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싶어하는 본능은 어찌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고생대인 2억5000만년전에 생성되어 온갖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 석주, 베이컨시트와 동굴진주. 석화, 동굴산호, 동굴방패 등을 자랑함으로써 ‘지하 금강’이라는 별명을 얻은 경북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에도 ‘다 다녀가오!’하는 낙서가 한 둘이 아니다. 역사·고고학적인 가치를 지닌 낙서, 즉 옥석을 가리기도 힘들 정도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신라와 조선시대 명문을 확인한 바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의 심현용 학예연구사가 조선시대 명문을 발견해서 보고한 바 있고, 2015년에는 박홍국 위덕대 박물관장이 굴 입구 바로 위쪽 석회암 바위면에서 신라 진흥왕 4년(서기 543년) 3월8일 신라 축부 대나마(丑付 大奈麻·신라시대 17관등 중의 10번째에 해당하는 왕경 관리)가 성류굴에 들렀다가 남긴 낙서를 확인한 바 있다.   

성류굴 조사 때 동굴안을 비추던 한줄기 작은 빛줄기. 500원짜리 동전 같았다. 답사중이던 심현용씨는 그 한줄기 빛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심현용씨 제공


■한줄기 빛너머에서 보이는 글자들

지난해 12월18일 성류굴 종합정비계획수립을 위한 연구용역을 맡은 한국동굴연구소 이종희 연구실장과 김련 부소장이 업무협의차 찾아와 심현용 학예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때 심현용 학예사가 ‘조선시대 명문의 존재’를 이야기해주었다. 동굴의 복원과 일반 개방을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상황이다. 정비용역을 맡은 한국동굴연구소 연구원들이 “한번 같이 가자”고 관심을 보였다.   

 그로부터 3개월여가 지난 3월21일 심현용 학예사와 한국동굴연구소 이종희 실장이 ‘조선시대 명문이 존재한다’는 성류굴의 제8광장을 찾아갔다. 심현용 학예사는 그동안 자신이 찾아낸 낙서를 열심히 설명했다. 낙서에는 10여명의 이름과 함께, 1740년(영조 16년) 기록한 시기가 적혀 있었다. 그외에도 여러 낙서가 있었지만 더이상의 판독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와중에도 한줄기 빛이 동굴안을 비췄다. 

그 빛은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했다. 심현용 학예사는 “저렇게 작은 빛이 어디서 들어오는 거냐”고 신기해 했다. 

동굴전문가 이종희씨는 “각도가 달라서 보이지 않아 그렇지 한줄기 빛을 비친 저곳에 가보면 출입구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과연 심현용씨가 가보니 출입구가 있었다. |심현용씨 제공

그런데 성류굴의 구조를 꿰뚫어 보는 이종희 실장은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보면 500원짜리 동전 같지만 가보면 한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또하나 있어요.”

심현용 학예사가 가보지 않았던 각도에 출입구가 또 있다는 것이었다. 심현용 학예사 입장에서는 ‘비밀의 통로’였던 셈이다. “그래요. 그럼 가봅시다.”

호기심 본능이 발휘됐다. 두 사람은 500원짜리 빛이 비치던 ‘비밀의 통로’로 가보았다. 발을 헛디디면 미끄러질만한, 다소 위험한 통로였다. 입구를 지나 5m쯤 갔을까. 심현용 학예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과연 심현용씨는 한줄기 빛을 낸 동굴의 출입구 인근에서 신라~통일신라 시대 낙서를 다수 확인했다.|심현용씨 제공

동굴 안 석주와 석순, 그리고 동굴벽면에서 다수의 글자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허겁지겁 글자를 판독하기 시작했다. 역사고고학적인 가치를 지닌 글자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심현용 학예사는 ‘정원(貞元) 14년’ 명문 낙서 2개를 찾아냈다. 이종희 실장도 정확한 판독은 안되지만 ‘△△14년’ 글자를 보았다. 

숨이 멎는듯 했다. ‘정원 14년’이라면 시기를 알 수 있는 연호가 아닌가.

심현용 학예사는 가슴이 뛰었다.

“밖에 나가면 내 차에 연호를 알 수 있는 ‘동양연표’가 있어요. 확인해봅시다.”

정신을 가다듬은 두 사람은 다른 낙서를 찾기 시작했다. ‘~랑(郞)’자와 ‘~소(牛)’자 등도 보였다. 순간 신라 화랑들의 이름인 것 같았다. ‘장천(長川)’이라는 단어도 나왔다. ‘장천’은 고려 말 문인 학자인 이곡(1298~1351)의 기행문인 <동유기>에서 처음 보이는 용어이다. 그동안에는 ‘긴 하천’으로 해석해 왔었다. 그러나 지금 ‘장천(長川)’명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울진에 있는 하천인 ‘왕피천’의 옛 이름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비밀동굴의 바위 틈에서는 완전히 탄 숯조각도 발견됐다. 옛 사람들이 동굴에 들어와 피운 불의 흔적이었다. 

심현용씨와 이종희씨가 성류굴에서 찾아낸 통일신라시대 명문. ‘정원 14년 무인 8월 25일 범렴행(貞元十四年戊寅八月卄五日梵廉行)’이다. 즉 ‘서기 798년(신라 원성왕 14년) 8월25일 (승려) 범렴이 왔다간다’는 낙서이다. |문화재청 제공


■789년 8월25일 성류굴을 찾은 단체관광객은 누구?

이 정도로 낙서를 조사한 두 사람은 일단 동굴 밖으로 나와 심현용의 차에 있던 ‘동양연표’를 들춰보았다.

“아! ‘정원’이라는 연호는 바로 중국 당나라 9대 황제 덕종의 연호(정원·785~805)였습니다. 따라서 동굴 방문 시기는 ‘정원 14년’, 즉 서기 798년(신라 원성왕 14년)이었던게 분명해진거죠.”(심현용 학예사)

심현용 학예사는 즉시 대학원 스승인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와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발견소식을 알렸다. 마침 함께 있었던 주보돈·노중국, 두 교수는 통일신라시대 명문의 발견 소식에 깜짝 놀랐다.

이후 제대로 판독된 동굴안 낙서들은 흥미진진했다.

‘정원 14년’ 낙서는 3종류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정원십사년 무인팔월이십오일 범렴행(貞元十四年  戊寅八月卄五日 梵廉行·정원 14년 8월 25일 범렴이 왔다 간다)’는 내용이었다. 또다른 ‘정원 14년’ 낙서는 ‘정원14년 물(勿·?) 차(次·?)’ 등으로 읽힌다. 마지막 ‘정원 14년’ 낙서는 “정원 14년8월25일 청충향달(또는 청충과 향달)이 왔다간다.(行/貞元十四年八月卄五日淸忠向達)”는 내용을 담았다. 여기서 범렴은 승려 이름일 가능성이 짙다. 

명문 중에는 ‘정원 14년 8월 25일 청충향달(貞元十四年八月卄五日淸忠向達)’이라는 낙서도 보인다.|문화재청 제공


■화랑들의 워크샵 장소

낙서 중에는 화랑 이름인 듯한 ‘공랑(共郞)’과 ‘임랑(林郞)’, ‘신양랑(伸陽郞)’ 등이보였다. 

“신유년에 재석산, 본공랑, 차벌산, 득세, 산심산이 와서 보았다.(山.信/辛酉年見在石山本/共郞叉伐山/得世/)”

“양진 10량(또는 양진과 십량), 임랑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보았다. 소 한필(良.十刃 林郞訓見/牛十一匹/.”

“신(혹은 중)양랑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보았다. 선산녀, 범렴(伸(또는 仲)陽郞訓見 善山女(또는 文)/梵廉/)”

낙서 중에 나오는 량(良)은 25명으로 이뤄진 편제단위인 대(隊)를 일컫는다. 이로 미루어 성류굴은 화랑이나 승려 등이 찾아오는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수련장소로도 활용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낙서 중에는 ‘신유년(辛酉年)’과 ‘경진년(庚辰年)’명 등의 간지(干支)가 보인다. 

앞서 인용한 ‘신유년…공랑’ 낙서가 그렇고, ‘경진6월일 …하는 자는 왕과 10인이다.(庚辰六月日…者王十人)’라는 낙서가 그렇다. 그런데 ‘신유년’명과 ‘경진년’과 같은 간지 연대 명문은 국보 제147호 ‘울산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을사년(서기 525년·신라)’명과 비슷한 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근거인가. <삼국사기> 등을 토대로 보면 강원도 지역은 늦어도 4세기말이면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395년(내물왕 40년)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군사를 보내 실직들(삼척의 들판)에서 그들을 대파했다.”는 기록과 “397년(내물 이사금 42년) 북쪽 변경 하슬라(강릉)에서 가뭄이 들도 메뚜기떼가 나타나~그 지방 죄수들을 방면하고 1년간 세금을 면제해주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따라서 울진 성류굴의 ‘신유년’과 ‘경진년’ 상한연대는 4세기 말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하한연대는 어떨까. 신라의 경우 675년(신라 문무왕 15년)부터 중국연호를 쓰기 시작한다. 신라가 간지를 마지막으로 쓴 것은 689년(신문왕 9년)의 일이다. 

“신유년에 재석산, 본공랑, 차벌산, 득세, 산심산이 와서 보았다.(山.信/辛酉年見在石山本/共郞叉伐山/得世/)”는 내용의 낙서. 화랑 이름인 공랑이 보인다.|문화재청 제공

또한 성류굴에서 보이는 ‘신유년’ 낙서에는 ‘공랑’이라는 화랑이름이 보인다. 화랑제도는 진흥왕 시대(540~562)에 설치됐다. 따라서 ‘신유년’ 낙서는 화랑제도가 설치된 진흥왕 시대 이전일 수 없다. 그러니 541년이나 601년, 661년 중에 어느 시점일 것이다.

‘경진년’ 역시 신라가 중국 연호를 쓰기 시작한 675년 이전(늦어도 689년)의 어느 ‘경진년’일 것이다. 중국연호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류굴의 ‘경진년’ 낙서에는 ‘왕(王)’이 뒤따른다. 그런데 신라 금석문에서 왕(王)자가 처음 확인된 것은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이다. 또 신라에서 왕이라는 호칭이 처음 붙은 것 자체가 503년(지증왕 4년)이었다. 신라는 거서간(1대 박혁거세)-차차웅(2대 남해왕)-이사금(3대 유리왕~16개 흘해왕)-마립간(17대 내물왕~22대 지증왕)이라 했다가 503년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꿨다.(<삼국사기> ‘지증마립간’)

따라서 성류굴 ‘경진년…왕’ 낙서는 560년, 620년, 680년 중 하나로 좁힐 수 있다. 이밖에도 통일신라 시대 관직명인 ‘병부사(兵府史)’가 보이고 조선 시대 울진 현령인 ‘이복연(李復淵)’ 등이 보였다.


‘경진6월일 …하는 자는 왕과 10인이다(庚辰六月日…者王十人)’라는 명문이 보인다.|문화재청 제공

■울진 천전리 각석의 낙서들

어디 성류굴 뿐일까. 울산 울주군 천전리의 강가 절벽에도 조선의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열고 그 기념으로 새긴 한시와, ‘나 여기 다녀갔소’를 알린 사람의 낙서, 그리고 학과 같은 그림들이 남아있었다.

특히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발견된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에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알듯 모를듯한 그림과 함께 신라 화랑들의 낙서가 어우져있다. 선사인들은 기하학 문양과 각종 동물상을 바위면에 새겼는데 기하학 문양은 마름모꼴무늬·굽은무늬·둥근무늬·우렁무늬·십자무늬·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좌·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보다 곡선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다. 

새겨진 동물 가운데는 사슴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새 등이 있었다. 특히 상부에는 도안화한 얼굴의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곡식이삭이나 풀뿌리·꽃봉오리를 나타낸 한 문양도 있었다.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신라시대 낙서. 525년 갈문왕과 누이이자 벗인 어사추여랑이 다녀갔고, 12년 뒤에는 갈문왕의 부인인 지소부인이 죽은 남편을 기억하며 찾아왔다는 기록을 남겼다. 지소부인은 갈문왕의 옛 연인인 어사추여랑이 아니다

이들 선사시대 사람들의 그림 위에 신라 화랑들의 낙서가 새겨져 있다. 유독 ‘랑(郞)’자가 많아 보였는데, 문첨랑, 영랑, 법민랑 등은 화랑 이름이 분명했다. 그중 법민랑은 삼국을 통일한 김법민, 즉 문무왕(재위 661~681)의 화랑시절 이름이다. 화랑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두 문장이 흥미로웠다.

“을사년(525년)에 갈문왕이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도 이름이 없었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계곡을 ‘서석곡’이라 하고 글자를 새기게 했다. 함께 온 벗은 누이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이다.”

“정사년(537년)에 갈문왕이 죽었다. 그 비 지소부인이 갈문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기미년 7월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법흥왕비)와 사부지왕자(갈문왕의 아들)가 함께 왔다.”

명문 내용은 예사롭지 않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다. 그런데 누이인 어사추여랑과 연인관계였다. 둘은 537년 천전리 계곡을 찾아 사랑을 약속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갈문왕은 어사추여랑과 백년가약을 맺지 못한다. 갈문왕은 형님의 딸(법흥왕의 딸)이자 조카인 지소부인과 혼인한다. 그런데 갈문왕은 왕위를 잇지못한채 537년 죽고 만다. 갈문왕의 부인은 죽은 남편을 기리며 생전에 남편이 어사추여랑과 천전리 계곡을 찾아와 새겨놓은 명문을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결국 성류굴이나 천전리 각석을 보면 낙서의 역사가 어지간히 뿌리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부터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화랑과 승려, 관리부터 조선시대 문인 지방관 할 것없이 감출 수 없는 낙서본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낙서하는 인류’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