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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1987년 평화의 댐 착공

ㆍ對국민 사기극

1986년 10월30일. 당시 이규호 건설부 장관의 발표는 전 국민을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북한이 비밀리에 200억t 저수용량의 금강산댐(임남댐) 건설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만약 댐이 무너지면 서울은 12~16시간 내에 물바다가 되고 여의도 63빌딩의 3분의 2, 국회의사당의 지붕부분만 남게 된다는 충격적인 시뮬레이션 결과를 언론 보도를 통해 접한 국민들은 경악했다. 

북한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 댐을 세웠다고 당국은 설명했다. 성금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코흘리개 어린이부터 지팡이를 쥔 어르신까지 줄을 섰다. 정부는 11월26일 대응댐인 ‘평화의 댐’ 건설계획을 세웠고, 이듬해인 87년 2월28일 강원 화천군 동촌리에서 첫삽을 떴다. 89년 5월27일 댐 높이 80m에 이르는 공사가 완료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93년 감사원 감사결과 이 금강산댐 소동은 비등하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잠재우려는 ‘국면전환용 사기극’임이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정부의 충격적인 발표가 있었던 86년 10월30일은 이른바 ‘건국대 사태’로 국면이 요동쳤던 때였다. 전두환 정권은 금강산댐 발표 직후인 31일 3000여명의 경찰을 건국대에 투입, 대학생 1525명을 연행했다.

감사원 감사결과가 나오자, 북한의 수공(水攻) 위협에 가슴을 졸였던 국민들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사가 중단된 평화의 댐은 그야말로 흉물로 방치됐다. 하지만 평화의 댐은 2000년대 들어 다시 각광을 받았다. 2002년 1월 금강산댐 상부에서 함몰의 흔적이 나타난 것. 정부는 그 해부터 저수용량 26억3000㎥에 이르는 평화의 댐 2단계 공사를 시작했다. 북한 금강산댐(26억2000만㎥)보다 1000만㎥ 많은 저수용량이었다. 평화의 댐에서 24㎞ 떨어진 금강산댐이 붕괴되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다. 

한때 못된 정권의 상징물로 천덕꾸러기가 됐던 평화의 댐은 이제 댐 본연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 금강산댐-평화의 댐 소동은 전 국민들의 가슴 속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한 가지 바람이라면 이름 그대로 ‘평화의 댐’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예컨대 북한이 물을 내려 보내주고 우리 쪽은 북한의 부족한 전력을 보태주는 것과 같은, 그런 진정한 ‘평화의 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