 제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상직현은 고종의 호위와 궁궐 및 도성의 방어를 담당한 총어영 별장과 별군직 등을 역임했습니다.
상직현은 수신사로 일본에 간 경험이 있구요.(1880년)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된 이력이 있는 아들 상운은 조선에 전화기를 처음으로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죠. 해외문물과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고 있던 가문이었을 겁니다.
■‘일영원구’ 아닌 ‘원구일영’으로 명칭 바꿔야
이 대목에서 몇가지 곱씹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먼저 ‘일영원구(日影圓球)’라는 유물명칭인데요.
왜 ‘앙부일구(仰釜日晷)’라는 해시계가 있다고 했죠. ‘가마솥(부·釜) 모양으로 하늘을 바라보는(앙·仰) 해시계(일구·日晷)’라는 뜻이죠. 명칭을 정할 때는 이렇게 형태(가마솥 모양)를 먼저 앞세우고, 뒤에 기능을 붙이는게 보통입니다.
따라서 이번에 구입환수한 ‘휴대용 해시계’의 명칭도 ‘일영원구’가 아니라 ‘원구일영’(圓球日影·공모양의 해시계)라 해야 할 것 같아요. 왜 이런 오류가 일어났을까요. 해시계의 꼭대기 부분에 ‘원’ ‘구’ ‘일’ ‘영’ 4자가 둥글게 새겨져 있는데요. 보기에 따라서는 ‘원구일영’ 혹은 ‘일영원구’ 등으로 읽을 수 있죠. 유물을 맨 처음 보았을 때 ‘일영원구’로 잘못 읽은 겁니다.
윤용현 국립중앙과학관 한국과학기술사과장이 이 문제를 제기했는데요. 이 유물의 학술적인 가치 등을 자문한 이용삼 충북대 교수도 같은 말을 하더라구요.
■서양에서는 회중·손목시계가 유행했는데…
또 하나 지적할 사항이 있는데요. 과연 보도자료 내용대로 ‘원구일영이 앙부일구보다 진전된 해시계이고, 당대 과학기술의 발전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일까요. 먼저 묻죠. ‘원구일영’은 과연 당대 최첨단 시계였을까요.
사실 그렇지는 않답니다.
서양에서는 가슴에 품고 다니는 회중시계가 16세기초 처음 발명된 후 18세기에 전 세계로 확산됐습니다. 이미 19세기 초가 되면 손목시계가 등장합니다.
조선에서는 어떨까요. 한성판윤을 지낸 강건(1843~1909)이 1871년(고종 8) 제작한 ‘휴대용 앙부일구’(보물)를 볼까요.
조선의 해시계 중 가장 작고(세로 5.6cm×가로 3.4cm×높이 2cm) 정밀하며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번에 구입 환수된 ‘원구일영’이 강건의 ‘휴대용 앙부일구’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회중·손목시계까지 대중화한 당대 서양과는 더더군다나 비교할 수 없을 것 같구요.
또한 전문가들 말로는 이 ‘원구일영’은 대중용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휴대용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별도의 나침반으로 방향을 정확하게 잡아줘야 하구요. 또 서있는 곳의 위도(서울은 약 북위 37.3도) 역시 일일이 사람이 맞춰야 합니다. 이 ‘원구일영’은 어느 정도 천문지식에 갖고있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겠죠. 웬만한 사람이 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은 아니었을 거라는 얘기죠.
■원구일영이 앙부일구보다 낫다?
무엇보다 이 ‘원구일영’이 ‘앙부일구’보다 앞선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요. 물론 기술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원구일영’이 ‘앙부일구’에 담긴 ‘세종의 애민정신’을 따라갈 수 있을까요. ‘앙부일구’가 어떤 해시계인데요.
예부터 해시계는 전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제작됐죠. 그러나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해가 뜨는 높이와 방향이 바뀌죠. 그러니 평면 해시계를 만들면 해의 그림자가 달라지게 되고, 시계의 숫자판이 불규칙해지며 간격도 일정치 않게 됩니다.
세종 시대의 과학자들은 숫자판을 가마솥처럼 오목하게 만든 앙부일구를 발명하여 이런 단점을 보완했습니다.
오목한 구형 안쪽에 설치된 막대에 해 그림자가 생겼을 때 그 그림자의 위치로 시각을 측정했죠.
앙부일구의 개발과 설치를 알린 <세종실록> 1434년 10월2일자를 볼까요.
“때를 아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밤에는 자격루(물시계)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려워…12지신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혜정교 옆(종로 1가 광화문 우체국 부근)과 종묘 남쪽 거리에 앙부일구를 설치했다.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절절이 담겨있는 실록 구절이죠. 그중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爲愚氓)~’는 어디서 본 표현이죠. “어리석은 백성들(愚民)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세종의 말씀(1446년 9월29일)이 금방 떠오르죠.
그러나 앙부일구를 대로변에 설치한 1434년은 한글이 창제·반포되기 12년 전의 일이죠.
따라서 세종은 ‘글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시각을 글자(한자)가 아니라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12지신의 동물 그림으로 표현한 겁니다. ‘자(子)·축(丑)·인(寅)·묘(卯)…’ 대신 ‘쥐와 소, 호랑이, 토끼’ 등의 그림으로요.
■앙부일구에 새겨진 13줄 절기선의 의미
시간 뿐입니까. 앙부일구에는 서양의 해시계에서는 볼 수 없는 기능이 있는데요. 그것이 12지신 시각선과 직각으로 새겨넣은 13개의 절기선입니다. 이 절기선 양쪽 가장자리 윗면에 24절기가 표시되어 있구요. 해는 여름이면 높이 뜨지만 겨울이 되면 비스듬히 떠서 방 안 깊숙히 비추죠. 당연히 그림자도 여름이면 짧아지고 겨울에는 길게 늘어지죠.
이것을 이용한 것이 13개 절기선인데요. 그 중 가장 바깥 줄은 시침의 그림자가 가장 길어지는 곳이구요. 거기에 ‘동지(冬至)’ 표시가 있구요. 제일 안쪽 줄은 시침의 그림자가 가장 짧게 되는 곳인데, 거기에 ‘하지(夏至)’라고 써놓았습니다.
나머지는 소한, 대한, 입춘, 우수로 이어지는 24절기를 나타낸 것인데요. 즉 24절기가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해의 기울기가 달라져 시침의 그림자가 바뀌는 모습을 13줄로 나타내고 있어요.
앙부일구는 이렇게 천구상에서 일정한 주기를 갖고 회전하는 태양의 운행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기구였습니다.
해 그림자가 드리워진 절기선과 시각선의 눈금을 읽으면 별도의 계산 없이 그때의 시각과 절기, 일출까지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는 간편한 기구라 할 수 있습니다. 2020년 구입환수된 앙부일구(1713년 이후 제작)에는 서울의 위도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영침을 서울의 북극고도(37도 39분 15초)에 맞추어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요. 앙부일구는 서울을 기준으로 한 국가 표준시계였다는 뜻입니다. 앙부일구가 서울을 기준으로 한 국가 표준시계였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공유버튼을 누른 세종
또 그렇게 개발한 해시계, 앙부일구를 대로변에 설치한 것도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원래 ‘천문 기상의 관측’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천기(天機)’에 속했거든요.
‘왕(王)’이라는 상형문자를 보십시요.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임금이었거든요.
<서경> ‘요전’편은 “임금 만이 하늘 땅과 소통한 뒤에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시간과 절기를 나누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다. 달리 말하면 ‘천기는 군주의 몫이니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어떤 분입니까. 그 분은 절대 누설해서는 안될 ‘천기’를 백성들에게 ‘공개’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종은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民以食爲天)”는 <사기> 구절(‘열전·역이기’전)을 인용했습니다.
세종은 농사를 짓고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시간과 절기를 스스로 알고 대비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겁니다.
그것이 공중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만든 세종의 뜻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을 위해 ‘천기의 공유버튼’을 누른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의 앙부일구는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라 할 수 있죠.
그러니 한 관리가 개인적으로 제작한 ‘원구일영’과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든 ‘앙부일구’를 감히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원구일영’의 가치 또한 낮춰 볼 이유는 없을 것 같습니다. 원구형, 즉 공모양이라는 아주 독특한 해시계라는 점과, 시각을 표기하면서 전통의 앙부일구와 혼천시계의 전통을 따랐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볼 수 있다는군요. 상직현이라는 인물이 지구본을 빼닮은 독특한 모양에, 조선 전통의 기법을 가미한 시계를 제작한 것이 아닐까요. 상직현 본인 혹은 상씨 가문 만을 위한 ‘한정판 해시계’를 주문 제작한 것이 아닐까요. 혹은 상직현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직접 만든 것일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이 ‘원구일영’은 세상에 단 하나 뿐이 없는 휴대용 해시계라는 ‘아주 특별한’ 가치를 자랑할 수 있겠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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