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현전우일(玄田牛一·구로다 규이치)이다.” 지난 2002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있다. 협객이라는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뤘는데, 17년이 지난 지금도 케이블 TV에서 단골로 방영된다.

최근 새삼스레 다시 그 드라마를 보게 된 필자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불세출의 만담가인 신불출(1905~?·김종국 분)의 ‘현전우일’ 대사에 ‘꽂혔다’. 신불출이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따라 창씨(현전)와 개명(우일)을 동시에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현전우일’이 일본어인 ‘畜生(축생)’의 파자(破字)라는 대사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畜’은 ‘玄+田’이요, ‘生’은 ‘牛+一’이 아닌가. ‘畜生’을 파자하면 ‘현전우일’이 되는 것이다. ‘축생’은 일본에서 ‘칙쇼(ちくしょう)’라는 욕설이다. ‘칙쇼’, 즉 ‘축생’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뜻이다. 신불출은 조상이 준 소중한 이름을 버리고 창씨를 강요당했으니 스스로를 ‘짐승만도 못한 놈’으로 일컬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드라마를 보고 신불출의 자료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1940년 1월5일자 매일신보. 2월11일부터 시행될 ‘창씨개명’ 제도를 앞두고 일본식 ‘씨’ 제도의 도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1개면을 털어 선전했다. 이날 춘원 이광수 등  ‘폭풍같은 감격 속에 씨 창설의 선구가 된 조선 지도자 제씨가 일본식 ’씨‘를 고를때의 고심담’을 자랑스레 풀어헤쳤다.   


■만담가 신불출의 ‘창씨개명’ 전설

좌익성향의 만담가로 특유의 해학과 풍자로 반일의식을 설파한 신불출은 해방후 월북했고, ‘노들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에다…’로 시작되는 민요 ‘노들강변’의 노랫말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런저런 논문이나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과문한 탓에 ‘신불출과 현전우일’의 일화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다만 신불출이 창씨개명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에하라 노하라’, 즉 ‘될대로 되라’는 뜻으로 ‘강원야원(江原野原)’이라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물론 이 또한 풍문일 뿐이다. ‘불출’이라는 예명도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현전우일’이나 ‘강원야원’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은 최고의 만담가인 신불출에게 당대 최고의 이슈였던 창씨개명과 관련되어 어떤 ‘레전드(전설)’이 되어주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황족계살랑과 소화망태랑

그랬다. 일제가 1000년 이상 내려온 조선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려 하자 이를 둘러싼 갖가지 이야기들이 혹은 사실로, 혹은 풍문으로 퍼졌다. 

견자웅손(犬子熊孫·이누코 구마소), 즉 ‘개자식이 된 단군의 자손’이라든지, ‘천황폐하’(天皇陛下)의 발음(덴노헤이카)와 비슷한 ‘전농병하’(田農丙下·전병하)라든지 하는 창씨개명이 인구에 회자됐다. 

일본의 황족인 약송궁(若松宮)의 약송(若松)과 일왕의 이름인 유인(裕仁)의 仁를 써서 ‘약송인(若松仁·와카마쓰 히토)’이라 했다가 황제모독죄로 체포된 이도 생겼다 한다. 또 창씨개명 정책을 실시한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총독의 형이라는 의미에서 남태랑(南太郞·미나미 타로)라 지은 이도 있었단다. 

아마도 ‘내가 니(미나미 총독) 형이야’ 뭐 이런 기분이었을까. 실제로 조선총독부와 각 지방 관청에 ‘황족개몰살랑(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天皇族皆殺郞·일왕족을 몰살시키려는 사내)’이나 ‘소화망태랑(쇼와 보타로·昭和亡太郞·히로히토 일왕을 멸망시킬 남자)’와 같은 창씨개명도 할 수 있냐고 묻는 엽서를 보낸 이들도 있었다.

 

 춘원 이광수의 ‘창씨개명 무용담’. 일본을 건국한 ‘신무천황이 어즉위하신 향구산의 향산(香山)을 따서 씨로 삼았고, 광수의 光자와, 일본식 이름인 郞자로 해서 향산광랑이라 자랑스럽게 밝혔다.  

■犬糞食衛와 犬の子錫斗

풍자적인 창씨개명 중 ‘역대급’은 역시 ‘견분식위’(犬糞食衛), 즉 ‘이누쿠소 구라에’라 할 수 있다. 이 창씨는 부산의 사학자인 문정창(1899~1980)의 <군국 일본 조선 강점 36년사>에 등장하는 일화다. 한때는 근거없는 소문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유사한 사건이 실제 존재했다는 고등법원 검사국 자료가 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경남 동래읍에 살던 창씨명 히야마 스즈토(檜山錫斗·조선명 불명·제관업·54)라는 인물이었다. 검사국 자료는 히야마가 1942년 11월2일 부산부 수정 복성여관 뜰에서 역시 조선인 창씨자 가네미츠 곤주츠(金光今述)외 2명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즉 히야마는 1940년 개자식석두(이누노코 스즈토·犬の子錫斗·개자식)라 창씨개명해서 동래부 읍장에게 제출했다. 동래읍장이 “하필 이누노코라 하느냐”고 묻자 히야마가 대꾸했다.

“내가 조선인인데 성을 바꾸면 개새끼, 소새끼라는 욕을 먹는데 창씨가 무엇입니까. 성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이누노코라 한 겁니다.”

이 말을 들은 동래부 읍장이 “당신 경찰이 알면 경을 칠 것”이라 꾸짖어서 어쩔 수 없이 ‘히야마’로 창씨해서 서류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계속 “조선인은 존재가 없다. 왜 창씨개명을 하는냐”고 떠드는 바람에 결국 경찰에 붙잡혀 징역 6개월을 살았다. 이름이 ‘석두(錫斗)’임이 틀림없는 히야마의 조선 성은 알 수 없다. 만약 이 인물이 누구인지 알려진다면 ‘독립유공자로서의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고구마’처럼 답답한 창씨개명의 역사를 ‘이누노코’로 시원하게 날려준 공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옥고까지 치렀다니….

다시 한번 ‘창씨개명’의 궤변을 늘어놓은 이광수의 ‘창씨와 나’. 일제의 창씨개명을 선전하는 데 주구노릇을 했다.1940년 2월20일 매일신보에 실려있다.

■죽음을 불사한 창씨개명 거부자

죽음을 불사하고 창씨개명에 항거한 이들도 있다.

전남 곡성의 류건영(柳健永)은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개명을 반대하는 서한을 보낸 뒤 자결했다. 

“슬프다. 나라가 멸망했을 때 죽지 못하고 30년간 치욕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혈족의 성마저 빼앗으려 한다…금수의 도를 500년 문화 민족에게 강요한다. 나 건영은 짐승이 되어 사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한다.”

또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1869~1940)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후손을 퇴학시키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울자 설진영은 할 수 없이 창씨개명한 뒤 자신은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이 설진영의 이야기는 일본인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1930~1975)가 <족보>라는 소설로도 발표했고, 1978년 한국에서 영화로 제작됐다. 


■임종국 선생도 깜빡 속은 향산광랑

그러나 창씨개명에 적극 나선 이들도 많았다. 춘원 이광수(1892~1950)는 바로 그들의 대표격이다.

평생을 친일문제연구에 바친 임종국 선생(1929~1989)은 1966년 출간된 <친일문학론>에서 ‘이광수의 창씨개명인 향산광랑(香山光郞·가야마 미쓰로)과 관련해서 깜빡 속을 뻔 한’ 일화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이광수의 창씨명에 등장하는 ‘광랑(光郞)’의 광(光)은 이광수의 광(光)자에서, ‘향산(香山)’은 묘향산의 향자에서 따온 줄 알았다. 이광수의 고향이 평북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필자의 학설은 매일신보 1940년 1월5일자 ‘지도자 제씨의 선씨(選氏) 고심담(지도급 인사들의 창씨 고심담)’을 대하자 그만 허둥지둥 쥐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이 무슨 말인가. 일제가 강압적인 창씨개명 정책을 펴자 춘원 이광수가 고향과 가까운 조선의 명산 묘향산에서 창씨명을 땄을 줄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광수라면 그 정도의 ‘생각’은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가 최독견이 1965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낭만시대>(1965년 6월10일자)를 보면 이광수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이렇게 전하는 대목이 나온다. 

“춘원의 창씨개명의 변을 들은 적이 있는데 재미 있었다. 그것은 맹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족정기 위에서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요, 그의 고향인 명산 묘향산의 이름을 따서 성을 삼고 광수라는 본명의 광자를 따고 사내라는 ‘랑’ 자를 붙였다는 것이었다.”

‘아무렴 춘원 같은 이가 아무 생각없이 창씨개명을 했겠냐, 무슨 깊은 뜻이 있었겠지’하는 맹목적인 기대감의 발로였을까. 

1940년 8월 27일 매일신보. 향산광랑(이광수)의 부인인 향산영자가 등장해서 “집안에서는 국어(일본어)만 쓰는데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면서 “창씨를 한 가정은 하루빨리 바뀐 이름을 불러야 할 것”이라고 촉구한다. 

■“신무천황께서 어즉위하신 향산 이름을 따서…”

임종국 선생을 ‘쥐구멍이라도 찾게 만든’ 1940년 1월5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무엇인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1939년 11월10일 조선민사령 개정으로 마련한 ‘창씨개명’ 제도의 실시(1940년 2월11일)에 앞서 1개면을 털어 ‘창씨개명 홍보’에 나섰다. 즉 매일신보는 일본식 ‘씨’ 제도 창설의 장점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폭풍 같은 감격 속에 씨 창설의 선구에 선 조선의 지도적 제씨의 선씨 고심담’을 소개한다. 

이 ‘지도계급’ 인사 중에 맨먼저 등장하는 이가 그 이름, ‘향산광랑이 된 이광수’이다. 매일신보 기자의 표현대로 ‘솔선해서 내지인식(일본식)의 씨명으로 고쳐 발표한 이광수씨의 변’을 들어보라.

“새로운 씨명은 향산광랑(香山光郞)! 이 빛나는 넉자 씨명을 선택한 고심담을 이광수씨, 아니 향산광랑씨에게 물으니 씨는 웃음을 머금은채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에 신무(神武) 천황께옵서 어즉위를 하신 곳이 강원(강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향구산(香久山)입니다. 뜻깊은 산 이름을 씨로 삼아 香山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수의 光자를 붙이고, 洙 자는 내지식(일본식)의 郞자로 고쳐 향산광랑이라 했습니다.’”

네 글자 중 한국이름은 광(光)자 뿐이다. 충직한 일본 천황의 후손이 되었음을 선포한 것이다. 


■“나도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겠다”

이광수는 ‘창씨개명’ 신고가 시작된 지(2월11일) 하루만인 2월12일 서둘러 경성부 호적계로 달려가 신청서를 제출한다. 이광수는 2월20일 매일신보에 자신의 창씨개명 논리를 ‘동기’, ‘내선일체’, ‘편의’, ‘결심’, ‘정치적 영향’ 등으로 나눠 조목조목 풀어헤쳤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한발 더 나아가 “이제 우리는 일본 제국의 신민이며, 지나인과 혼동되는 성명을 가지는 것보다도 일본인과 혼동되는 씨명을 가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과연 이광수의 ‘향산’이 ‘묘향산’을 가르키는가. 이런 빼도박도 못하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이광수는 이후에도 창씨개명에 조선인이 적극 나서야 한다는 글을 여러차례 기고했다.

“창씨개명은 폐하의 적자가 되겠다는 맹세로…” “조선인의 목표는 내선일체에 있으므로 중국식 성명은 빨리 버려야…” “의무교육과 특별지원병, 창씨개명은 내선일체의 정(鼎·세발 솥)…” “반도 동포의 창씨 신고가 8월10일 끝났는데 이 기쁜 날을 맞아…” 등 헤아릴 수 없다.

1930~40년대 불세출의 만담가인 신불출(사진 왼쪽). 신불출의 창씨명을 두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설이 나온다.   

■일본의 씨(氏)가 10만종 넘는 이유

그렇다면 일제는 왜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는가. 원래 성씨(姓氏)는 성(姓)과 씨(氏)를 합친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성(姓)은 혈족집단을, 씨(氏)는 사는 지역과 본관을 각각 의미한다. 그런데 한국인은 본관은 다르지만 사는 곳에 관계없이 김씨와 이씨 등과 같은 남계 혈족 집단을 가리키는 성(姓)이 존재해왔다. 한국의 성은 6세기부터 왕실귀족이 먼저 썼고, 고려가 건국된 직후인 940년(태조 23년) 무렵 토성분정(土姓分定·각 지역의 토착세력에게 남계혈연의 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일반화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메이지(明治) 유신 시대인 1875년 단 5%만이 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95%의 백성에게 구미열강의 가족관계와 가족명에 기초한 ‘씨’라는 ‘일본식 성’을 부여하면서 10만종 이상의 ‘씨’가 생겨났다.

1898년 메이지 민법의 친족법 개정 때 ‘가(家)’의 칭호로서 씨(氏)가 법제화했다.

즉 메이지 민법은 가(家)의 가장인 호주에게 큰 권한을 주는 대신 일왕(국가)이 이 가(家)를 통해 각 백성을 파악하는 시스템을 창출했다. 한마디로 일왕을 종가(宗家)로 하고 그 아래 신민(臣民)인 가장이 이끄는 각 가(家)가 분가(分家)로서 존재하는 체제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 남계혈통에 따른 강고한 종족집단(예컨대 김씨, 이씨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사실 조선의 이런 뿌리깊은 혈연체제는 천황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일제의 식민지배체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친일파도 거부감 표시한 창씨개명 

일제는 1920년대부터 조심스럽게 일본의 ‘씨’ 제도를 식민지 조선에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씨 제도를 도입하게 되면 조선의 남계혈통의 가족제도가 송두리째 무너지게 된다. 즉 조선에서는 여성이 시집을 오더라도 시집온 시댁의 성을 따르지 않는다. 장가 오는 사위도 당연히 마찬가지다. 그러니 조선의 한 가정에는 여러 성을 갖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씨’ 제도는 다르다. 여성이 시집오면 시집온 집안의 성을 따른다. 사위도 서양자(서養子)의 자격으로 그 집안의 ‘씨’를 따를 수 있다. 

조선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도였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나 사위를 같은 혈연집단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혈연을 강조하는 조선에서는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가족제도가 아니었다. ‘씨’제도의 도입인 골수 친일파 집단인 중추원 참의들의 이해를 구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친일파라도 ‘성을 간 놈’이라는 욕을 대대로 들을 수는 없지 않은가.

1940년 ‘개자식석두(이누노코 스즈토·犬の子錫斗·개자식)라 창씨개명해서 동래부 읍장에게 제출했다는 서류. 이 때문에 징역 6개월형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있다.|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의 <창씨개명-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 정선태 옮김, 산처럼, 2008년에서 

■조상의 후손이 아니라 천황의 자손으로

그러다 다시 창씨개명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1937년이었다. 

그해 7월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조선인의 급진적인 황민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황국신민의 서사 제정과 조선교육령 개정, 육군지원병 제도 실시와 일본어 보급 등의 정책을 잇달아 실시했다. 중일전쟁 발발로 시작된 전시체제기에 조선인을 전쟁에 써먹으려면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똑같은 자격을 부여해야 했다.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려면 일왕에 대한 충성심이 절대 필요했다. 그래야 총알받이로 내세울 수 있었으니까…. 그러기 위해 조선인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창씨개명’ 정책을 폈던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인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일왕에게 상주한 글을 보면 그 목적을 간파할 수 있다. 

“중국 문화의 침윤에 의해 혈족단위가 사회 구성의 기본으로 존중된 것인데 혈족 중심주의를 탈곡하고 국가 중심의 관념을 배양하여 일본 국체의 본위에 철저하게 하는 것이 극히 중요합니다.”

조선총독부 법무국이 발행한 팸플릿(‘씨 제도의 해설’)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종래는 일신이 종족에 결부되어 있지만 앞으로는 각 가정이 직접 천황(일왕)에 결부된다는 이념이 첫번째 의미”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왕을 향한 충성심이 필요했기 때문에 ‘창씨개명’을 독촉한다는 것이다.

창씨개명이 시작된 1940년 2월11일부터 12일까지 양일에 걸쳐 91명이 창씨개명을 신고했다고 전하는 매일신보 기사. 이 중에는 소설가 이광수(향산·香山), 총독부 사회교육과장 이원보(이가·李家), 중추원참의 윤갑병(평소·平沼), 변호사 이승우(오촌·梧村), 경성부회의원 조병상(하산·夏山), 경성부회의원 양재창(양천·梁川)  등의 이름이 적혀있다

■며느리도, 사위도 같은 성을 받을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1940년 2월11일부터 8월10일까지 6개월간 실시한 ‘창씨개명’의 요체(조선민사령 제19호)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6개월간 ‘씨’를 설정해서 신고할 것을 의무로 하고, 신고가 없는 경우 호주의 성을 ‘씨’로 정하며, 이름을 일본인 풍으로 바꿀 경우 재판소의 허가를 받은 후 신고하고 호적상의 이름을 바꾸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마디로 ‘창씨’는 의무이고 신고사항이고, ‘개명’은 임의이고 허가를 받는 형식이었다.

혈연이 아니라 집(家)에 일본식 ‘씨’를 주는 제도로 인해 서양자(사위를 자식으로)와 이성양자(성이 다른 양자를 자식으로)가 인정되었다. 총독부는 ‘창씨개명 신고’를 앞두고 “내지식(內地式·일본식)의 씨를 정하기로 했지만 강제로 권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의 담화문을 발표했다.(1939년 12월26일) 

하지만 그것은 구두선에 불과했다. ‘창씨’가 신고 여부와 상관없는 법적 의무사항인데 어떻게 강제가 아니라는 것인가. 신고하지 않으면 당사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호주의 성을 씨로 하고, 다른 성씨로 등록되어 있던 아내와 어머니도 같은 씨를 갖게 됐다. 

“의무가 아니”라고 강조했던 총독부는 창씨개명 신고율이 3월말까지 1% 미만에 머물고, 5월 중순까지도 7.6%(32만 6000건)에 그치자 노골적인 독촉운동에 돌입했다. 미나미 총독은 4월23일 도지사회의에서 “본 제도의 대정신을 제대로 연구해서 관하 민중 각층에 철저하게 침투되기를 하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총독부 법무국은 각 지방에 신고호수와 인구, 직업별 숫자 등을 10일마다 보고하도록 했다. 

창씨한 학생에게는 ‘창씨찰(創氏札)’을 달게 한 학교(충남 서천소학교)도 있다.(오사카마이니치신문 6월25일 조선판) ‘창씨를 한’ 생도들에게 새로운 일본이름을 쓴 명찰을 달게 했다는 것이다. 평북 학무과는 7월말 성적이 좋지 않은 학교명을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종로권번 소속 기생들이 단체로 창씨개명했다는 소식을 전한 매일신보 기사  

■‘비창씨자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다’

윤치효(1865~1945)의 일기(1940년 5월30일)를 보면 강제성의 일단을 가늠할 수 있다.

“시골에서는 민중에게 일본명을 짓게 하려고 지방의 경찰 관리 면장이 강한 압력을 가한다. 집을 짓거나 살 때 필요한 허가도 신청서도 일본명이 적혀 있지 않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 소학교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곳에 따라서는 이름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까지 호적증명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또 “장래 소학교 아동이 입학할 때 창씨자와 비창씨자를 차별하는 방법도 강구한다”는 언론보도(오사카마이니치 6월28일자 조선어판) 창씨를 하지 않으면 학교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교육열이 남다른 조선의 백성들이 버틸 재간이 있었겠는가. 

그 결과 6개월 동안 총 400만 가구 가운데 약 80%(323만 가구)가 ‘창씨’에 신고했다. 그러나 의무사항이 아닌 ‘개명’은 10%(인구수 대비)에 불과했으니 어쩔 수 없이 의무사항인 ‘창씨’는 했지만 임의사항인 ‘개명’은 지극히 꺼려했음을 알 수 있다.


■창씨개명은 친일판정의 기준이 아니다

한가지 사족을 달면 1940년 당시 전 조선 가구수의 80%가 ‘창씨’를 신고했다면 그들은 모두 친일파로 지목될 수 있을까.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렇지 않다’고 유권해석을 내렸다.

즉 ‘창씨개명’이 일제의 식민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강제된 것인 만큼 ‘친일’을 판정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당시 조선귀족, 중추원, 명망가, 지역 유지 등 일부 ‘특권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불이익을 받거나 탄압을 받지 않는다는 선전 도구로 활용됐다. 한상룡(중추원 고문), 박흥식(화신사장), 박춘금(일본 국회의원), 김대우(경북도자시), 윤덕영(귀족원 의원) 등이다. 따라서 ‘창씨개명=친일파’의 등식은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


■이광수의 궤변, ‘일제 시대를 산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  

해방후 이광수는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법’이 자신을 옥죄어오던 1948년 12월 변명서인 <나의 고백>을 썼다.

이광수는 이 책의 집필이유를 이른바 “‘여수 순천 군인 반란 사건’ 이후 직면한 민족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라 했다. 자신을 겨냥한 ‘친일파 단죄’보다는 반공체제 확립에 나서야 한다는 이른바 ‘색깔론’을 제기한 것이다. 이광수는 이 책의 ‘친일파의 변’에서 그 악명높은 ‘친일공범론’을 개진했다.

"40년 일정 밑에서 일본에 협력한 자, 아니한 자를 가리고 협력한 자 중에서도 참으로 협력한 자, 할 수 없어서 한 자를 가린다고 하면 그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더 엄격하게 말하면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것도 협력이다…”

일제강점기에 숨이 붙어있던 조선인은 모두 ‘친일파’라는 것이었다, 이광수는 그러면서 더욱 기막힌 주장을 편다. 이른바 ’홍제원 목욕’이다. 무슨 말인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끌려가 정조를 잃고 살다가 귀국한 여인들이 홍제원에 마련된 목욕장에서 몸을 씻으면 ‘정조의 유무’를 묻지 않았다는 일화이다. 이광수는 “조선인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모두 친일행위를 했으므로 ‘친일공범’인 민족 전체를 단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반민법이 분열을 불렀다”

그러나 이것은 기막힌 궤변이었다. 당시 친일파 처단을 위한 제헌국회의 반민처벌법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특별법은 치열한 논쟁 끝에 친일파·민족반역자의 범주를 ‘악질’ 행위자로 엄격하게 제한했다. 처벌법은 그야말로 ‘일왕이 일본을 개국한 산 이름인 향산에서 성을 따고, 일본 남자의 상징인 랑(郞)을 이름에 붙인 향산광랑의 단죄에 안성맞춤인 법이었다.

이광수, 즉 향산광랑의 한마디 말이 억장을 무너뜨린다. “반민처벌법은 미·소의 대립과, 국토와 민족 분단을 극복할 해결책이 민족의 인화임에도 반민처벌법으로 민중의 골수를 끊는 분열이 생겼다”고 했다.  

어쩌면 그렇게 “해방 후 반민특위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것을 모두 기억하실 것”이라고 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발언과 흡사한지 모르겠다. 

이광수는 반민특위에 의해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지만 한달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다시 5개월만에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친일 행위가 피동적이었고, 친일행위보다 이광수의 공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세력의 집요한 방해책동 때문이었다. 반민특위가 1년도 안되어 와해됐다. 겨우 사법적인 단죄를 모면한 이광수는 고개를 빳빳히 들었다. 

“나는 명리(名利)를 위한 민족 반역을 하지 않았으며, 민족을 위해 살고 민족을 위해 죽은 이광수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광수에 대한 역사의 단죄는 영영 계속될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창씨개명-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 정선태 옮김, 산처럼, 2008

구광모, ‘창씨개명 정책과 조선인의 대응’, <국제정치학논총> 45권 4호, 국제정치학회, 2005

최재성, ‘창씨개명과 친일 조선인의 협력’, <한국독립운동사연구>37권 37호,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0

이승희. ‘배우 신불출, 웃음의 정치’, <한국극예술연구> 33권 33호, 한국극예술학회, 2011

허종, ‘해방후 이광수의 친일문제 인식과 빈민특위 처리과정’, <대구사학> 119집, 대구사학회, 2015 

이성무, ‘한구그이 성씨와 족보’, <한국계보연구>, 1, 한국계보연구회, 2010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책보세, 2011

         <증언 반민특위-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 삼인, 1999 

김동호, ‘일제하 창씨개명’, <친일파 그 인간과 논리>, 학민사, 1990

강준만, <한국근대사 산책> 10권, 인물과사상사, 2008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