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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301

한국문화재 털어간 '큰 창고(오쿠라) 작은 창고(오구라)'는 누구? “장관님, 오쿠라(大倉)가 아니라 오구라(小倉)입니다.” 2015년 2월 웃지 못할 기사가 하나 떴다. 한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이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14년 11월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일본 문무과학성 대신에게 “오쿠라 컬렉션 등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문화재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전 경남 출토 금관’. 신라의 전형적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의 특성인 ‘초화(草花)’ 형 금관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쿠라와 오구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자성으로 오쿠라는 ‘대창(大倉)’이고, 오구라는 ‘소창(小倉)’이다. 예전엔 큰 대(大)자를 ‘오.. 2020. 12. 4.
15m '세한도'엔 중국 한국 문사 20명 댓글 달려있었네…여백 5m는 무엇? “절개가 견고하다가 급한 순간에 변하는 이도 있다…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세상을 떠나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심정으로 추사옹의 마음을 엿보다.”(장악진)1845년(헌종 11년) 청나라 명사 장악진(생몰년 미상)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본 뒤 남긴 감상평이다. 장악진 뿐이 아니다. 청나라 문사 16명과 조선의 오세창(1864~1953)·이시영(1869~1953)·정인보(1893~1950) 선생 등 4명까지 모두 20명이 ‘세한도’에 줄줄이 시쳇말로 ‘긴 댓글’을 달았다. 물론 20개의 댓글이 모두 ‘선플’로 도배했으니 ‘세한도’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 하다. 애초에 세로 23.9㎝, 가로 70.4㎝ 정도였던 ‘세.. 2020. 11. 27.
"해시계를 종로거리에 걸라"…세종대왕이 천기를 누설한 이유 “때를 아는 것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밤에는 자격루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려워…신(神)의 몸을 그렸으니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것이요. 해에 비쳐 각(刻)과 분(分)이 환하고 뚜렷하게 보이고, 길 옆에 설치한 것은 보는 사람이 모이기 때문이다.”1434년(세종 16년) 10월2일 기록이다. 세종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또하나의 발명품을 선보였다는 내용이다. 즉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시내 혜정교(종로 1가 광화문우체국 부근)와 종묘 앞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仰·앙) 가마솥(釜·부) 모양에 비치는 해 그림자(日晷·일귀)로 때를 아는 시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1859년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궁전 북쪽 끝에 설치한 빅벤보다 415년이나 빠른 공중시계탑이라 할 수 있다.국외소.. 2020. 11. 20.
'돌담장으로 폐쇄한 성문'…통곡하며 헐어야 했던 강화성의 흔적 13세기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몽골군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바로 물에 대한 경외심이었다. 부족을 통합한 칭기즈칸(재위 1206~1227)이 ‘물이나 재에 방뇨하는 자는 사형이 처한다’(제4조), ‘물에 손 담그는 것을 금한다. 물은 반드시 그릇으로 떠야 한다’(제14조)는 법을 제정했을 정도였다. 물이 부족한 초원·사막지대에 사는 부족이었기에 당연했다.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 도읍을 옮긴 고려가 쌓은 강화 중성의 흔적. 몽골의 압력으로 성을 폐쇄한 뒤 돌담장으로 메워버린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 면에서 고려조정이 몽골군이 침입하자(1231년) 강화섬으로 피란처를 삼은 것은 신의 한수였다고 할 수 있다(1232년). 고려는 강화섬에 궁성에 해당되는 내성과 도성 격인 중.. 2020.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