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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비질'하는 그 남자는 왜 벗고 있었을까…청동기 노출남의 정체 ‘한반도는 금석병용기(金石倂用期)만 거쳤다.’ 1907~1934년 김해 회현동 패총 유적을 발굴한 일본학자들이 반색했습니다. 이곳에서 석기와 철기가 동시에 나오자 ‘얼씨구나!’ 했던 건데요. 이들은 ‘맞아 한반도에는 독자적인 청동기 시대가 없었어. 석기만 쓰고 있던 미개사회였는데, 중국(한나라)에서 철기로 무장한 선진문화가 밀려 들어와 석기-철기가 공존한 것일 뿐이야!’, 뭐 이렇게 단정한 겁니다. 일본학계는 한반도의 선사시대가 파행·정체되어 있었음을 강조하는 식민사관의 하나로 이 ‘금속병용기설’을 주장했는데요. ■터무니 없는 금석병용기설 그런데 1960년대 말부터 상서로운 조짐이 보입니다. 1967년 대전 괴정동에서 한 주민이 밭을 갈다가 심상치않은 청동기 유물을 수습하는데요. 국립중앙박물관의 긴급조사..
통째로 폐기된 250㎝ 백제 대작, 1400년전 장인은 왜 실패했을까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됐다.” ‘창세기 2장 7절’의 내용이다. 동양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백골이 진토(塵土·먼지와 흙)된다’는 오래된 표현이 있다. ‘사람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이 창조한 모든 문명의 이기나 예술품도 마찬가지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다. 백제예술의 정수라는 금동대향로를 보자. 무슨 객쩍은 소리냐 할 것 같다. 금속(구리)으로 제작된 향로를 두고 흙 운운하고 있다고…. 그러나 그 향로의 모체가 ‘흙’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왜냐. 향로의 틀(거푸집)을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굳은 밀랍(꿀벌 분비물)에 향로의 모형을 ..
24K 순금으로만 휘감은 백제 무령왕 부부…신라왕은 금은 합금 선호 “신체 발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건데…훼손시키지 않는게 효도의 시초다. 그런데 요즘 양반이나 평민 남녀 할 것 없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사헌부가 나서 엄벌하라.”( ) 1572년(선조 5) 9월28일 선조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다는 풍습을 엄단한다’는 비망기(특별담화문)를 발표합니다. 선조는 “이것은 부끄러운 오랑캐의 풍습”이라고 개탄합니다. 사실 선조의 언급은 팩트가 아닙니다. 은 연산군(1494~1506)의 서자로 9살 때 사약을 마시고 죽은 양평군 이인(1498~1506)의 인상착의를 말하면서 “귀에 귀고리를 꿴 구멍이 있었다”(1513년 1월7일)고 기록했거든요. 또한 이유원(1814~1888)의 ‘귀고리’ 조는 선조의 비망기 내용을 인용하면서 “중국에서도 아..
흙으로 빚었을 뿐인데…말 탄 가야 신라인이 '국보' 대접을 받는 이유 전국의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출토되는 가장 흔한 유물은 뭘까. 역시 점토로 빚어 구운 도기(질그릇 혹은 토기)일 것이다. 그런데 그중 국가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된 도기는 단 9건에 불과하다. 왜일까. ‘문화재보호법 제23조’가 규정한 국보·보물의 자격을 보자. ‘중요한 유형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할 수 있으며(1항), 보물 가운데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국보로 지정할 수 있다(2항)’고 했다. 짐작이 간다. 질그릇의 경우 너무 흔한 유물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많은 유물 중에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 받아야 겨우 국가지정문화재의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질그릇 중에 ‘국가지정문화재’, 그것도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유물’로 평가..
‘히힝~’, 천마 3마리가 보였다…신라왕 무덤인데 ‘금관은 뒷전’이었다 “7월 25일…(미리 예상했지만) 곡옥이 달린 나뭇가지 형태의 세움장식이 확실한 금관 일부를 확인했다.” 197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경주 155호분 발굴을 기록한 야장(발굴일지)의 7월25일자 내용입니다. 어째 좀 이상하죠. 명색이 신라 금관을 발견했는데, 짜릿한 흥분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금관총(1921년)-금령총(1924년)-서봉총(1926년)에 이어 4번째 금관 출토가 아닙니까. 게다가 155호 고분 출토 금관은 해방 후 첫번째로 수확한 금관이라는 의미가 있죠. 발굴된 금관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했구요. 그런데 발굴일지의 ‘예상했던 대로’라는 표현에 눈길이 갑니다. 해방 후 첫 발굴한 왕릉급(높이 12.7m, 밑지름 47m)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었으니까요. 금관 출..
북쪽으로 22.58㎝ '기우뚱' 한 첨성대, 정말 괜찮은건가 요즘은 황리단길과 벚꽃길도 각광을 받지만 경주 시내의 ‘랜드마크’는 역시 첨성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경주시내 한복판, 대릉원과 월성 사이의 평지에 다소곳이 서있는 첨성대는 남녀노소와 밤낮을 막론하고 사계절, 사진발 잘 받는 핫플레이스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첨성대를 볼 때마다 괜히 조바심이 납니다. 혼자 이리저리 나름대로 수평을 잡아보고, 기울어지지 않았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게다가 지난 9월 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경주 지역을 휘몰아쳤잖습니까. 왜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죠. 1400년 넘게 잘 버티고 있는 첨성대를 두고 걱정을 사서 하니 쓸데없는 ‘기우’라고 하시겠죠. ■지진 때문에 북으로 2.13㎝, 동으로 1㎝ 기움 그러나 마냥 ‘기우’는 아닙니다. 실제로 첨성대가 기울어졌으니까요. 2009년 발..
국보 '황금 띠고리'의 주인인 '낙랑인'은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자료(41만여점) 가운데 유독 낙랑 관련 유물과 사진이 눈에 밟힙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되고 촬영된 1만7000여점의 유물과 4053점에 이르는 유리 건판 사진이 그것입니다. 얼마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일제강점기 자료 조사 사업의 공개와 활용’ 관련 학술대회를 열었는데요. 그동안 박물관 소장자료를 재검토해서 특별전(‘낙랑·2001’)도 열고, 발굴보고서(·2002), ·2018)도 펴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발표 자료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보였습니다. ■알코올로 닦자 2000년전 글씨가 “평양 석암리 9호분 출토 노기(弩機·원거리용 화살발사장치)에서 ‘조자릉 용(趙子陵 用)’이라는 명문 묵서(묵 글씨)가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석암리 9호분은 유명한 국보 ‘황금제 띠고리’ 등 화..
부부가 아니네…'신라의 명품 귀고리'는 두 여성의 합장분에서 나왔다 ‘신라 최고의 명품 귀고리가 출토된 고분은 부부총이 아니었다.’ 9월 29~30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국립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자료의 공개와 활용’ 학술대회가 열렸다. 우선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한 고적 조사 사업에서 발굴·수집한 관련 자료(1912~1945년)가 603책 26만쪽이나 된다는 발표(양성혁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가 있었다. 또한 해방 후 이 자료를 인수한 국립중앙박물관이 2013년부터 ‘일제강점기 자료 공개사업’을 본격 시작하면서 10년째 검토하고 연구 조사한 뒤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발표문 가운데 필자의 시선을 유독 잡아 끈 대목이 있었다. ■부부가 아닌가봐 1915년 조사된 ‘경주 보문리 부부총’이 실은 ‘부부 무덤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