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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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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의 독설, 뒷담화에 상처받은 영혼들 “서화를 감상하는 데는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 같아야 그 진가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150여 년 전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절친 권돈인(1783~1859)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술 감상법이다. 서화를 감상할 때는 사찰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눈처럼 무섭게, 그리고 세금을 거두는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처럼 치밀해야 한다는 뜻이다. 추사라면 그럴 자격이 있었다. 글씨 뿐 아니라 그림, 시와 문장, 그리고 고증학과 금석학, 다도(茶道)와 불교학 등 섭렵하지 않은 분야가 없는 천재이기 때문이다. 전설의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낸 이도 추사였고, 해동의 유마거사라 통할만큼 불교의 교리에 밝았던 이도 추사였다. 그 뿐인가. 다산(정약용), 초의선사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다성(茶聖)..
'침 뱉는 양아치들…' 독설가 박제가가 전한 18세기 한양거리 지금으로부터 꼭 226년 전인 1792년(정조 16년) 4월 24일 정조가 규장각 관리들에게 시험문제 하나를 낸다. “사흘 뒤 묘시(卯時·오전 5~7시)까지 를 보고 시(詩)를 지어 바쳐라.” 한양의 저잣거리 풍물을 그린 대형 두루마리(병풍), 즉 의 완성기념으로 시(詩) 한 편 씩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규장각 관리들에게는 엄청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끄적끄적 몇자 안되는 시를 완성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각각 200구, 1400자가 넘는 장편시를 제출하라”는 지엄한 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조가 어영부영한 군주인가, 본인이 직접 답안지를 체크하고 등수를 일일이 매긴 다음 시험지에 촌평까지 해주었다, ■"제 점수는요?" “음, 신광하는 ‘소리가 있는 그림(有聲畵)’이고, 박제가는 ‘말할 줄 아는..
조선의 소설열풍과 요지경 댓글문화 “한글 소설책을 읽어준다고? 아니야. 한문책을 읽어야 잠이 잘 와.” 1758년(영조 34년) 도제조 김상로(1702~?)가 좀체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영조에게 “오늘 밤 제가 읽어주는 언문(한글) 소설책을 들으시면서 잠자리에 들으시라”고 권했다. 그러자 영조는 “한글소설이 아니라 한문소설을 읽어야 잠이 올 것”이라면서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아재 개그’ 한편을 들려주었다. “예전에 어떤 아낙이 아기가 울자 한문책으로 얼굴을 덮어주었네. 이웃집 사람이 그걸 보고는 ‘아니 왜 하필 한문책으로 아이 얼굴을 덮냐’고 물었네. 그러자 그 아낙은 이렇게 말했네. ‘아이 아버지가 잠을 청할 때마다 한문책을 읽읍디다. 그래서 나도 아이를 재우려면 한문책을 얼굴에 덮어줍니다.’ 어떤가. 아이 어미 말이 맞지 않은가. ..
비무장지대엔 육체파 여배우 '제인러셀 고지'가 있다 “에리(Eerie·해발 183m)고지 제3벙커 안에 수류탄을 던져 넣자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라모스 중위는 적병이 모두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벙커 입구 4m까지 다가왔다. 그 때였다. 별안간 중공군 2명이 소총을 난사하며 뛰쳐나왔다. 라모스 중위가 칼빈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자 중공군 3명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국방부 전사편찬위, 1980년) 1952년 5월21일 새벽 4시 임진강 지류인 연천 역곡천 지류에 인접한 에리고지(Eerie·해발 183m)에서 필리핀 제20대대 수색중대 2소대의 작전이 펼쳐졌다. 에리고지는 아스널·요크·엉클과 함께 티본고지(T-bone·290m)의 전초기지였다. 1950년대 육체파 배우 제인 러셀. 비무장지대 격전지인 오성산 고지군에 제인러셀의 가슴을 ..
끔찍한 상상…도굴왕 가루베가 무령왕릉 찾았다면 “백제문화연구의 대표 전문가다. 전문적인 훈련이 부족했지만 문헌사, 고고학, 미술사 등 다양한 제반자료를 넘나들며 총합적으로 접근하는 향토사가의 면모였다.” “아주 나쁜 놈이었다. 송산리 6호분을 완전히 파먹은 자였다. 영원히 잊지못할 악질 도굴꾼이요, 유물약탈자였다. 일본인 사회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제강점기 충남 공주를 무대로 활동한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을 둘러싼 지역 학계와 주민들의 평가는 복잡다단하다. 그도그럴 것이 공주를 근거로 활동한 학자들은 가루베가 닦아놓은 길을 지나가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라는 공간을 학문적인 토대로 만든 최초의 근대학자라는 평도 나온다. 하지만 가루베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보면 그러한 긍정 평..
'달항아리와 백자대호', 이름만 바꿨을 뿐인데… “세벌대기단, 굴도리, 겹처마, 팔작지붕, 오량가구…도종환 (문화부)장관님, 뜻을 한번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5월29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 자리에서 청와대 안의 누각(침류각·시유형문화재 103호) 안내판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하여 필자가 ‘오량가구’를 포털사이트에서 찾아보았더니 ‘종단면상에 도리가 5줄로 걸리는 가구형식’이라 했다. 갑자기 멘붕에 빠졌다. 종단면은 무엇이고, 도리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도리’를 찾아봤다. 청와대 안에 조성된 침류각의 안내판, 어려운 전문용어들로 가득차 있다.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라 했다. ‘오량가구’를 설명하는 그림을 아무리 쳐다봐도 이해불능이었다. 이번에는 ‘세벌대기단’을 찾았다. ‘장대석을 세켜로 쌓아 만든 지반’..
"기생들이냐" 박정양 초대주미공사의 '워싱턴' 데뷔기 “미국은 유럽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세운 나라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않으려는 대인배의 나라다.” 청나라 외교관으로 주일청국참찬관이었던 황준헌(1848~1905)은 에서 미국을 ‘대인배의 나라’라 평했다. 이 책자를 읽은 조선 조야의 반향은 엄청났다. 재야에서는 보수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센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났지만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됐다. 고종 역시 ‘영토의 야심이 없는 대양인(大洋人)’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훗날 제2대 주미공사를 지낸 이하영(1858~1929)의 글을 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1888년 1월 초대 주미공사로 내정된 박정양 등 사절단 일행이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려고 백악관을 방문한 모습을 ..
비무장지대에 지하만리장성이 있다 “여러분은 운이 좋은 겁니다. 오전에 오신 분들은 비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소나기가 막 그친 5월 어느날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승리전망대(해발 495m)에서 바라본 오성산은 그야말로 한폭의 동양화 같았다. 철원군청에서 나온 해설사가 “저렇게 맑고 깨끗한 오성산 주변과 북한 지역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여러분의 음덕”이라고 했다. ■오성산의 봄날 저 멀리 해발 1062m의 오성산이 손에 잡힐 듯 하고 그 앞으로는 이른바 저격능선(Sniper ridge) 이 이어졌다. 오성산 정상에서 볼 때 저격하기 딱 좋은 능선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저격능선 뿐이 아니다. 오성산을 중심으로 한국전쟁 때 치열한 접전의 장소였던 고지가 줄줄이 이어진다. 오성산 남방에 있는 봉우리가 해발 598m인 삼각고지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