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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미남자' 헌종과의 사랑 야사로 유명한 경빈 김씨 무덤의 원자리 71년만에 찾았다

창덕궁 인정전의 동남쪽,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 잡은 건물이 있다. 1847년(헌종 13년) 건립된 낙선재이다. 그 낙선재 오른쪽으로 헌종(재위 1834~1848)의 후궁인 경빈 김씨(1837~1907)의 처소인 석복헌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헌종의 할머니·1789~1857)의 거처힌 수강재가 나란히 서있다. 

서삼릉 내 경빈 김씨 무덤. 조선의 손꼽히는 미남자였다는 헌종과의 짧은 사랑으로 알려져 있다. |궁능유적본부 제공  

후궁과 대왕대비의 초소가 나란히 서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후궁인 경빈 김씨가 그만큼 헌종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금석(金石)같은 큰 목소리를 자랑했다’(<헌종실록>)는 조선의 손꼽히는 미남자 헌종과 ‘예쁘고 순진하며 온순 검소했다’(경빈김씨 묘비문)는 경빈 김씨의 사랑이야기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1848년(헌종 14년) 헌종이 경빈 김씨를 위해 특별히 지어준 석복헌(錫福軒)은 ‘복(福·여기서는 왕세자)을 하사(錫)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헌종은 왕비인 효현왕후(1828~1843)이 승하한 뒤 효정왕후(1831~1904)를 계비로 맞이했다(1844년). 그러나 3년간 후사가 없자 새로이 16살의 후궁(경빈 김씨)을 새로 들였고(1847년 6월) 이듬해 특별히 경빈을 위한 거처(석복헌)을 만들어준 것이다. ‘경빈 김씨가 왕비 간택 때 3차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탈락한 여성이었다’는 야사가 있다. 이때 헌종이 부인으로 낙점된 효정왕후보다 김씨를 마음에 두고 있다가 3년 뒤(1847년) 후궁으로 뽑았고, 효정왕후를 소박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효정왕후 간택 때(1844년) 간택단자에는 (경빈) 김씨의 이름이 없다. 야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헌종이 후궁으로 뽑은 이는 경빈 김씨 한사람 뿐이고 그 경빈을 위해 화려한 거처까지 마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빈 김씨가 헌종의 사랑을 받은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헌종이 23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경빈 김씨와의 후사도 없었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경빈 김씨는 궁에서 나와 현재의 안국동 근처에서 살다가 1907년 6월 77세의 생을 마쳤다. 경빈 김씨의 분묘는 지금 경기 고양시 서삼릉에 묻혀 있다. 원래는 ‘휘경원 옛자리’에 묻혀있다가 1949년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지난해 서삼릉내 조선왕실의 집단태실과 무덤현황을 파악한 결과 경기 남양주 휘경원 근처로 추정됐던 경빈 김씨 무덤의 원래 자리가 실은 경기

고양군 숭인면 휘경리(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인 것으로 밝혀냈다. 경빈 김씨 무덤의 원 위치를 71년 동안이나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 헷갈렸을까. 이유가 있었다. 원래 휘경리(동대문구 휘경동)에는 본래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1770~1822)의 무덤이 있었다. 그러다 이 무덤은 1855년(철종 6년)과 1863년(철종 14년) 두 번이나 이장하는 곡절을 겪는다. 1855년에는 인빈 김씨(1555~1613·인조의 할머니)의 무덤인 순강원(남양주 진접면) 근처로 갔다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1863년 다시 지금의 남양주 휘경원으로 재이장한다. 물론 두 번이나 이장했음에도 분묘 이름은 수빈 박씨의 휘호(휘경)를 따라 변함없이 ‘휘경원’이 됐다. 

그런데 1907년 승하하여 고양 휘경리(동대문구 휘경동)에 묻히게 된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무덤을 1949년 현재의 서삼릉 묘역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한다. 무덤을 옮긴 뒤 세운 경빈 김씨의 묘비에 ‘휘경원 구국(舊局·옛자리)에서 옮겨왔다’고 기록해놓은게 착각을 유발한 것이다. 이후 비석을 읽은 이들이 ‘휘경원 옛자리’를 ‘남양주 휘경원’으로 철석같이 믿고 각종 공문서에 그렇게 표기했다. 

이홍주 궁능유적본부 학에연구사는 “애초에 수빈 박씨의 무덤(휘경원)이 두번이나 이장한데다 동대문구 휘경동이 한때 ‘고양시 휘경리’에 속해 있었던 사실을 몰랐기에 헷갈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홍년 사무관은 “이번 조사에서는 또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1530~1559)의 태실 초안지로 추정되던 여러 곳 가운데 한 곳에서 태실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잔존 석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현재 서삼릉 내에는 조선의 국왕·왕자·왕녀 등의 태실 54기와 왕자·왕녀·후궁 등의 분묘 45기가 모인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씨의 태(胎)를 묻은 곳이다. 좋은 땅을 골라 태를 모심(安胎)으로써 아기씨의 건강 뿐 아니라 왕실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조선 왕실만의 독특한 문화다. 

나명하 궁능유적본부장은 “이번에 조사 연구한 결과를 보고서로 제작했다”면서 “조선왕실 태실과 분묘의 초안지(초장지)가 소재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유적을 보호하고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