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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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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왜 마부를 공신명부에 올렸을까 “…너는 낮은 신분으로서 임금의 어가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이뤘고…. 험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마부의 역할을 다했으니….” 최근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가 일본 교토대(京都大) 부속도서관에서 찾아낸 이른바 ‘오연의 호성공신교서’ 중 한 대목이다. 호성공신교서는 1604년(선조 37년)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임금(聖)을 의주까지 호종(扈)하는데 공을 세운 86명에게 내린 교서이다. 선조는 이때 무공(武)을 떨친(宣) 선무공신 18명과 1595년 이몽학의 난(亂)을 진압(淸)한 청난공신 5명에게도 작위를 내렸다. 그런데 86명의 호성공신 중에는 내시(24명)와 이마(마부·어가 담당) 6명, 의관(어의 허준 등) 2명, 별좌 및 사알(왕명 전달) 2명도 포함되었다. ..
일제는 왜 낙랑과 가야 발굴에 혈안이 됐을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1500~5000점 가량의 낙랑유물이 소장돼있다. 아직 유물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 대량의 낙랑유물이 일제시대 때 집중 발굴됐다는 점이다. 그 뿐이 아니다. 박물관에는 3만8000여 장의 유리건판사진이 있다. 이 또한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 등이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찍어놓은 민속·인물·고고학 자료들이다. 1931년 평남 대동군 남정리 낙랑고분 발굴현장. 일제는 한국역사의 타율성 정체성을 밝혀내기 위해 낙랑고분을 집중 조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대화혼을 심어줘야” 그 가운데는 전국 각지의 남녀 신체 측정 사진까지 포함돼 있다. 나치가 골상학까지 연구해서 유태인들을 ‘더러운 피가 흐르는 종족’으로 치부하여 멸종을 시도한 것을 떠올리면 ..
'기생들의 오빠' 신윤복이 연모한 '미인', 그녀는 누구인가 근자에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보물 1973호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가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미인도’는 과연 신윤복이 붙인 제목인가. 독자의 입장에서 각종 자료를 들춰보니 그게 아니었다. 후대에 붙여진 제목이었다. 가만보면 배경없이 그려진 여성의 전신 그림을 ‘미인도’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정하지 못한 제목이다. 생각해보라. 고려·조선시대의 남자상을 ‘미남도’라 하는가. 누구인지 모르면 그림의 주인공을 애써 찾아 ‘○○의 초상화’라 굳이 이름 붙인다. 그러나 여성의 그림은 어떤 경우 ‘특정한 인물의 초상화’ 인 것 같은데 주인공을 찾거나 적당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미인도’라 쉽게 명명한다. 이 경우 어떤 현상이 빚어지는가.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그저 '미인도'라는 제목으..
개(犬)무덤에 왜 통일신라인의 지문이 찍혔을까 “단장님, 이건 꼭 남근 같습니다. 아무래도 안압지에서 출토된 적이 있는….” 대학원생(성균관대) 신분으로 조사에 참여하고 있던 김성태씨가 흥분해서 조유전 조사단장을 찾았다. 김성태씨는 무덤 속에 퇴적돼 있던 흙더미 속에서 범벅이 되어 버린 유물 한 점을 들고 나왔다. 꼭 남근처럼 생긴 유물이었다. ◇무덤에서 웬 남근이? 1986년 7월 18일. 경주 용강동 폐고분을 발굴 중이던 경주고적발굴단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널길, 즉 연도와 무덤 방이 닿는 곳에 마련된 빗장 문을 열고 들어가 무덤내부에 쌓여있는 흙을 제거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핏 보아 남우세스럽게 생긴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이상한데. 그늘에서 흙을 잘 털어보도록 하지.” 용강동 고분에서 확인된 흙인형. 춤추는 동작인데, 태껸동작이 아니냐는 ..
임진왜란 중 항복한 일본인은 1만명이었다 일본인 출신으로 귀화한 인물 가운데는 사야가(沙也加·김충선)이 첫손가락으로 꼽힌다. 사야가는 1592년 4월15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 제2진의 선봉을 맡아 부산포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부하들과 함께 귀순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을 보면 단순한 항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정 전부터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요순삼대(요순시대와 하상주 3대를 일컬음. 예의가 넘치는 태평성대를 의미함)의 유풍을 사모해서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귀화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야가는 특히 “난 힘이 없어 항복한 게 아니다”라고 애써 강조한다. 동래부사 순절도에서 보이는 왜군들. 가토 기요마사군의 선봉에 선..
광화문 현판, "아니 어떤 X의 작품이야"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서예솜씨를 자랑한 이는 누구일까. 일단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뛰어난 서예실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년기부터 한학을 배우고 서예를 연마했으니 그럴만 하다. 기교가 뛰어나고 기운이 웅혼하다는 평을 받는다. 윤보선 대통령의 글씨에서는 소박한 필의가 느껴진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대구사범 시절부터 김용하(1896~1950)로부터 서예를 배웠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소전 손재형(1903~1981)을 사사했다. 손재형 앞에서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을 정도로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전문교육을 받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는 군인출신답게 굳세고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대도무문(大道無門)’으로 유명한 김영삼 대통령은 독창적인 글씨체를 자랑했으며, 대자서(大字書)를..
현충사, 꼭 박정희 현판이어야 하나 “노인을 봉양하는 연회를 베풀면 어떻겠사옵니까.” 1771년(영조 47년) 20살이 된 세손(훗날 정조)이 임금(영조)에게 ‘노인봉양잔치’를 권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런데 할아버지 영조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상소문의 내용보다는 먼저 “세손의 글씨가 어떠냐”고 대신들에게 물었다.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자 이번에는 “문체가 어떠냐”고 하문했다. 대신들이 “아주 훌륭하다”고 하자 그제서야 “세손의 뜻대로 양로잔치를 베풀라”고 했다. 영조의 다음 한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세가지 기쁜 일이 있다. 세손이 양로연을 청한 것이 하나이고, 글을 잘 지은 것이 하나이며, 글씨를 잘 쓴 것이 하나이다.”() 영조는 훌륭한 왕재로 성장한 세손(정조)의 글씨를 특별히 칭찬하고 있는 것이다. 1966년..
문재인 대통령은 왜 장군들에게 양날의 칼을 내렸을까 검(劍)이란 무엇인가. ‘밑동에서부터 끝까지 고르고 순수하게 단련된 양날의 칼’이다. 신석기 유적인 함북 웅기군 굴포리의 서포항 패총 등에서 출토된 골제단검은 짐승의 다리뼈를 쪼개 끝부분을 갈아서 예리한 칼날을 세워 만들었다. 청동기 시대 들어서는 마제석검이 등장했다. 문자그대로 점판암을 아주 정교하게 갈아서 만든 짧은 석검이다. 이 마제석검은 중국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 전통의 무기 또는 도구라 할 수 있다. 사냥용이라기보다는 개인간의 싸움이나 호신의 무기로 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청동기와 철기시대 들어 다양한 동검, 혹은 철검이 등장한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기는 청동단검이다. 이른바 비파형 동검의 형식이 발전된 세형동검이 한반도에서는 유행했다. 비파형 동검은 검신, 즉 칼의 형태가 비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