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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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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성이 항복했구나! 백제의 이름이 끊겼구나!" ‘백제 부흥운동 거점 부안 우금산성 남문지 확인.’ 올들어 두차례에 걸쳐 들어온 문화재청의 보도자료의 제목이다. 요컨대 ‘부안 우금산성은 백제부흥군의 최후 거점성’이라고 명시해놓은 것이다. 산성을 발굴한 전북문화재연구원은 더 나아가 “(몇몇 학자들이) 우금산성을 백제부흥군의 최후 거점성인 주류성이라고 주장했다”면서 산성조사의 경위와 목적을 밝혔다. 물론 학계에서도 우금산성을 백제부흥군(660~663)의 최후거점이자 임시수도로 보고자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핮 하지만 여러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어떤 확실한 유물이나 유구가 나온 적은 없다. 우금산성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문화재청이 우금산성과 관련된 보도자료를 내면서 ‘백제 부흥군의 최후 거점’ 운운하는 표현을 쓴 것은 잘못됐다. 국..
마오쩌둥 밴플리트 이회영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난달 22일 북한에서 중국인 관광객 32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사망자 시신과 부상자를 후송하는 전용 열차에 올라 침통한 표정으로 전송하며 “속죄한다”고 했다. 이를 두고 사망자 중에 뭔가 중요한 인물이 포함된게 아니냐는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특히 중국인 관광객들의 행적이 관심을 끌었다. 교통사고가 한국전쟁에서 숨진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묻혀있는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 사망자 묘역’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화교권 매체는 “사망자 가운데 마오쩌둥 주석의 차남인 마오안칭(毛岸靑)의 외아들, 즉 마오쩌둥의 손자인 마오신위(毛新宇)가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마오 주석의 유일한 적손인 마오신위는..
"강보에 싸인 두 병정아!"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 “선생님, 제가 채소바구니를 짊어지고 날마다 홍구(虹口·훙커우) 방면으로 다니는 이유가 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上海·상하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으니 선생님께서….” 1932년 4월1일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충남 예산에 아내와 세 자녀를 남겨둔채 혈혈단신 상하이로 건너온 24살 청년 윤봉길(1908~1932)이었다. 청년은 피혁공장과 세탁소 등에서 일하다가 훙커우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백범을 찾아온 용건은 “(이봉창 의사처럼) 제발 나를 독립운동 자원으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김구 선생은 허심탄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청년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끝..
판문점의 어제와 오늘…무슨 일이 일어났나 1951년 7월8일과 10일 유엔군과 공산군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1년을 훌쩍 넘긴 한국전쟁을 끝내기 위한 휴전회담을 시작된 것이다. 7월8일 열린 예비회담(광문동 민가)과 10일 본회담(내봉장)은 모두 개성에서 열렸다. 개성이 한국전쟁 전의 분단선인 38도선상의 도시라는 점이 감안됐다. 즉 1951년 6월30일과 7월1일 유엔군측이 “휴전을 위한 예비회담을 원산비행장이나 개성~임진강 사이의 국도상에서 개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공산군측은 “그럼 회담장소를 38도선 상의 개성으로 하자”고 회답했다. 개성이 한국전쟁 이전에는 38도선상에 있었기 때문에 회담장소로 낙점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성지역이 그 당시 공산군측의 치하에 속했다는 게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1951년 11월9일 판문점에서 열린 ..
'팀킴' 화가 김득신이 그린 '조선 최고의 짤방' 조선 후기 풍속도의 계보는 김홍도(1745~)-신윤복(1758~?)로 이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민들의 일상과 애환을 진솔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한 김홍도와, 양반과 기녀들의 사랑과 일탈을 때로는 애로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그려낸 신윤복의 풍속도가 워낙 빼어났다. 하지만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사이에 또 한사람의 풍속화가가 있다. 김홍도보다는 9살 아래, 신윤복 보다는 4살 위인 긍재 김득신(1754~1822)이다. 김득신의 대표작인 ‘파적도(야묘도추)’.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도망가는 장면을 포착했다. 어미닭은 시뻘건 두 눈을 부릅뜬채 고양이를 향해 달려들고 병아리들은 사방으로 도망친다. 이 모습을 본 주인영감은 돗자리를 짜다말고 곰방대를 후려치며 뛰어들지만 역부족이다. 툇마루에서 그만..
15살에 신라 가야 백제인은 나라를 구했다 “온조왕 41년(기원후 23년) 한수 동북쪽의 여러 부락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수리했다.” “진사왕 2년(386년)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국경을 방비하는 관문을 설치했다.” “전지왕 13년(417년) 동·북부의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았다. 병관좌평 해구(解丘)가 공사를 감독했다.” “동성왕 12년(490년) 북부의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현성과 이산성 두 성을 쌓았다.” “무령왕 323년(523년) 한강 북쪽 백성 중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게 하였다.” 김해 퇴래리 고분에서 발굴한 것으로 4세기 무렵 가야의 철기 문화 수준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온조왕의 유훈 ‘백제 본기’에 등장하는 기사다. 모두 15살이라는 공통점이..
1800년 논쟁 부추긴 조조의 '가짜무덤설' 2009년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시가오쉐촌(西高穴村)의 가마터 일꾼들이 벽돌을 만들려고 진흙을 파다가 깜짝 놀랄만한 고분과 유물을 찾아냈다. 2009년에 이어 2016·2017년 세차례 발굴결과를 종합한 중국 허난성 문화재고고연구원은 “이 고분은 조조의 무덤”이라고 확정했다.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까. 우선 고분에는 금은 공예품과 토기, 칼과 칼집, 명문 돌판 등 250여점의 공예품이 들어 있었다. 조조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명패. '위무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또 무덤에서는 60~70대 남성과 여성 두 명의 유해가 발견됐다. 남성은 조조가 분명하고, 여성 둘은 위나라 초대 황제인 조비와 조식의 어머니인 변씨와, 맏아들 조앙의 어머니이자 일찍 죽은 류씨인 것으로 추정됐다. 특히 삼..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곰뼈인가?” “아니야. 사람뼈 같아.” “근데 사람 뼈치고는 좀 이상하지않아?” 1856년 여름 독일 뒤셀도르프 근처 네안더 계곡 위쪽의 펠트호프 석회암 동굴에서 채석한 돌을 고르고 있던 석공들이 웅성웅성댔다. 작업하던 삽날에 이상한 뼈들이 걸려나온 것이다. 형태로 보아서는 사람의 뼈 같은데 대퇴골이 너무 두껍고 굴곡이 져 있었다. 특히 이마에 엄청난 크기의 뼈가 튀어나와 있었다. 돌출이마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추측이 난무했다. 돌출이마라면 혹여 심각한 스트레스를 동반한 마음의 병을 앓았던 사람의 뼈인가. 복원된 네안데르탈인. 돌출이마와 두껍고 굴족진 대퇴골의 소유자이다. |전곡선사박물관 제공 ■1856년 네안더 계곡에서 생긴 일 하지만 채석공들을 비롯한 당대의 사람들은 이 ‘돌출이마’가 누구인지 깨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