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의 동남쪽,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 잡은 건물이 있다. 1847년(헌종 13년) 건립된 낙선재이다. 그 낙선재 오른쪽으로 헌종(재위 1834~1848)의 후궁인 경빈 김씨(1837~1907)의 처소인 석복헌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헌종의 할머니·1789~1857)의 거처힌 수강재가 나란히 서있다. 

서삼릉 내 경빈 김씨 무덤. 조선의 손꼽히는 미남자였다는 헌종과의 짧은 사랑으로 알려져 있다. |궁능유적본부 제공  

후궁과 대왕대비의 초소가 나란히 서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후궁인 경빈 김씨가 그만큼 헌종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명랑하며 금석(金石)같은 큰 목소리를 자랑했다’(<헌종실록>)는 조선의 손꼽히는 미남자 헌종과 ‘예쁘고 순진하며 온순 검소했다’(경빈김씨 묘비문)는 경빈 김씨의 사랑이야기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1848년(헌종 14년) 헌종이 경빈 김씨를 위해 특별히 지어준 석복헌(錫福軒)은 ‘복(福·여기서는 왕세자)을 하사(錫)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헌종은 왕비인 효현왕후(1828~1843)이 승하한 뒤 효정왕후(1831~1904)를 계비로 맞이했다(1844년). 그러나 3년간 후사가 없자 새로이 16살의 후궁(경빈 김씨)을 새로 들였고(1847년 6월) 이듬해 특별히 경빈을 위한 거처(석복헌)을 만들어준 것이다. ‘경빈 김씨가 왕비 간택 때 3차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탈락한 여성이었다’는 야사가 있다. 이때 헌종이 부인으로 낙점된 효정왕후보다 김씨를 마음에 두고 있다가 3년 뒤(1847년) 후궁으로 뽑았고, 효정왕후를 소박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효정왕후 간택 때(1844년) 간택단자에는 (경빈) 김씨의 이름이 없다. 야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헌종이 후궁으로 뽑은 이는 경빈 김씨 한사람 뿐이고 그 경빈을 위해 화려한 거처까지 마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빈 김씨가 헌종의 사랑을 받은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헌종이 23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경빈 김씨와의 후사도 없었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경빈 김씨는 궁에서 나와 현재의 안국동 근처에서 살다가 1907년 6월 77세의 생을 마쳤다. 경빈 김씨의 분묘는 지금 경기 고양시 서삼릉에 묻혀 있다. 원래는 ‘휘경원 옛자리’에 묻혀있다가 1949년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지난해 서삼릉내 조선왕실의 집단태실과 무덤현황을 파악한 결과 경기 남양주 휘경원 근처로 추정됐던 경빈 김씨 무덤의 원래 자리가 실은 경기

고양군 숭인면 휘경리(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인 것으로 밝혀냈다. 경빈 김씨 무덤의 원 위치를 71년 동안이나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 헷갈렸을까. 이유가 있었다. 원래 휘경리(동대문구 휘경동)에는 본래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1770~1822)의 무덤이 있었다. 그러다 이 무덤은 1855년(철종 6년)과 1863년(철종 14년) 두 번이나 이장하는 곡절을 겪는다. 1855년에는 인빈 김씨(1555~1613·인조의 할머니)의 무덤인 순강원(남양주 진접면) 근처로 갔다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1863년 다시 지금의 남양주 휘경원으로 재이장한다. 물론 두 번이나 이장했음에도 분묘 이름은 수빈 박씨의 휘호(휘경)를 따라 변함없이 ‘휘경원’이 됐다. 

그런데 1907년 승하하여 고양 휘경리(동대문구 휘경동)에 묻히게 된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무덤을 1949년 현재의 서삼릉 묘역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한다. 무덤을 옮긴 뒤 세운 경빈 김씨의 묘비에 ‘휘경원 구국(舊局·옛자리)에서 옮겨왔다’고 기록해놓은게 착각을 유발한 것이다. 이후 비석을 읽은 이들이 ‘휘경원 옛자리’를 ‘남양주 휘경원’으로 철석같이 믿고 각종 공문서에 그렇게 표기했다. 

이홍주 궁능유적본부 학에연구사는 “애초에 수빈 박씨의 무덤(휘경원)이 두번이나 이장한데다 동대문구 휘경동이 한때 ‘고양시 휘경리’에 속해 있었던 사실을 몰랐기에 헷갈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홍년 사무관은 “이번 조사에서는 또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1530~1559)의 태실 초안지로 추정되던 여러 곳 가운데 한 곳에서 태실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잔존 석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현재 서삼릉 내에는 조선의 국왕·왕자·왕녀 등의 태실 54기와 왕자·왕녀·후궁 등의 분묘 45기가 모인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태어난 아기씨의 태(胎)를 묻은 곳이다. 좋은 땅을 골라 태를 모심(安胎)으로써 아기씨의 건강 뿐 아니라 왕실과 나라의 번영을 기원하는 조선 왕실만의 독특한 문화다. 

나명하 궁능유적본부장은 “이번에 조사 연구한 결과를 보고서로 제작했다”면서 “조선왕실 태실과 분묘의 초안지(초장지)가 소재하고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해당 유적을 보호하고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kimduhan 2020.06.22 12: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태반을 메우려는 습속은 전 세계에 존재하는 문화입니다.중국에도 일본에도 동남 아시아에 있다.예를 들면, 도쿄에도 도쿠가와 장군의 '포의총(胞衣塚)' 이 있다.

  2. Abe 2020.06.22 21: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창덕궁, 창경원, 율곡로, 벚꽃놀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궁궐인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왜구들의 관상용으로 벚꽃을 집단 식수하여 사꾸라 공원으로 훼손 시켰지...

    창덕궁, 창경궁, 종묘 중간에 순종이 그렇게도 반대했지만 길을 뚫어 지맥과 궁궐을 쪼개 버렸지..

    2020년 현재 도로 부분을 지하화하고 궁궐 연결 공사를 하고있고....

    남북으로 나라도 쪼개고, 궁궐도 쪼개버린 왜구들..

    모두 기억할테다...

    • kimduhan 2020.06.22 22:50  댓글주소  수정/삭제

      히메지 시립 동물원은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 문화 유산, 히메지 성 안에 있어요.
      https://tommysdiner.net/2919

      근대 사회로 되고 동물원 등 공공 시설의 개념이 서양에서 왔을 때, 도시 안에 있는 넓은 땅은 과거 시대의 군주의 소유했던 땅 정도밖에 없습니다.
      근대는 특권 계급,일부 지배자가 독점하고 있던 토지를 시민이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풀어 갔습니다.

    • Abe 2020.06.23 06:28  댓글주소  수정/삭제

      간교하고 천박하게 물타기를 시도하는군요...

      왜구왕이 거주하고있는 곳을 동물원으로 만드는데 왜구들은 찬성하는 모양이네...

      히메지성이 왕궁이었나?
      지방 호족의 거처아니었나?
      일반인에게 소유권을 넘기는 정도의 건물 아니었나?

      우리나라의 왕실이 실제 거주하고있던 정궁 가운데로 길을 내 쪼개버리고 그 것도 모자라 사꾸라 공원으로, 동물원으로 강압적으로 개조해버린 간교한 왜구들..... 다시 복원하는 비용을 반드시 왜구에게 청구해야 할 것...

      남의나라 현존 왕실의 거소를 강압적으로 파괴하고
      공공시설의 개념?
      너네 왕이 사는곳 가운데로 길 내고 무궁화 동산 만들고 동물원 만들어 보시요..."시민이 평등하게 이용" 할 수 있도록.

      간악한 왜구의 습성이 근본없는 추악한 잡설을 풀고있군요!!!!

    • kimduhan 2020.06.23 19:38  댓글주소  수정/삭제

      국왕의 궁전에 동물원을 만드는 것은 중국 고대 성왕도 실천하고 있던 덕목인데.


      맹자(孟子)가 양나라 혜왕(梁惠王)을 만났다. 왕이 연못가에 서서, 기러기(鴻雁)와 사슴(麋鹿)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어진 사람(賢者) 역시 이런 것을 즐깁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어진 사람이라야 이런 것을 즐길 수 있지, 어질지 못한 사람은 비록 이런 것이 있더라도 즐기지 못합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영대(靈臺)처음 지으려 하실 때 / 땅을 재고 푯말을 세우시니,
      백성들이 몰려와 일하여 / 며칠 안으로 완성하였도다.
      서두르지 말라고 이르셨건만 / 백성들은 자식처럼 절로 왔도다.
      왕께서 동산(靈囿)을 거닐으시니 / 암사슴은 잠자듯 누워있도다.
      암사슴은 토실토실 살이 지고 / 백조는 헌칠하니 나래를 치도다
      왕께서 못가(靈沼)를 거닐으시니, / 못에 가득하게 물고기가 뛰놀도다’
      고 하였으니,
      문왕(文王)께서 백성의 힘으로 대를 짓고 못을 파고(爲臺爲沼) 했으나 백성들이 기쁘게 여겨 그 대(臺)를 영대(靈臺), 그 못(沼)을 영소(靈沼)라 하여 그곳에 사슴들과 물고기 자라가 있음을 즐겼습니다.
      옛사람들은 백성들과 더불어 즐긴 까닭으로, 능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탕서(湯誓= 상서商書의 편명)’에 이르기를 '이 태양(日= 하夏나라의 걸桀왕)이 언제 없어질고, 내 너와 함께 망하리라'고 했으니, 백성들이 같이 망하자고 하면 비록 대(臺)와 못(池)과 새와 짐승이 있다 한들 어찌 홀로 즐길 수 있겠습니까?”

      孟子見梁惠王。王立於沼上,顧鴻雁麋鹿,曰:「賢者亦樂此乎?」

      孟子對曰:「賢者而後樂此,不賢者雖有此,不樂也。詩云:『經始靈台,經之營之,庶民攻之,不日成之。經始勿亟,庶民子來。王在靈囿,麀鹿攸伏,麀鹿濯濯,白鳥鶴鶴。王在靈沼,於牣魚躍。』文王以民力為台為沼,而民歡樂之,謂其台曰靈台,謂其沼曰靈沼,樂其有麋鹿魚鱉。古之人與民偕樂,故能樂也。湯誓曰:『時日害喪,予及女皆亡。』民欲與之偕亡,雖有台池鳥獸,豈能獨樂哉?」孟子/梁惠王上

      ※영유(靈囿) :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설치한 동물원.


      중국만이 아닌 것입니다.
      유럽 최고의, 즉 세계 최고라고 말하는 동물원인 오스트리아 빈의 쉔부른 동물원도 쉔부른 궁전의 부지 내에 있다.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2세가 동물원을 프라하나 뮌헨의 왕궁에 만든 것도 유명하다.

    • kimduhan 2020.06.23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1504년(연산군 10년) 7월10일 연산군은 세조의 발원으로 효령대군이 세운 원각사의 불상을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공자의 신위를 올려 놓게 했다. 그 절에 있던 승려들을 모두 쫓아내 절은 텅 비었다. 1년 뒤 연산군은 새 명을 내렸다. “1505년 2월21일(정축) 임금이 전교하였다.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로 옮기고 가흥청(假興淸) 200명, 운평(運平) 1000명, 광희 1000명을 여기에 나오게 하여 총률 40명으로 하여금 날마다 가르치게 하라”고 했다.

      장악원은 국립음악기관의 명칭이고, 운평은 여러 고을에서 뽑아올린 음악하는 기녀인 악기(樂妓)였다. 이들 중에서 다시 가려 뽑아 대궐 안으로 들어온 기녀를 흥청(興淸)이라 불렀는데, 흥청망청이란 말의 역사적 기원인 셈이다. 연산군은 원각사에 기녀 1000명, 악사 1000명을 몰아 넣고 질펀한 연희장을 만들었다. 또한 전국 여러 사찰의 비구니를 뽑아 질탕하게 놀았다.
      http://www.segye.com/newsView/20071012000280

    • Abe 2020.06.24 08:33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 이 사기꾼의 글은 다 검증이 필요하지요

      동물원이라는 영어 단어는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Zoo 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쇤브룬의 경우에서 표현된 Menagerie 이다. Zoo는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동물원을 말하며 Menagerie는 가족이나 어떤 특수 집단을 위해 만든 동물원을 말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시민이 평등하게 사용하기위해 만들었다고 사기쳤잖아요,,, 거짓말쟁이 왜구 아저씨 !!

    • kimduhan 2020.06.24 10: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물원은 원래 국왕과 황제의 권위 과시나 자신만의 특권적 취미적 시설이었다.그래서 왕궁 등에 만들어졌다.그러나 근대 국가가 되면"국민"때문에 만들어지게 된다.창경원은 그 양자를 겸비한 것이었습니다.순종 때문이기도 하다, 경성 시민의 탓도 있다.

    • kimduhan 2020.06.24 1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대적 동물원의 시초는 1752년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에 설립된 쇤브룬 동물원이다. 초기의 쇤브룬 동물원은 코끼리, 낙타, 얼룩말 등 다른 대륙에서 데려온 열세 종의 동물을 정원 이곳저곳에 전시해 놓은 구조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 잘 알려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이 동물들을 구경하며 아침 식사를 하곤 했다. 1765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아들인 요제프2세는 쇤브룬 동물원을 일반 시민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진귀한 동물들을 선보임으로써 왕의 권력 내지는 오스트리아의 국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로 동물원은 유럽 곳곳에 생겨났고 1800년대에는 다른 대륙으로까지 확산되었다.
      http://www.gjdream.com/news/articleView.html?idxno=446216

    • kimduhan 2020.06.24 11:02  댓글주소  수정/삭제

      참고로, 도쿄의 우에노 동물원은 도쿠가와 장군의 가문(조선에서는 일본 국왕)의 사당이 있는 간에이 사라는 거대 사원을 부수고, 그 부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 kimduhan 2020.06.24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도 역대 바쿠후의 쇼군을 일본 국왕으로 여겼다. 일본 자신도 그랬다. 조선 전기인 1407년부터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까지 183년간 68회나 조선에 파견된 역대 바쿠후의 일본 사절단은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https://m.sedaily.com/NewsVIew/1KYU4P99MB

    • Abe 2020.06.24 1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오스트리아나 왜구의 이해일뿐...
      그럼 왜 왜왕 거소에는 동물원을 않만들지?

    • kimduhan 2020.06.24 14: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봉건 시대의 군주의 땅이 도쿄에 많이 있었거든.만약 땅이 없었다면 왜왕의 토지를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 Abe 2020.06.24 15:34  댓글주소  수정/삭제

      군주와 영주도 구별 못하는군요...

      왜구들의 피비린내나는 역사는 관심없고,
      왜 우리의 궁궐을 왜구들이 파괴했으며,
      그 죄업을 묻고자 할 따름이지요...

    • kimduhan 2020.06.24 15: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쿠가와 장군의 가문은 군주요.대외적으로는 일본 국왕이니까.

    • Abe 2020.06.24 21:4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럼 만세일계는 사기네요.. 왜왕말고 또 왕이 있었으면... 왕이 대내용 대외용이 있나?

    • kimduhan 2020.06.24 21:53  댓글주소  수정/삭제

      천황가의 가계는 적어도 5세기 이후 1500년 정도는 일계요.그 이전에는 왕조 혈통의 교체가 있었습니다.

    • kimduhan 2020.06.24 21: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동 아시아에서는 국왕이라는 것은 중국 황제의 정신(廷臣)의 계급 칭호이기 때문에 천황은 그것을 받지 않더라구요.5세기의 "大王"(천황의 전신)와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은 중국 황제의 신하로서의 일본 국왕 칭호를 책봉 받았습니다.

    • Abe 2020.06.26 17: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럼 둘 중 하나는 왕이 아닌거네....

    • kimduhan 2020.06.26 18:1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네요.일본은 이중 권력 구조입니다.유럽처럼 황제와 교황이라는 2개의 권력이 존재한 것과 비슷합니다.

    • Abe 2020.06.26 20: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럽이 하나의 국가인가요?
      갑자기 웬 교황과 황제?
      허수아비 왜왕과 칼잡이 두목이 있었다는 얘기지...

    • kimduhan 2020.06.26 21:17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럽의 역사 공부하세요.신성 로마 황제와 교황, 카노사의 굴욕이나.

    • Abe 2020.06.28 09: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가 왜구의 역사는 잘 모르지만 유럽의 역사는 좀 아는데.... 특히 종교사는 많이 아는데...

      그래서 어줍잖게 허수아비 왜왕과 교황을, 칼잡이 폭력단의 수괴와 유럽의 황제를 등치 시키려는 작태를 보고
      코웃음 친건데....

    • kimduhan 2020.06.28 09:58  댓글주소  수정/삭제

      실권은 거의 없지만 종교적 권위와 세속 권력의 임명권을 가짐으로써 이중 권위 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은 바로 유럽의 교황과 황제의 관계와 일본의 천황과 장군의 관계와 같습니다.

    • Abe 2020.06.28 15:52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유럽 언제적 이야기인지?

      차라리 교황과 일왕이 눈과 코의 구멍 숫자가 같고,
      유럽의 황제들과 왜구국의 폭력단 수괴의 입, 귀 구멍의 숫자가 같으니 동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을 듯...

      자뻑도 정도껏해야 조금이라도 속아주지... ㅋㅋㅋ

    • kimduhan 2020.06.28 1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은 여러 모로 수수께끼의 나라입니다. 동양권에 위치하면서 교황과 황제, 봉건영주들로 구성됐던 중세 서양 봉건제를 닮은 천황과 장군(쇼군), 번주(다이묘)로 구성된 막번체제(幕藩體制)가 작동하던 국가였습니다.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110325/35886153/1

    • Abe 2020.06.29 17:29  댓글주소  수정/삭제

      개념설정이 조야해서 인용문을 찾아보니 드라마 평이군요,,, 우리나라와 왜국이 형제국이라는 불온한 목적성도 보이고... 봉건제의 시작과 정통성이 동양인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자의 가벼운 글.....

      교황이 주는 어의적 의미를 근거로하여 왜왕과 등치시키려는 섣부름까지 다분히 유치함 그 자체네요...

      교황, 즉 로마의 대주교, Papa는 교회의 수장이었으며 왜왕은 세속적 통치권을 두고 칼잡이 수괴에게 통치권을 뺏겼다 받았다 왔다리 갔다리 했던 허수아비 군주였을 뿐...

      봉토와 쌍무계약이 존재하던 중세 유럽의 봉건제..... 수괴와 꼬붕 칼잡이가 존재하던 왜국이 같다???

      ㅋㅋㅋ

    • kimduhan 2020.06.29 19: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사를 너무 모르고 어디에서 설명해야 할지 고민 정도입니다.최소한의 기초 지식을 입고 좋겠네요.

    • kimduhan 2020.06.29 20:16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에서는 ‘천황’이라는 명칭을 보면 천황이 일본 절대권력자 같은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사실은 ‘국민의 상징’으로서 권력자보다는 명문가 종가 집안에서 제사를 맨 처음으로 지내는 원로 또는 제사장 같은 것이다.

      로마교황은 천주교 신자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 신자를 중보하는 제사장으로서, 일본 천황은 일본 국가의 대표자로서 백성들의 건강과 안전을 조상님께 기도하는 제사장이다.
      http://www.dailywrn.com/5081

      ◆ 전우용: 제사장, 종교의 제사장과 정치적인 최고 통치자죠. 최고 통치자가 한 사람이 다 했던 거죠. 샤머니즘 단계에서, 정식적으로 고대국가가 제대로 형성되기 전 단계에서는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종교 지도자가 곧 정치 지도자이기도 했었는데. 이른바 고대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제정분리,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이 분리되고, 그러면서 종교권력 자체가 소멸하든가 아니면 별도로 남아있죠, 남게 되죠. 우리가 천황 이렇게 부를 때 일본인들이 천황이라고 하는 이름에서 상상하는 것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이란 이름에서 상상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가톨릭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교황에 대해서는 그냥 그렇게 부르는 데 별 거부감이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일본 내에서도 일본의 대다수, 일본인의 대다수가 신토 신자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으로서의 천황에 대한 숭배의식, 또 존경의식이 남아있고요. 오히려 고대의 한동안,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에 한 150년, 딱 100년 정도 되겠네요. 한 100년 정도가 일본 천황이 세속군주로서의 역할을 겸했던 것이지, 일본 역사 전체 기간에서 보자면 천황은 계속 종교 지도자로서만 남아 있었다. 이렇게 보면 될 것 같습니다.
      https://www.ytn.co.kr/_ln/0101_201910241054463082


      사무라이는 토지 재분배와 정교한 중국 스타일의 제국을 지원하는 의미 무거운 새로운 세금을 포함 AD 646의 다이 카 개신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고도로 숙련 된 전사의 클래스했다. 개혁은 그들의 땅을 팔고 소작농으로 일을 많은 소규모 농민을 강요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간 큰 토지 소유자는 생성, 부와 권력을 축적 봉건제도 의 그것과 유사 중세 유럽 . 자신의 재물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 봉건 영주는 최초의 무사, 또는 고용 “부시를.”
      https://www.greelane.com/ko/%EC%9D%B8%EB%AC%B8%ED%95%99/%EC%97%AD%EC%82%AC%EC%99%80-%EB%AC%B8%ED%99%94/samurai-history-195813/


      중국의 사대부는 관료 예비군적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조선의 사족은 관료뿐 아니라 지역 사회를 운영하는 주체였고, 일본 무사와 유럽의 귀족은 봉건제를 중심으로 영지를 거느린 귀족이었던 데 비해 조선의 사족은 중앙에서 파견한 관료와 협조도 하지만 대립각도 만드는 매우 자유로운 집단이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042301032412047001


      Feudalism in Japan and Europe
      Although Japan and Europe did not have any direct contact with one another during the medieval and early modern periods, they independently developed very similar class systems, known as feudalism.
      https://www.thoughtco.com/feudalism-in-japan-and-europe-195556

    • Abe 2020.06.30 02: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구의 역사를 너무 잘 아는건 아닐까?
      천박한 피의 역사..
      명치왕에게 모든 권력 다넘기고, 덴노 반자이 해놓고 뺑끼 치겠다?
      ㅋㅋㅋ 천박한 왜구들...

    • kimduhan 2020.06.30 09: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메이지 천황인 다이쇼 천황 히로히토 전 천황의 전반의 80년 가까이 일본의 역사에서도 특이한 시대에서 지금은 권위와 종교를 일왕이 정치를 내각이 분담하고, 일본의 전통적 정체에 돌아온 것입니다.한국인은 천황의 종교 제사 왕적 성격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한다.

    • Abe 2020.06.30 11: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웬 듣보잡 매체에 얼뜨기 왜구가 쓴 왜왕 찬양문 일뿐,,, 천주교에서는 하나님이란 표현 않쓰거든요 !

      왜왕이 통치권을 칼잽이들에게 빼았겼다가
      대정봉환 때 상납 받았잖아요... 항복선언도 했고... 2차세계대전의 구심점이었고.... 지금은 내각제라 형식적 왕이고...

      입헌군주제 뜻도 모르나봐요...

    • kimduhan 2020.06.30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본적으로 천황에 행정권은 없었다.고대의 한 시기는 떠나고.있는 것은 벼슬을 내리는 것, 장군을 임명하는 것, 제사를 관장하는 것 등이다.그래서 천황을 "국왕"이라고 하면 위화감이 있습니다.왕이면 행정을 펴겠지만 그런 일은 한 적이 없다.종교적 권위뿐이니까.오히려"왜국의 사제"로 불린다면 납득할 겁니다.

    • kimduhan 2020.06.30 1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세계사에서 봉건제는 세 번 있었다고 한다 중국 주나라의 춘추전국시대와 유럽의 중세 그리고 일본의 전국시대와 뒤이은 토쿠가와의 막번 체제가 그것이다.

      이 세 곳의 봉건제는 그런데 조금씩 다르다 우선 주나라의 봉건제는 통합국가의 성립으로 마감된 반면, 일본의봉건제는 통합 후에도 오히려 봉건제를 지속한다. 그리고 유럽의 봉건제는 통합을 이루지도 못하고 그대로 산업혁명을 맞이하였다.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였을까? 나는 그 원인은 종교의 역할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본다.

      주나라에서는 정치권력에 독립적인 종교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설사 주나라 천자에게 제사장으로서의 종교적 권위가 있었. 하더라도 그것의 유통기한은 춘추시대까지이었다 뒤이은 전국시대는 패도의 시대이었고 진시황은 통일 과정에서 터득한 법가의 정책으로 봉건제를 종식시켰다.

      이에 반해 일본에서는 천황이라는 별도의 권위가 있었. 천황은 기본적으로 정치권력이었으나, 군사적 영향력을 상실한 이후에는 천손의 혈통이라는 신화적 권위로서 형식적 조정을 쿄토에 유지하였다. 유교와 불교 그리고 신도神道가 병존하는 16 세기 일본의 합리주의에서 쇼군은 굳이 천황의 형식적 권위를 종식시킬 필요를가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천황의 형식적 신하인 쇼군의 일본 지배는 위임통치이므로 군현제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https://brunch.co.kr/@zhoyp/44

    • Abe 2020.06.30 13:58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게 왕인거지...

      신권과 왕권은 늘 충돌해왔고 핵심권력인 군사력을 놓고 쌈박질을 해댔지... 우리도 고려시대에 무신의 시대가 있었지 허수아비 왕과 함께... 벼슬을 내리고 장군을 임명하는게 통치행위이지....

      왕이라는 걸 부인해서침략과 살육의 원죄에서 피해가고 싶겠지만,,, 2차세계대전의 개전과 항복 모두 책임을 져야지.....

      미군에 의해서 다시 허수아비로 돌아갔지만...

    • kimduhan 2020.06.30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메이지, 다이쇼, 쇼와 3명의 천황은 일본 육해군 대원수니까,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그러나 결국 연합국은 천황을 면죄했습니다.

    • Abe 2020.07.01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까 말이예요...
      그 엄청난 살륙과 파괴의 책임자와 왜 교황을 비교하나고요....

      정치적 계산에의 한 면죄가 죄 없음이 아니지요......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거지요...

    • kimduhan 2020.07.01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교황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학살, 침략,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는지, 선생님은 설마 알지 않을래?노예제를 추진한 것은 바로 지금의 흑인 문제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도 가담한 점이 비판되고 있습니다.가톨릭 천 수백년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28012

    • Abe 2020.07.02 0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럼 왜왕과 교황 모두 나쁜 놈 할래요?
      주빌리 이어 맞아 대 참회를 한 교황 성하와
      또라이 군국주의 찌거리를 엄호하는왜구 수장과
      동격이라고?

      청동기시대 밥그릇과 현세의 삼성 모바일 폰을 동격 취급하라고?

      치졸한 왜구 같으니라고....
      쯧쯧..

    • kimduhan 2020.07.02 10: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물론 십자군 이후 전 세계를 침략하고 식민지화되어 온 교황의 죄는 불과 수십년 아시아를 침략한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남미를 보아라.각국 모두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말하고 본래의 국어도 이름도 잃었다.문화는 모두 파괴되면서 천주교를 숭배하고 있다.일본이 침략한 아시아에서 지금도 일본어를 말하고 일본 이름을 가지고 신도를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비교가 안 된다.

    • Abe 2020.07.02 20:15  댓글주소  수정/삭제

      포인트를 제대로 보았네요.. 웬일?

      맞아요 어쩌면 교황의 죄과가 일왕과 비슷할 수도
      있지요.. 그런데 왜 전 세계인들은 교황을 압도적으로 더 존경하고 팔로워 전세계 탑오브 탑을 찍을까요?

      왜 커먼웰스 국가들은 아직도 영어를 쓰면서 영국과
      잘 지내는 나라가 다수 일까요?

      왜 예전에 왜구 강점을당했던 나라들은 왜국에 이를 갈고 있을까요?

      답을알면 일본인 모르면 왜구 !

    • kimduhan 2020.07.02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1)천주교 신도는 전 세계 10억명( 지난 세기까지 수백년간 침략 정복의 결과).한편 신도 신자는 일본인 이외에 없습니다.
      (2)영국은 제이차 대전 전승국인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 더 커먼 웰스 국가 공용어는 영어이다.
      영국이 제이차 대전 패전국에서 상임 이사국도 아니고 영어가 아니라 일본어가 세계 공용어라면, 커먼 웰스는 현재와 같은 구성국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Abe 2020.07.04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틀렸어요...역시 왜구이군요...

      글로벌 종교와 지역 민간 신앙의 차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인식의 편차와 추구하는 가치의 열위에서 비롯한 것이고요... 교황과 왜왕은 비교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구태여 존경심의 일반성에 대해 얘기 한다면
      과거 죄업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과의 진정상 차이 이지요....

      교황은 천년전 사건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반면
      왜욍은 ?

      커먼 웰스, 영어, 피식민 국가와의 관계는 아예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고,,,, 답도 전혀 문맥을 구성하지 못할만큼 문장 자체가 않되어 아예 낙제네요..


    • kimduhan 2020.07.04 12:28  댓글주소  수정/삭제

      교황이 천년 전의 일을 뒤늦게 사과했다면 일본의 천황도 앞으로 1000년 만에 사과하지?

    • Abe 2020.07.04 13:47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역시 왜구다운 답변이네요...

      근 현대사의 잘못 뿐만 아니라 거의 잊혀진 아주 오래전의 잘못도 적극적으로 사과를 하니 진정성을 획득한 거지요....

      왜국과 왜왕은 피해자가 생존해 있는 사건도 부정하고 책임 회피하고 있으니 경멸의 대상이 되는거고..

  3. Abe 2020.06.24 01: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ㅋㅋㅋ
    그래요 왜구 아저씨...
    그렇게 좋은거 왜구 왕 거소에 해보세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도 해보시고
    궁궐 쪼개기도 해 보시고..
    동물원 도 많이 사랑해주시고...

    왜왕 거소부터 해보라니까요?
    그렇게 좋은 거......

    살인귀 왜구들이 고매한 가치를 실현하기위해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었다 ?
    왜왕 거소는 천박하고 저열해서 포기한 모양이지?
    이미 살인귀들의 전시장이라 바꿀 필요가 없었나?

    이런 궤변과 왜곡을 일삼으니 왜구들이 정신병자
    취급받는거지...

    천박한 왜구들의 정신세계.... ㅋㅋㅋ

    사꾸라 동산과 궁궐 쪼개기는 아무리 검색해도 궤변 왜곡거리가 없는 모양이지요?..... 천박하고 가증스런 왜구 아자씨?

    • kimduhan 2020.06.24 1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창경원이 그렇게 굴욕다면 왜 1983년까지 서울 시민 5만명이 매년 벚꽃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까?조선 신궁을 해방 후 바로 파괴했듯이 창경원 벚꽃도 바로 베면 좋았을 테지?실제 사람들은 동물원도 벚꽃 구경도 해방 후 40년도 즐기고 있었다.‘36년’보다 오랫동안.

    • Abe 2020.06.24 13: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그토록 오랜시간이 필요한거지.... 지금도 왜구 강점기가 남긴 최대비극인 남북분단으로 고통받고있고...

    • kimduhan 2020.06.24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전근대 군주제 왕조의 궁궐이 왕족만을 위한 것부터 서울 전 시민에게 개방되고 근대적인 도시 생활과 여가를 즐기는 것이 " 잘못된 "일인가?

    • kimduhan 2020.06.24 15:17  댓글주소  수정/삭제

      창경궁에 동물원과 동시에 개설된 일본인이 설계한 식물원은 등록 문화재가 되어 있는데, 언제 파괴하고 철거합니까?

      대온실(大溫室) (등록문화재 제 83호)
      이 이미지는 대온실(식물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1909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다. 대온실은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창덕궁에 인접한 창경궁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었다. 일본인이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가 시공하여 완성하였으며, 철골구조와 목조가 혼합된 구조체를 유리로 둘러싼 서양식 온실이다. 준공 당시에는 열대지방의 관상식물을 비롯한 희귀한 식물을 전시하였다. 1986년 창경궁 복원 이후에는 국내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2004년 등록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다.
      https://cgg.cha.go.kr/agapp/public/html/HtmlPage.do?pg=/cgg/01/virtual_01.jsp&pageNo=79010000&siteCd=CGG

    • Abe 2020.06.24 15: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구 아자씨 !
      이럴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일본인의 한사람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궁궐을 파괴해서 미안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는거고....

      궤변과 잡설로 사실을 호도하니 왜구 소리를 듣는거요...

      군함도 가지고 사기 또 쳤지요 ? 왜구답게...

    • kimduhan 2020.06.24 15:52  댓글주소  수정/삭제

      Abe선생님의 의견이 듣고 싶은데...북한의 김 씨 왕조가 타도당했다며..그들의 궁궐을 파괴하고 시민을 위한 공원을 만드는 것에 찬성하십니까?반대입니까?영원히 궁전을 보존해야 합니까?

    • Abe 2020.06.24 2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실과 논리가 전혀 맞지 않네요...

      먼저 북한엔 왕조나 그들의 거소로 사용되는 궁궐이 없고 세습 독재권력이 존재하고,,,, 조선시대의 정궁인 창덕궁이 왜구 강점기에 궁궐의 주인인 순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에의해 파괴된 점은 왜구들의 패악질이었기에,,,, 북한 지도부가 쓰던 거소의 쓰임새와 창덕궁 파괴는 비교대상이 아님...

      조선총독부 건물 파괴는 당연히 옳은 결정이었고..

    • kimduhan 2020.06.25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북한 세습 왕조의 수도 평양에는 금수산 태양 궁전이라는 묘당이 있지요.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되고 있다.그리고 창경원 설치에 순종이 반대했어?그런 기록은 없습니다.오히려 창경궁 안의 동물원·식물원 구역을 "창경원"라고 개명 추진한 것은 순종 본인이에요.


      그해 4월 11일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뜻밖에도 개명을 주장한 사람은 순종이었다고 한다. ‘궁’이라고 하면 드나드는 백성들이 마음의 부담을 느낄 수 있으니 ‘원(苑)’으로 하여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배려였다.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7041315131283308

    • kimduhan 2020.06.25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창경궁을 훼손하며 궁내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을 조성하여 유원지로 만들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엄밀히 말해 창경궁 내 동물원과 식물원은 한일합방 이전, 아직 공식적으로 대한제국이 한반도를 통치하고 있던 1909년(순종 3년)에 개장했다. 순종황제가 동물원과 식물원 설치에 반대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는 없다. 1909년 11월 1일 개원식에는 순종황제가 주인 자격으로 참석해 내빈을 맞았다.

      창경궁을 비롯한 여러 궁궐들은 원래 이씨 왕가의 개인 자산이었고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창경원 역시 처음에는 순종과 그 가족만을 위한 개인 정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곧 일반 국민에게도 공개되어 한반도 최초의 일반인을 위한 시민공원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일제가 순종과 조선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창경궁을 훼손했다고 해석하는 이가 많지만, 사실 창경궁은 시작부터 왕조의 부속궁궐이었을뿐 한 번도 본궁이었던 적이 없고 창경원 개장이 순종의 지위를 크게 떨어뜨렸다고 볼 근거도 없다. 당시엔 이미 나라를 빼앗긴 전제군주로서 리더로서의 권위를 모두 다 잃어버린 다음이기 때문이다. 또 창경궁은 일제 침략 이전에도 화재 등으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며 1909년 당시 남아있던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알 수 없다. 오히려 식물원과 동물원 건설 이후 더 규모가 커졌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특히 프랑스 회사가 시공한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 개원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식물원이었으며 지금 봐도 멋진 건축물이다. 지금 아무도 그 건물을 두고 '일제가 조선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전에 있던 궁궐 건물이 대온실보다 웅장하거나 화려했다고 추측할 근거도 없다.

      창경원은 대한민국 독립 이후에도 이어져서 수십 년간 서울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심 공원의 역할을 했다. 사실 창경궁은 한반도가 일제 침략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이 전제군주정에서 시민공화정으로 자체 발전했다면 당연히 왕가의 땅에서 시민들의 공원으로 바뀌었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 침략이 있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더 궁궐로서 보호받고 있는 땅이 되었다.

      동물원 등 유원지 시설은 1983년~1986년에 철거되어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다.
      https://namu.wiki/w/%EC%B0%BD%EA%B2%BD%EA%B6%81

    • kimduhan 2020.06.25 11:28  댓글주소  수정/삭제

      팩트 체크

      Abe씨:"정궁인 창덕궁이..."
      진실:"별궁인 창덕궁"
      더구나 이번 화제로 말하는 것은,"창덕궁" 아니다"창경궁"이다.
      물론 정궁이 아닌 별궁이다.

      Abe씨:"주인인 순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에 의해서 파괴"
      진실:"주인인 순종이 반대했다는 기록은 전무.오히려 적극 찬성했다.게다가 창경궁은 화재만 당시 황폐했던 "

    • kimduhan 2020.06.25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순종부록 2권, 4년(1911년) 4월 26일 자 기록에 보면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지금부터 창경원으로 통칭한다. 그것은 창경궁 내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원(苑)’이란 울타리를 쳐 짐승과 나무를 키우는 곳이란 뜻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꾼 것이 일제의 조선 말살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가 아니라 순종이었다고 합니다. 순종은 ‘궁’이라고 하면 백성이 드나들기 불편할 것이므로 ‘원’으로 바꾸어 좀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는 것입니다.

      또 순종이 굳이 이름을 바꾸어 창경궁의 문턱을 낮춘 까닭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더 쉽게 만나려는 뜻이었다고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만행을 잊지 말아야 하지만 이렇게 잘못 알려진 것은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출처 : 법률저널http://www.lec.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41

    • kimduhan 2020.06.25 14:39  댓글주소  수정/삭제

      1909년에 순종이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일반인들이 들어와 구경할 수 있게 하였고, 1911년에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궁궐의 중요성은 떨어지게 되었다.
      (대교학습백과:창경궁 <昌慶宮>)
      http://dlegongbuwarac.edupia.com/xmlPrint.aspx?did=31113

    • kimduhan 2020.06.25 15: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순종은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네.


      눈에 띄는 점은 이러한 공간의 제공이 ‘순종의 하사’로 이루 어졌음이 계속해서 강조된 내용이다. 처음 창경원을 일반에 개 방할 당시 반대를 무릅쓰고 순종이 적극적으로 이 안을 지지했 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백성과 함께 즐기기 위함 이었다20). 이후에서 순종의 뜻에 감사하는 내용의 기사가 종종 나왔고, 순종이 위독하여 잠시 폐원했던 창경원을 다시 개원하 라 직접 명령하기도 했다21). 뿐만 아니라 순종 자신도 이 공간 을 이용하고 즐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22).
      (근대적 도시 공원으로서 창경원 https://pdfs.semanticscholar.org/c595/628e1c346a2ef9ac17d4043ded114e86576d.pdf)


      순종:
      “옛 성현의 예를 보아도 명군은 백성과 함께 즐기었다. 해락, 이 두글자를 잘 음미해 보면 궁원을 일반인에게 개방한 조치가 갖는 깊은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거늘. 그대들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가”(Lee, 2007: 77).

      昨今의 李王殿下/창경원에동가하셔셔운동을하서… 리왕뎐하께셔난 수
      일간식 격하셔셔 갓금비원에 등가하셔서 회하시며 또잇더굼 쳥경원에
      도동가하사 울적하신 회포를봄빗에 싯쳐버리시난대 일젼에난 챵경원
      에 시민들이만히 관람하난동안에 잠간단여오셨다 아며 요지음도 비원
      에난 물론이오챵경원에도 일반시민이나간오후네시이면갓금동가하셔서
      봄빗을보신다고 측문되더라 – 매일신보 1921년 4월 29일.

    • Abe 2020.06.26 1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Qte
      창덕궁, 창경원, 율곡로, 벚꽃놀이...
      .....

      창덕궁, 창경궁, 종묘 중간에 순종이 그렇게도 반대했지만 길을 뚫어 지맥과 궁궐을 쪼개 버렸지..
      Unqte

      한글 못 읽나요 ?

    • Abe 2020.06.26 1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Kimduhan !
      Do you understand Korean letters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 - 대한제국시대의 궁궐 중 하나로 1997년 조선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1404년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 한양 재천도를 위해 건립한 궁궐이다. 조선 전기에는 정궁 경복궁에 이은 제2의 궁궐 역할을 했으며,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조선 후기에는 법궁 겸 정궁(正宮)의 역할을 했다. 조선 전기에는 경복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고, 조선 후기에는 경희궁과 양궐 체제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임금들은 이러한 양궐 체제의 두 궁 사이를 오가며 번갈아가며 거주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조선 전기에도 경복궁 못지 않게 쓰임새가 잦았던 궁궐이었고, 반대로 조선 후기에는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용하느라 창덕궁을 떠나 있었을 때도 많았다.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정궁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1907년 순종이 이어해 다시 황궁이 되어 마지막 순간의 대한제국과 그 운명을 함께했던 궁궐이다.

      조선 건국 초부터 그 멸망까지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던 유일한 궁궐이며, 조선시대 내내 양궐 체제하에서의 실질적인 두 법궁의 지위를 유지한 유일한 궁궐이다. 또한 가장 오랜 기간 조선시대의 정궁이었다.[8]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20세기 후반까지 구 대한제국 황족(순정효황후, 영친왕,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들이 거주하였고 조선시대 이후에도 오랫동안 궁의 역할을 하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로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이 꼽혀야한다는 말이 실로 과언이 아니다.

    • kimduhan 2020.06.26 1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순종이 반대했다는 근거를 내세요.나는 순종이 창경궁에 동물원, 식물원을 설치하고 창경원이라고 개명할 것에 찬성하는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 kimduhan 2020.06.26 11:2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네요.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기 전까지 창덕궁은 정궁이었다.그러나 경복궁 재건 후, 즉 순종의 시대는 정궁이 아니라 이궁이었습니다.

    • Abe 2020.06.26 11: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시대의 정궁인 창덕궁이 왜구 강점기에 궁궐의 주인인 순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구들에의해 파괴된 점은 왜구들의 패악질이었기에,,,, 북한 지도부가 쓰던 거소의 쓰임새와 창덕궁 파괴는 비교대상이 아님...

      한글 이해도가 많이 떨어지는거 같은데 영어나 일어로 번역해 줄까요?
      It seems that kimduhan can not properly understand Koream.
      Do you want me to translate my words into English or Japanese ?

    • kimduhan 2020.06.26 11: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창덕궁 주인 소유자의 순종이 반대하고 있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세요.

    • Abe 2020.06.26 11:37  댓글주소  수정/삭제

      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정궁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1907년 순종이 이어해 다시 황궁이 되어 마지막 순간의 대한제국과 그 운명을 함께했던 궁궐이다.

      이것도 번역해 드려요?

    • kimduhan 2020.06.26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알지만, 순종이 경성의 근대적 가로 형성과 궁전의 개조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근거는?

    • Abe 2020.06.26 11: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순종 생전에 도시계획에 율곡로 개통을 포함하여 보고했더니 순종이 그것만큼은 정말 절대로 안 된다며 기를 쓰고 매우 격하게 반대하였다.

      망국(亡國)의 상황이더라도 명목상 이왕으로 있던 순종을 의식하여 반대를 무릅쓰고까지 강행하진 못하다가 순종이 붕어하자마자 붕어한 순종이 반대했던 말을 무시하고 그냥 바로 다이렉트로 도로를 뚫어버렸다.

      현재는 율곡로를 지하도로화해서 끊어져 있는 종묘와 창덕궁 권역을 서로 잇는 공사를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2020년 현재 시점으로써는 언제 끝날지는 요원하다.

    • Abe 2020.06.26 11: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덕수궁이 조선시대의 정궁 아니래매?
      순종이 궁궐파괴를 반대 않했다매?
      알지만 ??
      그럼 아는데 왜 거짓말 했는데??
      왜구임을 커밍아웃하려고? 날조와 왜곡의 대가답게 ??

      사기, 사기, 사기, 지겹네,,,
      페스트 사기는 어떻게 해명 않하시나??

      내글에 반대를 했으면 거증의 책임은 이의제기하는 쪽에 있다는 기본 원칙도 모르나???

    • kimduhan 2020.06.26 11:4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 근거 자료를 내세요.보고 싶습니다.

    • kimduhan 2020.06.26 11:52  댓글주소  수정/삭제

      Abe선생님의 최초의 댓글을 봅시다."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드는 "다는 것을 2차례 비판하고 있습니다.

      (‘동물원 도 많이 사랑해주시고...
      살인귀 왜구들이 고매한 가치를 실현하기위해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었다 ?’

      그래서 저는 그 일에 근거를 제시하고 반박했습니다.

    • Abe 2020.06.26 13: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창경원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을 훼손하여 만든 유원지. 1983년 ~ 1986년에 거쳐 철거되고, 동물원 기능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다.

      1909년(융희 3년)에 일본인들이 을사늑약과 정미7조약 등으로 우울함과 걱정 근심에 빠진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궁궐에 동물을 들여왔는데,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궁궐 안 전각 일부를 철거하고는 일본식 정원과 건물을 세우고, 창경궁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개명해 격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창경궁은 궁궐이 아닌 유원지로 바뀌어 버린다.
      ..중략..
      많은 훼손 끝에 왕족의 거주 공간이었던 창경원은 개원과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누구나 입장료만 지불하면 이용할 수 있는 공중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1922년에는 창경원에 벚꽃을 심어서 일본인들이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하였으며 1924년에는 불꽃놀이도 열었다. 일본인들이 기틀을 닦아서인지 앵무새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어[1]를 따라했었다고 한다.

    • Abe 2020.06.26 1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래 글에 답해보시요 왜구 아저씨..



      덕수궁이 조선시대의 정궁 아니래매?
      순종이 궁궐파괴를 반대 않했다매?
      알지만 ??
      그럼 아는데 왜 거짓말 했는데??
      왜구임을 커밍아웃하려고? 날조와 왜곡의 대가답게 ??

      사기, 사기, 사기, 지겹네,,,
      페스트 사기는 어떻게 해명 않하시나??

    • kimduhan 2020.06.26 13:52  댓글주소  수정/삭제

      순종이 반대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없네요.자료를 소스에 찍어서 제시하세요.

    • Abe 2020.06.26 15:29  댓글주소  수정/삭제

      구글 할 줄 몰라요?
      난 인용문 도배질에 관심 없어요... 자료를 보고 사유하면서 내 생각을 쓰지요...

    • kimduhan 2020.06.26 18:09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왕 전하께서는 길이 종묘 뒷산을 끊고 나아가게 되었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그 길은 중지할 수 없느냐 물으시며, 만일 그 길을 절대로 중지할 수 없으면 종묘의 대문을 영녕전 앞으로 들이 세우고 종묘 앞으로 길을 내면 어떠하냐 될 수 있는 대로는 앞으로 길을 내이라 하시는 처분과 그 다음에는 종묘 앞으로도 내일 수 없다 하면 종묘의 뒤로 내더라도 차라리 창덕궁영(昌德宮營)을 더 범하도록 하고 영녕전에는 가깝지 아니하도록 주선하라시는 처분이 계시었다 승문되는데,

      원래 조선의 관습상으로 보면 산맥의 노후를 끊는 것은 사가(私家)에서도 대단히 꺼리는 터인데 종묘 중지의 노후를 끊는다는 것은 큰 문제이며 또 이번에 푯말을 박아 놓은 것으로 보면 종묘 영녕전과 약 이십 칸의 거리밖에 아니되는 노후로 길이 나며 전차가 통할 터인즉 종묘는 자연 소란케 될 것이므로 전하께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종묘 앞으로 길을 내었으면 좋을 듯하다는 주장을 하신다고 승문되더라."( 동아일보 1922년 9월 21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49975



      새로운 길이 종묘 영녕전 20여m 앞을 지나간다는 보고를 들은 순종이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종묘를 훼손하는 일이라면서 기겁을 했다. 1907년 즉위 이래 통감부나 총독부에 반대한 것은 처음일 정도로 이례적 사건이었다. 당시 이왕직 장관이던 이재극은 순종의 꾸중을 듣자 “종묘를 헐고 그곳으로 길을 낸다고 함은 열성조에 대하여 황송한 일”이라면서 총독부와 협의를 시도했다. 종묘관통선은 순종 생전에 추진되지 못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1010021004#csidx642858886b20c779e2e7f96d713be9b


      “혹자는 말하리라. 종묘는 지엄함 곳이니 일반 민중을 위하여 지대를 개방함은 그 숭엄을 범함이라고. …그러나 이것도 시세의 문제이다. 종묘사직이 계견불문처(닭이나 개 짓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만 그 숭엄을 보장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종묘지대는 경성부민의 보건과 도시미를 위하여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공원으로 공개될 것은 금후의 조선정세가 여하히 변할지라도 필연히 닥쳐올 운명이라고 아니 볼 수 없다”(동아일보 1926년 6월 28일자 사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1010021004#csidxd2a45d52efe60a290093dd7294c244f


      종묘관통선 부설은 민족혼 말살차원에서 창덕·창경궁과 종묘를 분리시키려는 일제의 풍수단맥 시도인가 아니면 일반 공중의 교통편의와 도시발전을 위한 불가피한 근대적 도시계획의 선택인가. 그동안 풍수단맥을 노린 의도적 도시계획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당시 일제가 굳이 종묘를 통과하는 직선노선을 고집하지 않고 종묘를 우회하는 새로운 수정노선을 제시한 점 등으로 미뤄 풍수단맥설을 정설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백영 광운대 교수는 “피식민 대중의 정서에 반하는 식민권력의 근대주의적 실천이 식민주의적으로 오인된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1010021004#csidx4643b3718ce547c82b9688411fb805a


      물론 이러한 도시계획은 일제강점 초기부터 있었고, 1924년 종로구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그 일대의 도시개발로 양쪽을 직선으로 잇는 것에 대한 필요성은 있었지만 순종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총독부는 영친왕을 설득하여 종묘를 잘라내는 도로를 개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경궁과 종묘는 육교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1444



      저자가 보기에 1910년대 경성 도시계획의 골자는 격자형 공간구조 정비였다. 이때 일제에 저항했던 세력은 한국인이 아니라 오히려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이었다. 일제의 개발이 일본인만을 위해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에는 안국동에서 이화동에 이르는 창덕궁과 종묘를 가로지르는 도로의 개설 여부가 논란이 됐다.

      국권이 일제에 넘어간 지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여론은 종묘의 존엄성보다는 시민의 편의를 중시하는 의견이 다수였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에 '근대적 사고방식'이 퍼지면서 결국 도로는 뚫렸다.
      https://www.yna.co.kr/view/AKR20161207138400005




      자료를 여러가지 조사했습니다.확실히 Abe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순종이 도로 건설에 저항을 보였던 것은 사실 같아요.그래서 1912년에 도로 계획이 되었지만, 순종이 사망 1926년까지는 계획은 완전히 정지되고 있었다.이후 순종의 뒤를 이은 이왕가 당주인 영친왕이 결재하고 더 당시 경성 시민(조선인)도 건설에 찬성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도로 건설이 시작되었다.그런 흐름입니다.순종이 반대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Abe씨에게 사과합니다.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종묘, 창덕궁의 1926년 당시 소유자인 영친왕이 OK를 내고 경성 시민도 환영하고부터 건설하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내가 살아생전 이 집을 개축해서는 안 된다"라는 선대 당주가 죽고 젊은 문명 개화적인 신세대의 당주는 집의 재건축을 결단한다.항간에 자주 있는 이야기에요.게다가 그 결단은 오랫동안 시민 공익을 위해서 기대된 것이라면 이는 근대화의 불가피한 과정의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 Abe 2020.06.28 16: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창덕궁이 별궁이었다고 떼쓴것도 사과해야지요...

      역사의 사건에 대한 사료와 해석은 디양한 시각을 갖고 있지요... 그래서 합리적이고 양심적이며 정황적 사실에 충실 해야 하지요...

      영친왕을 왜구 군국주의의 희생양과 괴뢰로 무참히 짖밟아놓고 정상적인 판단을 한 것처럼... ㅋㅋㅋ

      왜구왕 미나토구에있는 거소를 횡단 종단으로 뚫어 길을 내는 근대화부터 하지 그랬어요 ?

    • kimduhan 2020.06.28 18: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쿄의 황궁은 도로에서 분단되고 있고, 안은 공원으로 개방되고 있어요.그것이 전근대와 시민 사회가 존재하는 현대의 다른 점입니다.국왕과 천황의 독점물이었던 황궁, 궁궐이 시민을 위해서 열렸다.아니면 Abe씨는 조선 시대 채 완전히 궁전이 보존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시민의 불편은 희생 해도?그렇다면 왜 아와야로는 폐지하지 않나요?지하 터널을 파다?그야말로지 맥을 단절하게 되지?

    • Abe 2020.06.29 17:48  댓글주소  수정/삭제

      웬 헛 소리???
      왜왕 거소는 1945년에 폭격으로 불타고 1968년에 재건 되었는데 언제 가운데로 길 내었다고요?

      조선시대 정궁인 창덕궁에 길을 뚫어 파괴한게 왜국 군국주의자들이고, 파괴되지 않았다면 지금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고궁을 갖고 있겠지,,, 우리 궁전을 공원으로하던 미술관으로 하던 궁궐 그자체로 개방하던 우리가 선택할 몫이고...

      남의나라 궁전을 파괴해놓고 무슨 개 풀뜯어먹는 잡설이 그렇게 많은지 쯧쯧..

    • kimduhan 2020.06.29 1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쿄에 온 적이 없으세요?한번이라도 도쿄의 황궁에 오면 황궁이 도로에서 끊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죠.심지어 고속 도로도 안을 다니고 있다.

    • Abe 2020.06.30 0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하하하.. 나는 동쪽 서울에 많이 가 보았지요.. 한 30여번..... 적판도 잘 알고... 일왕 거소도, 정국신사도
      많이 가보았지요....
      다시 물을게요... 왜왕거소가 도로로 절단 되어 있나요? 그렇다면 1968년이후 언제? 1945년 이전 언제? .... 왜 왜구들은 한결같이 뻔하게 드러날 일을 사기 치나요? 그냥 왜구라서? 사기 치는게 본능이라서?

      왜 우리의 궁전을 파괴해 놓고 잡설 이빨을 까는데?

      대한민국이 G7 가입하는데 반대하는게 왜구 잖아요? 군함도 사기 치는게 왜국 이잖아? 왜구들이 갈라논 나라 잘 소통하려는데 방해하고 어깃장 놓는게
      왜구 아닌가? 우리 경제 목줄 끊겠다고 치졸한 술수 부리는게 왜놈 아닌가?

      이 천박한 왜구놈아 !!!

    • kimduhan 2020.06.30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메이지 시대부터 황궁을 가로지른 도로는 있습니다.그것을 지하도화하자는 운동도 전쟁 전부터 있었지만, 결국 실현하지 않았습니다.

    • Abe 2020.06.30 10:42  댓글주소  수정/삭제

      ㅋㅋㅋ
      남들 보면 오해하겠네요..

      그건 오솔길이라 부르지 도로라고 부르지 않지.... 멸치를 고래처럼 애기하면 되나 ?

    • kimduhan 2020.06.30 12:02  댓글주소  수정/삭제

      도로에 대한 개념이 일본과 한국에서는 다른 걸까요?좀 이해하기 힘드네요

    • Abe 2020.07.01 09:5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까 결론은 왜왕의 거소에 오솔길을내던 도로를 뚫던 왜국에서 결정할 내용이라 난 별 관심도 없고,,,, 순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궁을 파괴해서 길을 뚫는 패악질을 저질렀냐고 ???

    • kimduhan 2020.07.01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순종이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도로를 건설하지 않았습니다.다음의 영친왕이 허용한 것으로 건설했습니다.

    • Abe 2020.07.02 06: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 시점에서는 간악하고 저열한 군국주의 신봉자 왜구인 kimduhan을 단호하게 꾸짖기 위해 반말을
      쓸 수밖에 없음을 양해 바랍니다.

      악질 왜구 kimduhan은 듣거라.
      영친왕이 누구며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알고서
      영친왕 허락을 핑계 대느냐?

      고작 10세의 나이에 패륜아 이등박문의 강압으로
      왜국으로 옮겨져 왜구 교육을 강요하여 왜구로
      세뇌시키며 왜국의 국적으로 삶의 대부분을 왜국에서 살게 하지 않았더냐.

      조선 왕가의 정통성을 끊기위해 어린 아이에게 부모의 보살핌을 박탈하는 패악질을 저지르고 왜국의 여인 이방자와 정략결혼을 강요하는 인권유린도 서슴치 않았지...

      이방자는 본시 히로히토 왜왕의 비로 간택되어 왕비수업을 받던 중 불임으로 진단되자 조선 왕실의 맥을 끊기위해 강제로 혼인시키는 금수같은 짓을 왜구
      들은 결행하지 않았더냐...... 이 천박하고 악랄한 왜구놈아....

      철저하게 인간의 기본 인권을 유린하며 왜구들의 프락치로 만들어 놓고 영친왕의 허용? 이 천박하고 가증스런 왜구놈아....

      그것도 모자라 결국엔 왜국에서 삶의 대부분을 왜인 들과 왜국에서 살게해 놓고 그 더러운 왜구 국적과 모든 재산을 박탈하여 처참한 삶으로 내몰지 않았더냐..... 이 천박하고 비열한 왜구놈아!

      너희 극우 군국주의 왜구들은 진실 호도와 왜곡과
      몰염치가 특기인건 알았으나 이토록 간악하고 비열할 줄은 몰랐다... 난 이시간 부로 왜구들은 짐승보다도 못한 지구위의 쓰레기로 간주할 것이다.

      이 더럽고 저열한 kimduhan 왜구놈아 !

    • kimduhan 2020.07.02 10:59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다면 왜 율곡로를 폐지하지 않나요?현재 지하 터널을 파고 있다던데...지하라면 땅 맥을 파괴하지 않나요?만약 지하 터널을 일본이 건설됐다면"조선의 민족 정기를 차단하기 때문에 일제가 지하에 도로를 건설!"이라고 난리 치는데.

    • Abe 2020.07.02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친왕 이야기 하고 있잖아요?
      답이 궁해서 주제 또 돌리고 싶지요...

    • kimduhan 2020.07.02 22:36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려 충렬왕은 몽골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몽골어를 상용하고 몽골 이름을 가진 몽골 여자를 얻다고 고려 왕이 되었습니다.그리고 변발·호복.령을 발령, 몽골군의 일본 침략 지휘관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습니다.그래서요?고려 충렬왕 이후 몽골화한 고려 왕족의 결정한 것은 고려 국왕의 결정이 아니다?

    • Abe 2020.07.04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치하게 물타기, 피장파장으로 본질 호도하지 말고
      영친왕의 의사결정이 자유의지와 가치에 기반한
      의사결정 이라고 믿는 바보가 있을까요?

      왜구들이 그 어린 나이때부터 영친왕에게 수십년간 자행했던 금수같은 패륜적인 공작들에 대하여 보통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왜구들의 답은 뻔하지만...

  4. kimduhan 2020.07.04 12: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려 충렬왕은 자유 의지라고?

    • Abe 2020.07.04 1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친왕의 의사결정, 삶과 왜구의 만행이 주제입니다. 자꾸 물타기 하려 들지 마세요.. 너무 유치하게 뻔한 수법 식상하네요..

    • kimduhan 2020.07.06 12: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친왕은 골수 친일파죠.어려서부터 일본의 교육을 받고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서 고귀한 지위를 유지하고 일본 육군 중장으로서 중국 침략을 지휘했다.일본 패망 후에도 " 어떻게든 일본 황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부탁합니다."라고 히로히토 전 천황에 애원했다.그는 몸도 마음도 일본인이 되고 있었으니, 그 자유 의지로 도로를 만드는 것을 허가했죠.

    • Abe 2020.07.07 21:2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까 왜왕과 왜구들이 간악한거지...

      10살짜리 어린애 강제로 왜국에 데려다 놓고
      왜국 교육시키고, 세뇌시키고, 왜왕 왕비후보가 석녀로 진단돠자 정략결혼 시키고 왜국에 살게 만들어놓고... 이용가치 떨어지니 내 팽개친 그 저열함....

      한마디로 짐승같은 짓을 했지.... 왜구들이...
      짐승들 화내겠네요... 왜구랑 비교한다고...

    • kimduhan 2020.07.07 22:24  댓글주소  수정/삭제

      고려 중선왕은 2세로 베이징에 끌려가서 몽골의 세뇌를 받고 죽을 때도 베이징에서 죽네.

    • Abe 2020.07.07 23:35  댓글주소  수정/삭제

      영친왕과 왜국 악마들이 주제라니까...
      없는 고려왕 얘기로 사기치지 말고

    • Abe 2020.07.07 23:4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 왕실 막장이야기 #1 (ft.상상이상의 막장) - https://be-story.tistory.com/307

    • kimduhan 2020.07.08 11:44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국 역사상 왕이 중국, 몽골, 일본 등 주변 강대국에 볼모로 가다, 그래서 세뇌된다는 것은 흔한 것으로, 영친왕이 비참한 체험을 한 것은 아닙니다.

    • Abe 2020.07.08 1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후후후...
      왜구의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살인은 도처에서 수시로 일어나니 살인죄는 별거 아니니까 처벌허지 말자는 천박하고 저열한 논리....

      왜구 군국주의자, kimduhan !

    • kimduhan 2020.07.08 13:20  댓글주소  수정/삭제

      살인이라면 비참하지만 실제로는 왕족으로서 존중된 인질이라 원망은 사치죠.영친왕은 친일파인가요?그렇지 않습니까?

    • Abe 2020.07.08 15:27  댓글주소  수정/삭제

      기억력에 문제가 많은 듯 하여 다시한번...

      10살짜리 어린애 강제로 왜국에 데려다 놓고
      왜국 교육시키고, 세뇌시키고, 왜왕 왕비후보가 석녀로 진단돠자 정략결혼 시키고 왜국에 살게 만들어놓고... 이용가치 떨어지니 내 팽개친 그 저열함....

    • kimduhan 2020.07.08 15:3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영친왕은 순수 피해자이고 친일파가 아니라는 뜻입니까?
      그렇다면 25대째 이후 고려 왕도 모두 순수 피해자인가요?그들은 몽골 황제의 딸과 결혼하고 이름도 복장도 머리도 몽골 이름으로 바꾸고 완전히 몽골인이 되다.

    • Abe 2020.07.08 15: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정말 아이큐가 얼마나 되는지?
      기억력은 ?

      창덕궁 파괴하는 도로 뚫는데 순종은 극렬반대,,, 왜구들의 검은 마수의 영향력하에 있던 어린 영친왕의 동의로 그 패악질을 정당화하려는 왜구들의 간교함을 논하는 자리에..... 무슨 몽골???

      몽골의 문화와 역사를 저열한 군국주의 찌끄러기와 논하고싶은 생각은 없는데???

    • kimduhan 2020.07.08 17: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몽골의 이야기가 불만이면, 영친왕의 이야기만 묻겠습니다.영친왕은 친일파가 아니라 순수 피해자?

    • Abe 2020.07.09 08:39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구들은 하얀색과 검은색 외에는 모르는 모양이지?

      어린아이를 국가권력이 유린한 간악스러운 사건을
      왜구들이 저지르고 뻔뻔하게 오리발 내밀고 있는 거지...

      몽골의 역사?
      증인들이 생존해 있는 100년 내외의 왜구 강점기때 역사도 왜곡하고 분탕질 치는 왜구들과 무슨 역사?

    • kimduhan 2020.07.09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흰색과 검정색밖에 모르는 것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일제 강점기에도 검은 색( 나쁜 면)도 흰색(장점)도 있었다.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100%블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인이죠.

    • Abe 2020.07.09 10: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구들은 모든 증거가 검정색이라고 말해도 흰색이라고 주장을하니까 말이죠,,,,,

      더 큰 문제는 2020년 현재까지 그 악독하고 잔인했던 극우 군국주의를 그리워하는 세력들이 왜구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

      군함도 사기사건.... 왜구국은 국격이 없는거 같아요.. 하기야 언론의 자유가 워낙 후진적이니까....

    • kimduhan 2020.07.09 1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극우도 군국주의도 싫습니다.지금 아베 정권도 극우나 군국주의는 아니에요.만약 그렇다면 8년도 집권하고 헌법을 한 글자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죠?독도에 군함 파견했습니다?일본에서 징병제가 시작되었어요?혹시 극우 군국주의가 지지를 받아 집권하고 있는 나라라면 진작에 실현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 Abe 2020.07.09 13:25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국의 거대 여당인 자민당은 태평양 전쟁의 전범들은 물론, 그 이전에 메이지 유신을 이끈 삿초동맹(薩長同盟)의 세력이 직간접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현 총리인 아베 신조는 조슈 번 세력의 후손이며, 이전 총리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사쓰마 번 세력의 후손이다. 그 외에 태평양 전쟁 1급 전범이었다가 사법거래로 불기소처분을 받은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역시 조슈 번 세력의 후손)가 자민당의 주요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태생이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 형태인지라 파벌이 매우 다양해서, 과거에는 이시바시 단잔이나 미키 다케오, 스즈키 젠코, 후쿠다 야스오같이 나름대로 온건한 인물도 총리로 재직했고, 심지어는 고노 담화의 그 고노 요헤이 같은 개념인도 있었다...(!!!) 다만 1990년대 온건 성향의 보수본류 계열들이 대거 탈당하여 신당을 차리고 2000년대 이후부터는 우익 성향의 보수방류 계열의 총리들이 쏟아지면서 극우 계파가 당을 완전히 장악 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자민당의 당 강령 등에는 극우적인 성향을 보이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다. 자민당이 대놓고 극우성향을 표방했으면 세계평화를 기치로 내건 공명당하고 연정 구성 자체를 못했을테니깐.

      다만 아베 신조 총리 취임 이후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어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극우 중엔 가선 우익이 유명하다. 대체로 트럭이나 버스 개조한 것들을 타고 다니면서 방송하거나 군가를 틀고 다니는 우익단체, 야쿠자들의 지원도 받는 편이고 일본은 투표율이 낮은 편이라 가두 우익 등의 동원력 있는 우익들이 강세를 누린다.

      근래에는 인터넷 넷 우익들이 거리로 튀어나오는 편인데 가두 우익과는 상당히 다르다. 가두 우익이나 정통 우익들은 보통 재계나 정계의 입장을 내세우며 반공주의 등에 입각하는 편이지만 넷 우익들은 인종차별 성향을 매우 강하게 드러낸다.

      사실 넷 우익은 인종차별 말고는 딱히 이론적인 기반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죄다 인터넷에서 긁어모으거나 몇 안 되는 칼럼니스트들을 레퍼런스로 활용하는 수준이니. 일본이 요새 국력이 많이 시원찮고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젊은이들이 극우주의 또는 배타적인 국뽕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어 이런 넷 우익 출신들은 꽤 인기가 있다.

      이중엔 단순한 극우를 넘어 국제적으로 매우 위험한 정신병자들까지 있다. 호국지사의 모임(護国志士の会)이란 무리인데 나치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서 '고노 담화를 재검증은 물론 나치 독일도 재평가해야한다'라고 주장했다. 나치를 찬양한다는 건 지금 범세계적 국제기구가 된 UN 회원국 전부를 대적해 위험에 빠뜨리는 짓인데 대체 어디가 호국인지 모르겠다.

      왜국의 우익들은 집단적 자위권으로 대표되는 군사력 증강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고 특히 넷 우익들의 경우 20세기 중반 미국과 싸웠던 황군의 기치를 되찾자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추축국의 재무장과 그로 인한 비극을 이미 인류는 제대로 한번 겪었기 때문에 외국 특히 왜구에게 당해본 적이 있는 중국, 한국, 러시아에선 굉장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포인트.

      다만 동남아시아 쪽에선 중국과 심각한 남중국해 분쟁을 겪고 있어서 일본의 재무장을 바라기도 한다.

      더욱이 미국 오바마 정권이 제창한 '아시아 재균형 정책(Pivot to Asia)'의 일환으로 왜국을 '미국의 아시아 대리인'으로 내세워 군사력 증강을 공공연히 묵인하고 더 나아가 지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간접적 고리가 엮여있는 한국으로서는 왜구국의 재무장 및 군사력 증강에 대해 태클걸기가 곤란한 상황이다.

      그리고 2015년 9월 19일, 헌법 9조를 엿먹이고, 타국에 자위대 파병이 가능하게 되었다.

      2014년 8월 아사히 신문이 일본군 위안부 관련 과거 기사 가운데 16건을 오보로 인정하고 취소한 일은 왜구 우익들이 전방위적으로 발호하는 계기가 됐다. 우파 성향의 언론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산케이 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은 잇따라 '아사히 신문=매국의 DNA'와 같은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공격했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해 정치인들도 여기에 가세했다.

      아사히는 단지 요시다 세이지(사망)란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사를 취소했을 뿐인데 이들은 내친김에 위안부 강제 동원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주변국 반발과 여론 악화를 의식해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河野) 담화를 부정하지는 못하면서도 '고노 담화를 계승하되 검증한다'는 기괴한 논리로 흠집냈다. 위안부를 '군사적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권고한 유엔 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철회를 공식 촉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왜국의 움직임에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아베 정권이 역사를 들쑤시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민간 차원의 우경화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출판가에 ‘혐한(嫌韓)’ 서적 바람이 분 것은 물론 온라인 중심으로 이뤄졌던 혐한 활동도 오프라인으로 확대됐다. 2009년 7,000명이던 혐한단체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 회원은 2015년 15,000명으로 배 이상 늘었다. 활동도 점점 과격해져 전직 아사히신문 기자에 대한 테러 협박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왜구군의 잔학성을 담은 할리우드 영화 <언브로큰> 관계자의 입국을 막기까지 했다. 이에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 대학교 석좌교수는 "요즘 왜국은 1930년대 왜구국을 떠올리게 한다"고 꼬집었다.

    • kimduhan 2020.07.09 13:34  댓글주소  수정/삭제

      좀 길어서 당신이 주장하고 싶은 포인트를 간단히 소개하고 주시겠습니까?

    • Abe 2020.07.09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구국이 극우경향, 군국주의 회귀 경향이 강화되고있다는 내용이네요..

    • kimduhan 2020.07.09 14:2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극우 군국주의자"아베가 일본 정치 사상 최장 기간의 8년도 집권하면서 헌법은 개정된 건가요?자위대는 타국 침략했습니까?어디가 변화했습니까?아베 총리는 매년 종전 기념일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고 있습니까?

    • Abe 2020.07.09 14:29  댓글주소  수정/삭제

      길지만 다 읽어봐요...
      사실은 10%도 표현이 않되어 있지만..

    • kimduhan 2020.07.09 14:31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가지라도 배우세요.8년"극우 군국주의"으로 이뤄진 일본 군국주의의 실례를.

    • Abe 2020.07.10 11: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무슨 말인지???
      영어나 왜국어로 좀 써줄래요 ?

    • kimduhan 2020.07.10 1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인 실례를 1개 부탁합니다.

    • Abe 2020.07.10 17:24  댓글주소  수정/삭제

      왜구국이 극우경향, 군국주의 회귀 경향이 강화되고있다는 내용이네요...

      이 글 이해가 않되요?
      주변에 한국어 잘하는 사람에게 물어봐요...

    • kimduhan 2020.07.10 17:34  댓글주소  수정/삭제

      "경향"일 뿐 실제로"군국주의"이나 "극우"정책이 실행되어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가 됐다는 주장이 아니에요?

  5. antikimduhan 2020.07.05 02: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kimduhan--이자는 왜구의 앞잡이거나 왜구의 피가 콸콸 흐르는 개종자가 틀림없구나.

  6. Abe 2020.07.12 20: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부동산회사인 후지주택이 회장 명의의 사내 교육용 문서를 통해 한국인을 ‘야생동물’에 비유하는가 하면 ‘위안부들의 생활은 사치스러웠다’ ‘한국은 영원히 날조하는 국가’ 등 혐한(嫌韓) 내용을 장기간 유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00712/101930789/1?ref=main

    • Abe 2020.07.12 20:56  댓글주소  수정/삭제

      日, 코로나 사태 편승한 ‘자숙경찰’ 활개… 되살아난 국가주의

      아베 신조 총리 집권 이후 뚜렷해진 보수우경화 흐름과 맞물려 과거 국가주의를 연상시키는 자숙경찰의 횡포는 가뜩이나 가라앉은 일본 사회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m.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707018001&cp=seoul&wlog_tag3=kakao_share#csidx4f40340ed1f27eab759deeeca88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