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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어느 재야사학자 '분투기'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무즙파 vs 창칼파, '엿먹인 '중학입시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로 적어 놓은 것이다. 1.찹쌀 1kg 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2.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3.이 밥을 물 3ℓ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4.이것을 엉성한 삼베 주머니로 짠다. 5.짜 낸 국물을 조린다. (문제 18) 위 3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①디아스타제 ②무우즙 3)4)…. 1964년 12월7일 치른 서울시내 전기 중학교 입시 자연 18번 문제. 엿을 만들 때 엿기름대신 넣어도 되는 것을 묻고 있다. 정답은 디아스타제였지만 무즙도 맞는 것으로 처리돼 이른바 무즙파동이 일었다.|경향신문 자료 ■무즙이냐 디아스타제냐 1964년 12월7일 치른 서울시 전기중학 공동출제 입시문제 가운데 ‘자연 18번’..
북한산성에 금괴가 묻혀있다? “전설에는 행궁터에 70만원의 정제금괴가 묻혀있다고는 하나 믿을만한 것은 못되지만, 연전에 이 부근 땅속에 막대한 암염과 목탄 수만관을 발굴했다는 것은 사실이니….” 1939년 10월28일 동아일보(‘북한산 일순(一巡)-하이킹 코스’)는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냈다. “잡초 황량하고, 충성(蟲聲·벌레소리) 무성한 행궁터에서 묻혀있다는 ‘금괴매장’의 소문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에는 “북한산성 내에 은 1만2250냥(460㎏)과 소금 50석, 숯 2120석을 창고에 보관했거나 땅 속에 묻어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괴는 아니지만, 당시 무역의 주요 결제수단인 은을 다량 보관했던 것이다. 더구나 1년 전에 행궁터에 엄청난 양의 암염과 목탄이 발굴된 것은 사실이라지 않는가. 은매장..
숙종, 영조, 정조가 북한산성에 오른 까닭 18세기 . 한양도성과 함께 북한산성까지 그려놓았다. 숙종은 1711년 성곽을 완성시킨 뒤 연잉군(영조)의 손을 잡고 북한산성에 올랐다. 원래는 도성 북쪽의 직선로를 따라 올라야 했지만, 길이 험해 서북쪽 길로 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대동문을 통해 수유리쪽으로 길을 잡았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기 위한 행차였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북한산성) 대서문 입구에서 뒤돌아보니~시름 절로 풀리네. 도성의 지척에 금성탕지 있으니 내 어찌 서울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숙종의 북한산성 행차 기념시) 1712년4월10일(음력) 아침, 임금(숙종)이 막 수축을 끝낸 북한산성 행차에 나섰다. 북과 피리소리가 울려퍼진 가운데, 기병 수천명의 호위를 받은 왁자지껄한 ‘행행(行幸)’이었다. 연잉군(당시 19살..
국민과 인민, 그리고 황국신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1960년~70년대 ‘국민’(초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이 지금도 줄줄 외울 수 있는 것이 ‘국민교육헌장’의 전문이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도덕시간이나, 애국조회 때마다 암송을 해야 그 날 수업이 무사히 넘어갔다. 58년생인 김한종 교수(교원대)의 회고담에서 당대 국민학생들의 당혹감이 절절이 배어나온다. 1970년대 교과서에 실린 국민교육헌장 전문. 당시 국민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의 글자수가 몇자인가'라는 시험까지 봐가야 달달 외워야 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도덕시험은 대체로 좋은 말이 포함된 답안만 고르면 맞는 경우가 많아 가장 쉬었다. 그런데 첫번째 문제를 보는 순간 경악했다. ‘1.국민교육헌장은 몇 자인가.’ ~입으로 웅얼거리며 손가락..
패전의 병자호란, 그러나 '대첩'도 있었다. “우리 임금님, 우리 임금님,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而去乎)” 1637년 1월30일은 우리 역사상 가장 기억하기 싫은 날 중의 하나이다. 병자호란 패배로 인조 임금이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스런 날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에서 나온 인조는 청나라 태종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 즉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해야 했다. 말이 ‘조아린다’는 것이지 실은 머리를 찧어 피가 날 정도로 용서를 비는 절차였다. 이마저도 청나라가 봐준 것이었다. 원래 청나라는 인조의 두 손을 묶고 구슬을 입에 문채 빈 관을 싣고 나가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 굴욕적인 ‘항복의 예’는 진나라 3세황제인 자영이 한나라 유방에게 항복하면서 노끈을 목에 걸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
적의 목을 졸라라! “가을바람이 차가운데 병사들은 홑겹의 옷만 입고 있습니다. 환자가 늘고 있습니다. 적군 항공기의 폭격으로 교량이 끊겨 도로가 붕괴됐고, 물자도, 식량도 바닥났습니다.” 1951년 10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총사령 펑더화이(彭德懷)가 녜룽전(섭榮臻)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대리에게 급보를 보낸다. 적(유엔군)의 ‘보급로 차단 작전’ 때문에 큰일났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수는 1951년 6월 들어 77만명으로 급증했다. 1950년 10월 첫 참전 때 30만명이었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늘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군을 잠못들게 하는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보급물자의 원활한 공급이었다. 제공권과 제해권을 유엔군측에 장악당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물자 소모량은 엄청난데 운송수..
지긋지긋한 학교, 누가 만들었나 “왜 집에서 빈둥대느냐? 제발 철 좀 들어라. 학교에 가서~ 선생님 앞에서 과제물을 암송하고~ 거리에서 방황하지 마라. 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느냐?”(아버지) 기원전 1700년, 수메르인 아버지가 말썽꾸러기 아들을 다그친다. 학교에 가지않고, 거리를 맴도는 아들을 마구 몰아붙이고 있다. “너에게 나무를 해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짐수레를 밀게 하지도. 쟁기를 끌게 하지도, 땅을 개간하라고 시키지도 않았다. ‘가서 일을 해서 날 먹여살려라’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노는 아들’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전한다. 동양에서는 은(상)시대에 처음으로 학교가 시작됐다. 지난 2008년 은(상)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중국 안양 인쉬에서 갑골문 발견 100주년 행사가 열렸다.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