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

(165)
덕수궁 돌담길 “영성문은 작년(1920년) 여름 헐렸다. 영성문터~정동까지 신작로가 뚫렸다.”(동아일보 1921년 7월25일) 덕수궁돌담길이 지금의 모습으로 조성됐음을 알리는 신문기사이다. 영성문(옛 경기여고 길가)은 원래 역대 국왕의 어진을 모셨던 선원전의 출입문이었다. 일제가 고종의 붕어 이후 경운궁(덕수궁의 옛이름)을 대폭 축소하는 과정에서 궁역의 중간을 잘라 길을 내고 담을 쌓은 것이다. 덕수궁돌담길은 조성 당시부터 ‘사랑의 길’로 유명세를 탔다. “그 옛날 덕수궁 담 뒤의 영성문 고개를 사랑의 언덕길이라고 일러왔다.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였던 것이다.”(정비석의 1954년) 길 양편에 조성된 덕수궁과 미국·영국대사관의 돌담이 높고, 담 안의 나무들이 내뻗은 울창한 가지가 ‘자연의 터널’..
양봉음위에 얽힌 사연 “한가지 마음이면 백(100) 임금도 섬길 수 있지만, 100가지 마음이면 한(1) 임금도 섬길 수 없다”는 옛 말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한결같은 충심을 발휘하기 쉬운가. 그러니 구밀복검(口蜜腹劍)·표리부동(表裏不同)·소리장도(笑裏藏刀)·양봉음위(陽奉陰違)와 같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의 숱한 고사성어가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변함없는 충심을 발휘한다 해도 한번 삐끗하면 하루아침에 멸문의 화를 당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한비자가 “용(군주)을 잘 길들이면 그 등에 탈 수도 있지만, 역린(逆鱗·목줄기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죽임을 당한다”( ‘노자한비열전’)고 했을까. 한비자는 춘추시대 위 영공의 총애를 받던 미자하의 예를 든다. 어느 날 미자하의 모친이 병이 나자 위자..
피카소는 표절작가였다?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종종 모방작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디에고 벨라스케스(17세기)와 외젠 들라크루아·에두아르 마네(이상 19세기)의 작품들을 ‘모방한’ 연작시리즈를 냈으니 말이다. 모든 사물과 사람을 게걸스럽게 짐어삼켜 소화하는 작가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물론 그는 “천재성은 나이가 들면서 사라지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응수했다. 엊그제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사상 최고가(한화 1968억원)에 낙찰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Les Femmes d’Alger)’이 그런 작품이다. 18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대표주자인 들라크루아(1789~1863)의 동명작품을 패러디했다.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 1832년 알제리를 방문한 들라크누아는 이슬람 여성들만의 공간인 ‘하렘’을 구경하..
'부(負)의 유산', 어떤 것들이 있나 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은 모두 1007건(161개국)이다. 절대 다수는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인류의 자랑스런 유산들이다. 하지만 절대 반복돼서는 안될, 그래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유산들도 있다. 이른바 ‘부(負)의 유산(Negative heritage)’이다. 대표적인 ‘부의 유산’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1979년 등재)가 꼽힌다. 나치의 집단학살과 반인간적 범죄행위의 증거라는 게 등재이유였다. 대표적인 부의 유산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나치 독일이 자행한 진단학살과 반인간적 범죄행위의 증거로서 세계유산이 됐다.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될, 그래서 인류가 영영토록 짊어지고 갈 유산이라는 뜻에서 등재됐다. 세네갈의 고레섬(1978년)과 마셜제도의 비키니섬(2010년)도 ‘부의 유산’들이다. 고레섬은 인..
쓰러진 자격루의 교훈 주나라 시대에 계인(鷄人)이라는 벼슬아치가 있었다. 닭을 관장하면서 새벽을 알리는 관리였다.( 춘관) 이렇듯 ‘하늘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때를 알려주는(欽若昊天 敬授人時)’() 직책은 매우 중요했다. 만약 농사철 때 ‘때(인시·人時)’를 잘못 일러주면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여기는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세종 임금이 자격루의 제작을 명한 이유가 될 것이다.() 지난 2007년 각계 전문가 30여명이 모여 23년만에 겨우 복원한 자격루. “시각을 잘못 알리면 중벌을 받았다. 장영실에게 명해 시각을 알릴 목각인형을 만들었다. 사람의 힘이 들지 않았다.”() 장영실의 자격루(自擊漏)는 물시계와 자동시보장치를 겸비한 조선의 표준시계다. 물시계(아날로그)의 물 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다시 일정한 시차로..
내 안의 학살본능, 제노사이드 1941년 8월 24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가 BBC 생방송 연설에서 나치독일의 만행을 규탄했다. 그는 나치의 민간인 대량 학살을 두고 “우리는 ‘이름없는 범죄(a crime without a name)’에 직면해 있다”고 표현했다. “이처럼 조직적이고 잔혹한 살육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독일의 살인특무무대가 빨치산 소탕을 명목으로 소련땅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지칭한 것이었다. 나치독일의 만행은 300만 명의 유대인이 한 줌의 재로 변할 때까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이어졌다. 뭐라 딱히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군대간 전쟁이 아니라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쟁(war against peoples)’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2004년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집시 학살 60..
일본은 '임나일본부' 폐기 안했다 1930년대 말 ‘임나일본부’를 강의하던 스에마쓰 야스까즈(末松保和) 교수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학생이 있었다. 경성제대생 김석형(金錫亨)이었다. 해방 후 월북한 그는 1963년 스에마쓰의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는 논문(‘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진출’)을 발표한다. 일본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논문을 소개한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는 “자는 사람 귀에 물을 붓는 것 같은 기상천외한 견해”라 했다. 북한의 김석형은 1963년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에 맞서 이른바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진출' 논문을 발표했다. 임나일본부가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열도로 건너간 삼한 삼국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이른바 분국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가야인들이 오사카 지역에 세운 분국이 바로 임나라는 것이었다. ..
신라의 성문화는 '여성상위'였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이나 고종·이종 자매까지 아내로 삼았다.” 를 쓴 김부식은 “중국의 예속을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난다”면서 신라의 풍습을 평했다. 신라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웅변하는 고고학·역사학 자료는 많다. 예컨대 보량이라는 여인은 제22대 풍월주(화랑도의 수장·재임 637~640)인 양도공을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어버지는 다르지만 어머니(양명공주)가 같은 남매사이였다. 양도공이 남매간의 혼인을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꺼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을 껴앉고 말했다. “신국(神國·신라)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예로 하겠느냐.”() 경주 미추 왕릉 지구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토우장식 장경호. 다양한 성풍속이 보인다. 신라의 자유로운 성풍습을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