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의 요충인 가림성을 먼저 쳐야 한다.”(모든 장수들) “아니다. 험하고 튼튼한 가림성을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다. 먼저 백제의 소굴인 주류성을 치면 여러 성은 절로 항복할 것이다.”(당나라 유인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자왕조’는 662년 7월 백제부흥군을 공격하려던 나당 연합군 수뇌부가 작전회의를 연다. 모든 장수들은 요충지인 가림성(사적 4호·충남 부여군 이천면 군사리)을 두고 갑론을박 했다. 

백제 부흥군 최후의 보루였던 가림성에서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 집수정(우물)이 1구씩 확인됐다.|백제고도문화재단 제공  

모든 장수들이 전략적 요충지인 가림성을 먼저 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나라 유인궤(602~685)는 “병법에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면서 주류성(위치불명) 공격을 주장했다. 나당 연합군은 유인궤의 의견대로 가림성을 피해 주류성과 백강으로 진출하여 백제부흥군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가림성은 그후 10년이 지난 672년 2월까지 완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문무왕조’는 “671년(신라 문무왕 11년) 6월 신라 장군 죽지가 군사를 이끌고 가림성의 벼를 밟았고, (8개월 후인) 672년 2월에는 신라가 백제 가림성을 쳤지만 이기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신라 군사들이 가림성의 벼를 밟았다는 것은 백제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막으려고 한 고육책이었다. 그럼에도 신라는 가림성을 완전히 도모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철옹성’으로 여겨진 가림성은 동성왕 때인 501년(동성왕 23년) 8월 축조됐다. 동성왕은 막 쌓은 성의 책임자로 위사좌평 백가를 임명했다. 위사좌평은 임금을 호위하고 왕궁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1품 관직이다. 그런데 백가는 요직(위사좌평)에서 한직(가림성주)으로 쫓겨났다고 생각했다. 

가림성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집수정. 아직까지는 백제 대 사용된 집수정이 보이지 않는다. 백제 때는 이보다 작은 규모의 우물을 사용했다가 유실되었을 수도 있다. |백제고도문화재단 제공

<삼국사기> ‘백제본기·동성왕조’는 “인사에 불만을 품은 백가가 병을 칭하면서 사임을 요청했지만 동성왕이 승락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백가는 이에 역심을 품었다. 3개월 뒤인 11월 백가는 사람을 시켜 사냥 중 큰 눈 때문에 길이 막혀 마포촌(서천 한산면)에서 머물고 있던 동성왕을 시해했다. 백가의 반란은 동성왕의 아들인 무령왕(501~523)이 즉위하면서 진압됐고, 백가는 참형되어 백마강에 버려졌다. 

가림성 중앙에 후삼국~고려초기 장군 유금필(?~941)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유금필이 후백제 견훤(재위 900~935)과 싸우다가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했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축조연대(501년)이 확실한 유일한 백제성이기도 한 가림성은 이렇게 백제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유서깊은 곳이다. 

그런데 최근 이곳에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집수정, 즉 우물 유구가 2기 발견됐다. 지난해 9월부터 가림성 안 사람들이 마셨을 집수시설을 확인해온 백제고도문화재단은 복성벽 안쪽에서 조선시대 사각형 및 통일신라시대 원형 집수정(식수 등을 모으는 우물)을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조선시대 집수정. 501년 백제 동성왕 때 축조된 가림성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후기인 17~18세기까지 사용된 성이다. |백제고도문화재단 제공

백제가 멸망했음에도 10년이나 버티던 가림성이 신라의 영토로 완전 편입된 이후에도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꾸준히 활용됐음을 증거해주는 유구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 시대 집수정은 북성벽과 조선시대 집수정의 하층에서 확인됐다. 원형이며 길이 15m, 깊이 2.8m 이상의 규모이다. 

성현화 백제고도문화재단 조사원은 “물을 가운데로 모으는 집수정과 그 외곽에 돌로 축조한 차수와 배수를 겸한 수로가 돌아가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조선시대 집수정은 길이 4.9m, 너비 4.5m, 깊이 2.3m 규모의 사각형 형태로 조성됐다. 내부에서 분청사기 조각과 기와조각. 말머리 토우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성현화 조사원은 “가림성은 통일신라 시대인 686~757년 사이 이곳에서 국가 제사의 소사(小祀)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면서 “고려~조선 중기를 거쳐 17~18세기쯤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1674년(현종 15년) 이전의 기록인 <동국여지지>에는 ‘사용중인 성’으로 기록됐지만 18세기 이후에 편찬된 <여지도서> 등에는 ‘금폐(今廢)’ 혹은 ‘고성(古城)’으로 표현됐기 때문이다.

아직 백제시대에 조성된 집수정은 보이지 않는다. 성현화 조사원은 “백제시대 집수정이 이미 유실되었을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아직 발굴이 덜 끝난 상태이므로 뭐라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백제시대 때는 이번에 밝혀진 집수정보다 소규모 우물을 사용했을 것”이라면서 “호족들이 활개를 치는 통일신라 말기부터 안정적인 수원확보를 위해 규모가 제법 큰 집수정을 조성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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