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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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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된 국보 보물들, 무슨 까닭인가 영구결번이라는 게 있다. 스포츠나 항공기, 철도 등에서 특정 번호를 다시 사용하지 않도록 한 것을 의미한다. 스포츠의 경우엔 명예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항공기나 철도의 사고에 따른 영구결번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국보와 보물에도 ‘영구결번’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국보는 274호와 278호, 두 건이지만 보물은 5호·163호·341호·458호·476호·479호·864호 등이 모두 ‘영구결번’ 문화재다. 그렇다면 문화재의 ‘영구결번’은 명예의 의미일까 불명예의 뜻일까. 먼저 국보 274호 영구결번 이야기부터 해보자. ■“한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一射敵船 必水葬)” 1992년 8월10일 경남 통영시 한산면 문어포 앞바다까지 고무보트를 타고 온 해군 소속 대령과 하사 1..
신발 흙 털다 발견한 신라 진흥왕의 포고문 “ 내 너에게…” "별것 없을 겁니다. 여태껏 여러 대학과 여러 학자들이 조사했지만 허탕만 쳤습니다." 1978년 1월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끄는 단국대조사단이 충북 단양을 찾았다. 온달의 유적을 찾고, 죽령을 중심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벌이기 위함이었다. 맨먼저 단양군청을 찾았는데 시큰둥한 반응만 얻었다. 지금까지 많은 조사단이 오갔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새해벽두부터 뭐 그렇게 헛걸음 했느냐는 식이었다. 그러나 조사단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단양 읍내 뒷산인 성재산(해발 323m·적성산성)을 찾았다. 오후 2시. 조사단은 간밤에 내린 눈이 하얗게 뒤덮은 산에 올랐다. 정영호 교수는 학생들에게 한가지 약속을 했다. “성 안에는 옛날 식의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지. 대부분이 ..
문무왕은 왜 망국의 태자 부여융과 취리산 조약을 맺었을까 “665년 8월 문무왕은 당나라 칙사 유인원과 웅진도독 부여융과 취리산에서 회맹했다.” 가 기록한 ‘취리산 회맹’ 기사의 시작이다. 기사가 전하는 취리산 회맹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무도한) 백제를 평정했다. 그러나 당나라 소정방이 군사를 돌려 귀국하자 남은 백제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 고종은 당나라에 끌려간 부여융(백제 의자왕의 아들)에게 “귀국해서 백제의 남은 무리를 다스리며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이미 4개월전 신라 문무왕에게 계림도독의 관작을 내린 당 고종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했다. 결국 665년 8월 당나라를 대표한 유인원의 주도아래 계림도독(문무왕)과 웅진도독(부여융)의 회맹이 이뤄진 것이다. 신라 문무왕, 백제 부여융이 당나라 ..
아무도 눈치 못챈 세종의 '숨겨진 업적’…그걸 지켜낸 조선의 민초들 “지금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충주에만 있으니 염려스럽습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훈민정음 창제와 해시계·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 장려,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 그리고 편찬 등 손으로 꼽을 수 없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적다.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책을 보관할 사고(史庫)를 확충한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사고는 내사고(서울 춘추관)와 외사고(충북 충주) 등 2곳 뿐이었다. 이중 과 , 등이 보관된 곳은 외사고인 충주사고 뿐이었다. 그러니 내내 불안했다. 민가와 섞여있는 사고에 불이라도 나면 끝장이었다. 급기야 1439년(세종 21년) 사헌부가 상소문을 올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사고에서 실록을, 경기..
뼈대있는 마한출신 가문 5대가 묻힌 백제시대 선산 2003년 12월 충남 공주 수촌리에서 백제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불과 300평 남짓한 구릉 한편에서 백제 무덤 6기가 확인됐는데 그 속에서 금동관모 2점과, 금동신발 3켤레, 중국제 흑갈유도자기 3점, 중국제 청자 2점, 금동허리띠 2점, 환두대도 및 대도 2점 등 백제사를 구명할 수 있는 찬란한 유물들이 쏟아졌다. 이렇게 많은 백제의 금동제 유물이 쏟아진 것은 무령왕릉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지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청동기 세트의 현현 대체 어찌된 일인가. 시계를 두달 전인 2003년 10월로 돌려보자. 수촌리 현장은 동편 뒤로는 산을 등졌고, 서편 앞쪽으로는 드넓은 정안 뜰이 펼쳐져있는 명당이었다. 예부터 홍수가 나면 정안뜰까지 물이 들었다고 해서 수촌리(水..
무령왕비 빈전을 찾아 조문하다 1995년 충남 공주에서는 금강을 따라 공주~부여를 연결하는 백제큰길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해발 67m인 야트막한 산(정지산)을 절단할 참이었다. 이미 금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백제큰다리)의 교각공사는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공주는 웅진백제의 고도가 아닌가. 시 전체가 유적·유물밭이므로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문화재지표조사가 선행되어야 했다. 지표조사는 국립공주박물관이 맡았다. 만약 정지산의 지표에서 유물·유구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절단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지산 주변에서 백제시대 유물이 채집되었다.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96년 2월부터 정식발굴조사가 시작됐다. 발굴은 박물관에서 가장 젊은 학예사(이한상 현 대전대 교수)가 맡았다. 발굴이 진행될..
'또 하나의 궁궐' 회암사는 왜 폭삭 무너졌을까 “천보산중(天寶山中) 회암사(檜岩寺) 보광명전(普光明殿) 사교각(四校角)~현금탁(縣琴鐸)~” 2000년 5월 어느 날 점심 무렵. 양주 회암사 6단지를 조사 중이던 경기도 박물관 발굴단원의 눈에 이상한 유물이 걸려들었다. 보광전 건물지 앞쪽에서 글자가 새겨진 청동유물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채 발견된 것이다. 현장책임자인 송만영(당시 경기도박물관 학예사)을 비롯한 발굴단은 명문 청동기의 출현에 아연 긴장했다. ‘천보산 중턱의 회암사 보광전 네 모서리에 달린 금탁’으로 시작된 명문 청동기에는 무려 13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명문은 “功德主 嘉靖大夫 判內侍府事 李得芬”으로 끝나는 공덕주 이득분의 발원문(發願文)이었던 것이다. 1997년 첫 발굴이후 처음으로 나온 ‘회암사’라는 이름이었으므로 눈이 번쩍..
공자김치, 뇌물김치, 곤쟁이김치…김치열전 “무신년(1608년) 이후 잡채상서니 침채정승이니 하는 말들이 세상에 나돌았다. 이는 잡채나 침채를 상납해서 총애를 얻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신흠(1566~1628)의 에는 ‘잡채상서(雜菜尙書)’니, ‘침채정승(沈菜政丞)’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임금인 광해군에게 채소모듬음식인 잡채와 침채, 즉 김치를 뇌물로 상납해서 장관(상서) 혹은 재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김치가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가 인상 쓰면서 먹은 김치 김치의 원형이 절임채소라면 공자도 김치를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진나라의 여불위가 펴낸 ‘우합(遇合)’조에 그 사연이 등장한다. “주나라 문왕이 창포저를 매우 좋아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얼굴을 찌푸려가며 (창포저를) 먹었는데 3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