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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반도의 배꼽 ‘오리산’(上) -화산·용암평야… 고인류의 출현- “저기 낙타고지(432.3m) 보이죠. 낙타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죠. 그리고 바로 옆 자그만 산 보이죠.” 철원평야와 저 멀리, 갈 수 없는 땅 이북의 평강고원이 지평선처럼 펼쳐져 있는 곳. 동주산성(해발 360m) 정상에서 바라본 이북의 모습이다. 이우형씨(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가 잘 보라고 손을 가리킨다. “어디요. 저기 낙타고지 뒤에 있는 큰 산?” “아니 그건 한탄강 발원지인 장암산(1052m)이고요. 낙타고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산, 저기가 바로 오리산이에요.” 오리산(鴨山)이라고? 그저 동네 뒷산처럼 야트막한 산인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저 구릉이라고 여기고 흘려버렸을 저기가 오리산? “맞아요. 저기가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오리산입니다.” # 한..
광개토태왕 경험·지혜 배워라- 윤명철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 ▲생각의 지도를 넓혀라…윤명철|마젤란 광개토태왕’은 391년 18살의 나이로 고구려 태왕이 되었고 불과 39살의 젊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생각해보라. 독자 여러분이라면 39살에 무엇을 해놓고 죽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태왕은 누란에 빠진 조국을 일으켜 한민족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얻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백성들에게 천손의 나라임을 고취시켰고, 마침내 동아시아 지중해의 중핵으로 고구려의 위상을 높였다. 저자는 바로 그 ‘태왕’이 그렸던 ‘특별한 지도’를 거울삼아 미래를 개척하자고 제안한다. 광개토태왕의 지혜와 경험을 창조, 개방, 조화 등 3가지 측면으로 나누고 이를 27개의 코드로 세분화시켰다. 유목민의 특성을 바탕으로 농경민의 안정성과 수렵민의 민첩성을 접목시킨 태왕. 다민족·다문화 국..
임진진(하) 1592년 5월17일 이곳 임진진에서 펼쳐진 임진강 전투는 ‘한심 스토리’의 전형이다. 무기력한 조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임진왜란 반성의 기록(‘징비록’)을 남긴 서애 유성룡의 한탄이다. 그랬다. 서애의 반성을 더 들어보자. “순찰사들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 병무에 익숙하지 않았고, …요지(要地)를 지키지도 못했으며….” 한때는 철옹성(산성)을 쌓고, 필살의 청야전법을 쓰면서 수와 당나라 같은 제국을 망하게 하거나 번번이 골탕먹인 게 우리 민족인데…. 농업국가이자 유교국가인 조선의 방어체제는 어설펐다. # 태평성대의 그늘 세조(1417~1468) 때부터 조선의 방위개념은 진관(鎭管) 체제와 그 뒤를 이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
(14) 임진진(上) -임진왜란… 임금은 백성버리고, 신하는 임금 버리고- 민간인 통제선을 지나 포장 및 비포장도로를 거치자 확 트인 임진강 북안에 닿았다. 꽤나 고운 드넓은 모래사장이다. 때마침 썰물때다 보니 강폭이 제법 넓어보였다. “저 맞은 편이 임진진(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입니다.” # 비는 내리고… 다시 민통선 이남으로 건너가 맞은 편 임진진으로 달려갔더니 군 부대다. 민통선 이남이지만 군 시설이니 역시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다. 헌헌장부(軒軒丈夫) 군 장교의 안내로 임진진, 즉 임진 나루터에 닿았다. 고깃배 몇 척이 동양화폭처럼 고즈넉이 떠있다. 고기잡이가 허락된 몇 몇 어부의 것이라고 한다. 홍수에다 만조가 겹치는 날이면 이곳 임진강 나루는 완전히 물에 잠긴다. 지금은 건널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임진나루는 파주..
(13)매소성 대첩 현장에서(하) 2007년 5월 어느 날. 기자는 연천 대전리 산성을 찾았다. 강성문 육사 명예교수와 이우형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이 동행했다. 산성에 올라보니 과연 요처였다. 한탄강 줄기를 건너 그 유명한 경원선 철도와 3번 국도가 통하는…. 멀리 전차부대의 진로를 막는 용치(龍齒·전차부대 전진을 막는 인공요철)가 길게 설치돼 있다. 전곡의 넓은 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산성 곳곳에는 군진지가 설치돼있다. 옛 산성의 흔적은 거의 대부분 무너져있고, 조각조각 삼국시대 기와·토기편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군인들의 성지 한 30분이 흘렀을까. 답사차 이곳을 찾은 국방대학원 학생들과 맞닥트렸다. 보훈처장을 지낸 안주섭씨(예비역 육군중장)와 허남성·노영구 국방대학원 교수가 이끄는 학생들이었다. 전사(戰史)의 측면에서 매소..
(12)매소성 대첩 현장에서(상) “이미 (양주)대모산성이 조사중이고, 대통령(박정희)에게 보고까지 한 상황이니….” 1979년 어느 날. 연천 대전리산성을 몇차례 답사했던 최영희 당시 국사편찬위원장과 김철준 서울대 교수는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대전리산성이 매소성(買肖城·매초성이라고도 한다)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1년전 매소성으로 비정된 양주 대모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중이었고,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까지 한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대전리산성 조사는 뒤로 미루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일개’ 성 발굴과 대통령이 무슨 관계인가. 전적지를 찾아라 바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다. 장기집권을 획책한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표방하면서 이른바..
서울 사람들 닮은 ‘개경 사람들’- 한국역사연구회 <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 ▲고려 500년 서울 개경의 생활사…휴머니스트|한국역사연구회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갈 수 없는 도시 개성. 그러나 이제 남북화해와 통일의 시대를 맞아 개성은 반나절 코스로 훌쩍 다닐 수 있는 옆동네가 될 날도 머지 않았다. 개성, 즉 개경은 알다시피 한민족과 한민족 문화를 세계에 알린 고려왕국의 수도이자 국제도시였다. 이 책은 다소 밋밋한 제목이 불만스러울 만큼 당대 개성인의 생생한 삶, 그리고 애환을 담고 있다. 마치 지금 이 시대의 서울을 보는 것 같다. 요지경 그 자체다. 결혼을 말할 때 아주 상반된 표현으로 ‘시집간다’ 혹은 ‘장가간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장가간다는 표현이 맞았던 것 같다. “혼인 하면 필요한 것은 모두 처가에 의존하니 장모·장인의 은혜는 부모와 같다”(이규보)느니, “부모공..
(11) 파주 주월리 육계토성(下) 임진강이 휘돌아치는 2007년 4월 말. 기자는 11년전 홍수가 휩쓸고 간 자리, 고대사의 흔적들이 홀연히 펼쳐진 바로 그곳, 육계토성(파주 주월리)을 찾았다. 첫 느낌은? 실망 그 자체였다. 농사를 짓느라 땅을 갈아엎은 경작지, 그리고 성인지 둑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된 현장. ‘어디가 성벽안가’ 겨우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은 구조물(물탱크)에 올라서서 성전체를 조망했지만 어사무사했다. 그러나 찰라의 실망감도 잠시. # 데자뷰 토성 건너편 임진강을 보자 순간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걸 데자뷰라고 하던가. 그랬다. 몇 년 전 보았던 풍납토성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정말 비슷하군요.” 감탄사를 연발했다. 육계토성을 발굴한 김성태 기전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이나 백종오 경기도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