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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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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운 간디, 굶어죽었으면 좋겠다" “간디씨를 보니 놀랍고, 역겹다. 탁발승 모습으로 총독 관저의 계단 위를 반나체로 올라가는 꼴이라니….” 윈스턴 처칠은 1930년대 초 비폭력 자치·독립 운동을 펼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를 입버릇처럼 ‘반나체의 거렁뱅이’로 표현하며 증오했다. 그는 ‘불멸의 대영제국’을 외쳤던 제국주의자로서 ‘영국의 나치’로까지 일컬어지던 극우파였다. 이 때문에 영국이 유럽보다도 큰 대륙의 3억 인구를 통치해온 그 엄청난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처칠은 당시 영국 내의 ‘인도 자치’ 움직임에 분노했고, 비폭력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던 간디에게 극도의 분노감을 표한 것이다. 심지어 단식투쟁을 펼치던 간디를 향해 “굶어죽었으면 좋겠다”는 악담을 퍼부었단다. 처칠에게 간디는 ‘악의 축’이었던 것이다. 당시 인도 총독이..
'효수'에 얽힌 피맺힌 사연들 능지처참이나 참형의 극형을 받은 자의 수급(머리)을 매다는 것을 효수(梟首)라 한다. 장대에 꽂은 모습이 마치 올빼미(梟)의 머리(首) 같다 해서 이름 붙었다. “역적은 반드시 능지처참하고 그 머리는 3일간 저잣거리에 내걸며, 수족은 8도로 조리돌려야 한다.”() 1724년(영조 즉위년) 의금부의 상소를 보면 반역모반죄나 강상죄를 지은 자의 목을 내걸어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자고 촉구한다. ‘능지처참형(참형)→효수’의 극형을 받은 역사인물이 뜻밖에 많다. 1135년(고려 인종 13년) 서경(평양)에서 난을 일으켰던 묘청도 목이 잘린 뒤 저잣거리에 효수됐다. 깁신정변 실패후 망명 중 피살된 김옥균의 목은 양화진에서 효수됐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 때 참살된 김종서·황보인 등의 목도 모두 저자에 내..
가슴 먹먹한 '꼬부랑 할머니'의 추억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넘어가고 있네./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지난 6일 향년 87세로 별세한 작곡가 한태근씨(사진)의 유명한 ‘꼬부랑 할머니’ 동요이다. 작곡가는 생전의 언론 인터뷰에서 동요 ‘꼬부랑 할머니’를 짓게 된 비화를 이야기해주었다. “제가 칭얼댈 때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를 해주셨던 어머니가 어느새 꼬부랑 할머니가 되셨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꼬부랑 할머니’를 주제로 한 설화는 지방마다 다양하게 전해진다. 동요의 모티브는 ‘꼬부랑 할머니가 길을 가다가 일어난 재미있는 사건’이다. 각 지방의 설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꼬부랑’이라는 어휘를 첫말에 이어가며 재미있는 사건들을 계속 보태고 있는 것이다. “꼬부랑 할머니가~꼬부랑 똥을 누다가~꼬부랑..
'담배끊기'와 '작심 평생' 조선 최고의 애연가라면 문인 이옥(1760~1815)을 들 수 있다. 담배의 경전이라는 까지 쓸 정도로 끔찍한 애연가였다. 에 이옥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옥이 1795년 송광사 법당 안에서 ‘감히’ 담배를 꼬나물자, 스님이 “부처님 앞에서는 금연”이라며 막아섰다. 그러자 이옥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부처님 앞의 향로 연기도 연기요, 담배 연기도 연기입니다. 사물이 변해서 연기가 되고 연기가 바뀌어 무(無)가 되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등을 보면 담배가 조선에 들어온 때는 1616~1618년쯤 된다. 가 “담뱃잎 한 근이 말 한 마리 값이었다”고 쓸 만큼 담뱃값은 ‘금값’이었다. 그러나 담배는 단 5년 만에 조선 전역에 퍼졌다. 은 “백해무익한 물건임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이 요..
'토토가'와 X세대의 귀환 S.E.S의 ‘막내 요정’ 슈(본명 유수영)가 공연을 마친 뒤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세 아이를 키우느라 감춰두었던 끼를 마음껏 발산한 그의 소감은 소박했다. “엄마인 저에게도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슈뿐이 아니었다. MBC 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에 참여한 1990년대 가수들은 모처럼의 추억여행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시청률도 예능프로그램에서 마의 시청률이라는 20%를 훌쩍 넘겼다(22.2%)고 한다. 실제 ‘토토가’의 주시청층인 30~40대 가운데는 가수들의 공연에 ‘감정이 이입’되어 눈물을 흘렸다는 이들이 많았다. 아마도 가수의 ‘리즈’ 시절, 즉 황금기의 음악을 통해 그들 자신의 ‘젊은날의 초상’을 추억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