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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설총보다 100년 앞선 '이두의 시작' 무술오작비…여승이 지휘한 공사기록이었다

‘이두(吏讀)의 공식적인 시작은 578년 세운 무술오작비다.’ 지난 18일 열린 한국기술교육대 정재영·최강선 교수팀이 주도한 ‘무술오작비’의 3D스캔 판독회에서는 연대(무술년·578년·진지왕 3년)가 확실한 무술오작비를 사실상 완전히 판독하는 성과를 얻었다. 

무술오작비의 글 중 붉은 원 안이 이두를 쓴 부분이다. 1행의 ‘차성재(此成在)’와 2행의 ‘인자(人者)’, 3행과 6행에 나타나는  ‘곰’과 ‘등’, 1행과 8행에 등장하는 ‘지(之)’와 8행의 ‘여(如) 등이 이두 표기이다. |정재영·최강선 교수 제공

■첨단기법으로 완전 판독된 무술오작비

인문·공학의 학제간 융합으로 3D스캔 판독을 진행해온 정재영·최강선 교수팀은 “몇 자는 아직 판정하지는 못했지만 문맥상으로는 뜻이 완벽하게 통한다”고 밝혔다. 모두 12명의 전문가들이 모인 판독회에서는 신라시대 기술직인 ‘공척(工尺)’과 사척간(관등명), 그리고 한자의 약체자(구결자)으로 표기한 ‘~곰(이·하여 곰)’, ‘內잡곰’, 또 ‘이것을 만든’의 의미로 쓴 이두 표기인 ‘차작(此作)’ 등 그동안 헷갈렸던 글자들을 확정했다. 정재영 교수는 “이제 해독 안된 몇자는 3~4자에 불과하다”면서 “이 단어까지 조만간 읽어낼 것”이라고 밝혔다. 정재영·최강선 교수팀은 28일 서울 서초동 양지원에서 열릴 구결학회 학술회의에서 판독문(‘무술오작비 3D 스캔판독’)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기술교육대 연구팀이 개발한 3D 판독기술은 3차원 데이터 새김 추출 기법이다. 최강선 교수는 “3D스캔으로 비석 표면에 인공적으로 새긴 획과 자연적인 흠의 깊이를 측정한 뒤 유의미한(인공적인) 획만 남기고 무의미한 흠은 없앤 뒤 판독하는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다양한 새김추출기법으로 자연적인 흠을 제거하고 인공적으로 새긴 흔적을 3차원 스캔에 표시한 사진들이다. |정재영·최강선 교수 제공

판독회에 참석한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육안으로 비석을 읽었기 때문에 논란이 많았던 비석해독에 첨단기법을 도입해서 읽어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면서 “첨단기법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 만큼 각각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3D스캔을 동원한 이번 판독은 그동안 논란을 빚은 무술오작비의 해석을 사실상 마무리짓은 작업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가장 오래된 이두표기 

이번 판독에 따르면 ‘무술오작비’는 무술년인 578년(진지왕 3년) 11월 초하루부터 14일까지 영동리촌의 차지(且只)라는 이름의 저수지(塢·혹은 둑)을 짓고 공사내역을 기록한 비석이다. 

‘차지 저수지(혹은 둑)을 이룬(만든) 사람들은 도유나 보장 사척간(관직명)과 도유나 혜장 아니(阿尼)이고, 대공척(최고위 기술관직) 구리지촌의 일리도혜와 공척(기술관직) 상두곰리혜… 이조지 피일 등이다. 이 저수지의 원래 넓이는 폭 20보, 높이는 5보4척, 길이는 50보이다. 저수지 건설에 동원된 수는 공부(功夫) 312명이다. 13일 간에 일을 다 마쳤다. 이 비문을 작성한 사람은 일리혜 일척이다.’

정재영 교수는 “무엇보다 이 ‘무술오작비’에는 신라가 578년 무렵이면 이미 완전한 형태의 이두문을 사용했음을 보여준 글자가 있다”면서 “이것은 연도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이두문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3D스캔으로 얻은 자료를 다양한 기법으로 인공적인 새김과 자연적인 흠집을 구별한 뒤 흠집을 제거하고 얻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 |정재영·최강선 교수 제공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첫 행에 등장하는 ‘~차성재(此成在)’ 부분이다. 만약 한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성차(成此)’라 했을 것을 우리말 순서로 ‘차성(此成)’, 즉 ‘그것을 이루다’라 했다. 이것도 이두의 초기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성’에 다시 ‘재(在)’자를 더 붙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말과 중국어가 다른 점이다. 우리말은 ‘~다’ 앞에 여러가지 선행어미가 붙을 수 있다. 예컨대 ‘~을 보다’의 경우 ‘보시었다’ ‘보았다’ ‘보시겠다’ 등으로 여러가지 어미를 붙일 수 있다. 그것을 ‘이룬~’이라고 할 때도 한자의 경우엔 ‘성차(成此)’라고 하면 끝이지만 우리 표현은 순서를 바꿔 “차성(此成)으로 한 것도 모자라 ‘재(在)’자를 더 붙였다. 

판독 때 사용한 다양한 처리영상들. 자(者)자를 읽는 과정을 설명해준다. |정재영·최강선 교수 제공 

‘재’자는 고대 국어에서 ‘~겨~’로 읽히며 ‘완료 또는 완료지속’을 의미한다. ‘성(成)’은 고대 국어에서 ‘일우다’는 타동사이다. 따라서 무술오작비의 ‘성재’는 ‘일우견’으로 판독 할 수 있으며, 그 뜻은 ‘이 저수지(둑)을 이루었던(이룬·과거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때문에 ‘무술오작비’의 ‘차성재(此成在))’는 ‘이것(저수지)을 이룬(건설한)~’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서 ‘성재’는 ‘이룬’ 혹은 ‘이루었던~’이라는 완료 혹은 완료지속의 의미로 쓰였다.

3D스캔으로 읽어낸 무술오작비의 판독문 윗부분. 모호했던 글자들을 첨단기법으로 확정했다. |정재영 교수 제공

■곳곳에서 보이는 이두·구결자의 흔적

또한 ‘인자(人者)’의 ‘자(者)’와 ‘수자(數者)’의 ‘자(者)’는 주제 보조사인 ‘~은(는)’의 이두로 쓰였다. 따라서 ‘인자’는 ‘사람은~’, ‘수자’는 ‘수는~’ 등으로 읽는다. 또 문장 종결어미인 ‘~다’를 표기하는 데도 ‘지(之)’와 ‘여(如)’를 함께 쓰고 있다. 1행의 ‘작기지(作記之·만들고 쓴다)’와 8행의 ‘요작사지(了作事之·일을 마쳤다)’ ‘공부여(功夫如·공부다)’ 등이 그것이다. 정재영 교수는 또 비문 속 간간이 등장하는 여백에도 주목했다. 정교수는 “예컨대 문장을 구분하거나 의미 내용이 달라질 경우 빈칸 또는 여백을 두어 문장이나 의미 단락 등을 구분하고 있다”고 말했다. 

3D스캔으로 읽어낸 판독문 아랫부분. 완벽한 형태의 이두문이 보인다.|정재영 교수 제공 

예컨대 비문의 첫 문장인 “무술년 11월 초하루(戊戌年 十一月 朔 十四日) 영동리촌의 차지라는 저수지(둑)을 짓고 기록한다(령冬里村 且只 塢 作記之)”는 어순이 한문이 아니고 우리말 어순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정교수는 “그런데 ‘지(之)’ 자 다음의 빈칸은 문장이 여기서 끝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 띄어쓰기 혹은 공란”이라고 해석했다.  

‘무술오작비’에서 또 주목할 것은 한자의 생획자(省劃字·한자 약체자)로 만들어진 구결자(한문 문장을 읽기 편하게 구두점을 찍을 곳에 붙이던 약호) 등장하는 자료이다. 즉 ‘~곰 혹은 ~금’으로 쓰인 이자와 ‘등’으로 쓰인 한자 음이 있다. 이때는 한자의 음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이두와 혼용되지만 나중에는 구결자로 활발하게 쓰인다.

 

재정리해본 판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지 저수지(혹은 둑)을 이룬(만든) 사람들은 도유나 보장 사척간(관직명)과 도유나 혜장 아니(阿尼)이고, 대공척(최고위 기술관직) 구리지촌의 일리도혜와 공척(기술관직) 상두곰리혜… 이조지 피일 등이다. 이 저수지의 원래 넓이는 폭 20보, 높이는 5보4척, 길이는 50보이다. 저수지 건설에 동원된 수는 공부(功夫) 312명이다. 13일 간에 일을 다 마쳤다. 이 비문을 작성한 사람은 일리혜 일척이다.|정재영 교수 제공

■설총은 이두의 창제자인가 

지금까지 이두는 원효대사(617~686)의 아들이자 통일 신라시대의 대문장가인 설총(655~?)가 창제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최근까지 출토·발견된 역사·고고학 자료들은 이두문의 초기 형식이 6~7세기대에 이미 유행한 것임을 웅변해주었다. 예컨대 ‘임신서기석’(612년 설이 유력)과 ‘남산 신성비’(591년?), 월성해자 149호 목간(586년)과 함안 성산산성 목간(560~590년) 등에서도 한자를 국어의 어순으로 배열하는 등 이두의 형태가 등장한다. 

비석이 땅 속에 파묻힌 부분에는 연습한 것으로 보이는 글자가 읽힌다. |정재영·최강선 교수 제공 

그러나 이런 유물들은 연대가 확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술오작비’(578년)보다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확인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이두의 사례가 바로 ‘무술오작비’”라고 평했고,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무술오작비’야말로 ‘이두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설총은 어떤 역할을 한 것인가. 이해를 돕기 위해 1444년(세종 26년) 2월 20일 세종(재위 1418~1450)과 최만리( ?~1445)간 벌어진 훈민정음 창제논쟁을 인용해본다. 

“설총의 이두는 중국 글자를 빌려서 사용했고…이두로도 천년 이상 다 통했는데 왜 굳이….”(최만리) 

“설총이 이두를 만든 본뜻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었다. 너희들은 설총은 옳다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거냐.”(세종) 

이 역사적인 논쟁에서 세종이 “설총이 이두를 만든 이유와 과인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최만리를 맹공한 대목이 특히 눈에 띈다. 

강수(?~692)·최치원(857~?)과 함께 신라 ‘삼문장(三文章)’ 중 한사람으로 일컬어진 설총은 세종과 최만리의 논쟁에도 나오듯이 이두를 창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두란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기록하던 표기법을 일컫는다. <삼국사기> ‘열전 설총’은 “방언(이두)으로 구경(九經·유교의 9가지 경전)을 풀이하여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기록했으니 ‘이두의 창제자’ 소리를 들은 것이다. 

‘무술오작비’가 발견된 곳. 하일식 연세대 교수가 답사해서 찾았다. |하일식 교수의 논문에서

그러나 전국에서 발굴되는 고고학 및 역사자료는 7~8세기 설총의 시대(655~?)보다 적어도 100년 이상 앞선 시기부터 초기 형태의 이두문이 유행했음을 말해준다. 글을 읽을 때의 토는 불가에서 먼저 발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설총 역시 아버지인 원효대사(617~686)의 영향으로 불경을 접했고, 또 일반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이두와 토에 대해서도 알고 유가경전 읽기에 도입했을 것이다. 

‘무술오작비’의 맨끝에는 완벽한 이두 문체를 구사한 지은이(일리혜 일척)가 등장한다. 일척(一尺)은 외위, 즉 지방 관등 중 9등급인데, 이런 관직의 인물이 이 정도의 이두문을 작성했다면 당시 이두문의 수준이 엄청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설총은 이두를 창제했다기 보다는 집대성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무술오작비의 건립연대는 578년 확정

‘무술오작비’는 1946년 우연히 발견됐다. 대구사범대에 재직중이던 금석학자·한학자 임창순(1914~1999)이 대구 시내 대안동의 서찬균씨 집을 지나다가 서있는 명문비석을 본 것이다. 서태균은 해방 후에 적산가옥(일본인의 집)을 사서 수리하던 중 부엌 근방에서 발견되 비석을 집앞에 세워놓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술오작비’의 건립연대를 두고 예전에는 578년설과 518년설, 638년설 등 여러 설이 나왔다. 그러나 요즘엔 ‘578년’이 정설로 굳어졌다. 하일식 연세대 교수는 “비문에 등장하는 일척·일벌 등의 지방관등은 638년 무렵이면 사라진다”면서 “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게 527년(법흥왕 14년)이므로 무술오작비에서 보이는 ‘도유나’라는 승직이 존재할 수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638년과 518년설보다 578년설이 유력하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공주 주미자시에서 확인된 명문석편에서 보이는 '아니'. ‘아니 인소랑(阿尼仁召娘)’과 ‘아니 정나랑(阿尼正拏娘)’ 등의 글자가 보인다

■비구니 아니(阿尼)의 정체 

비문 가운데 저수지(둑) 축조를 주도한 이들이 ‘도유나라’는 관청에 속한 승려 두 사람(보장 사척간과 혜장 아니)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정사인 <삼국사기> ‘직관’조를 보면 ‘도유나’는 진흥왕(재위 546~576) 연간에 만든 불교 담당 관직이다. 불교의 모든 문제를 관장하고 처리하기 위해 임명된 관리(승관)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보장 사척간’과 ‘혜장 아니’는 578년 무렵 모든 불교 문제를 관장하는 두 사람의 중앙직 승관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중 ‘혜장 아니(阿尼)’가 ‘무술오작비’의 또다른 포인트다. 바로 이 ‘아니’라는 단어가 여자승려, 즉 비구니이거나 적어도 여성을 가리키는 명사일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삼국사기>가 ‘도유나’ 중 ‘도유나랑(都唯那娘)’을 콕 찝어 “‘랑(娘)’자를 붙인 ‘도유나랑’은 1명이며, 아니(阿尼)라 한다”(‘직관’조)고 분명히 밝혔다는 점이다. 아닌게 아니라 공주 주미사지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명문 석편에도 ‘아니 인소랑(阿尼仁召娘)’과 ‘아니 정나랑(阿尼正拏娘)’ 등의 글자가 보인다. 

1103년(고려 숙종 8년)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손목이 편찬한 <계림유사>는 “고려에서는 스님을 ‘복전’, 비구니를 ‘아니’라 한다(僧曰福田 尼曰阿尼)”고 기록했다. 지금으로부터 1450여 년 전인 6세기 신라에서 여성 승려, 즉 비구니에게 관직을 주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만약 영동리촌에 ‘차지’라는 저수지를 조성하는 총책임자 중 한 사람이 ‘도유나 혜장 아니(阿尼)’라는 비구니라면 당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불교계 내부의 위상 등을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3D 스캔으로 읽어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예.

■‘아니’는 신라조정이 파견한 공사책임자

그렇다면 왜 중앙 관직(도유나)까지 받은 남녀 승려가 지방의 저수지 축조를 관장했을까. ‘무술오작비’에 등장하는 ‘영동리촌’이 어디인지는 아직 모른다. 비문에는 지방관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저수지가 건설되는 마을에 왜 뜬금없이 비구니를 포함한 승려가 공사를 관장하는 관리로 파견되었을까.

하일식 교수는 “왕실이나 귀족이 특정 사찰에 토지를 기부한 뒤 그 토지 주변에서 저수지를 축조할 경우 인력동원을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개입이 필요했을 것”이라면서 “중앙 승관직인 도유나 소속 남녀 승려가 공사관장의 명령을 받고 내려왔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번에 비문판독을 주도한 정재영 교수는 “무술오작비는 우리말 어순으로 표기됐고, 한국어의 문법형태도 표기에 반영한 최고(最古)의 이두문”이라면서 “이두의 토도 잘 표기되어 있으므로 우리나라 이두발달사에서 획기적인 자료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최강선 교수는 “한국기술교육대의 특장을 살릴 수 있는 인문·공학의 학제간 연구였기에 가능했다”면서 “앞으로도 첨단기법을 활용한 금석문 연구에 더욱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정재영·최강선, ‘무술오작비 3D스캔 판독’, 구결학회 발표자료, 2019

하일식, ‘무술오작비 추가조사 및 판독 교정’, <목간과 문자> 3, 한국목간학회, 2009

김창석, ‘공주 주미사지와 아니 명문석편에 관한 고찰’, <목간과문자> 15호, 한국목간학회, 2015

남풍현, ‘신라시대 구결의 재고를 위하여’, <구결연구> 8월8호, 구결학회, 2002

김항수, ‘신라 유학과 설총의 사상‘, <한국사상과 문화> 23권 23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