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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파주 주월리 육계토성(上) -폭우로 ‘고대사’ 가 꿈처럼 펼쳐지다- “온조는 한수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溫祚都河南慰禮城)~.”(삼국사기 온조왕 즉위조·기원전 18년) “‘낙랑과 말갈이 영토를 침략하므로~도읍을 옮겨야겠다(必將遷國). 한수 남쪽의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해야겠다’. 이듬해 정월 천도했다.”(삼국사기 온조왕 13·14년조·기원전 7·6년) 우리 고대사에서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다. 그 중 하나가 유리왕의 핍박을 피해 남하한 온조세력의 첫 도읍지다. 온조는 첫 도읍지를 도대체 어디에 세웠을까. 즉위연조에는 곧바로 한수 남쪽 위례성에 세웠다고 했지만, 13년·14년조에는 천도사실을 언급한 뒤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전했다. 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렇다면 하남위례성 이전에 (하북) 위례성..
(9) 파주 적성 객현리 감악산에서 바라본 임진강 이북땅. 언제나 그렇듯 답답한 건물들이 없는 임진강·한탄강 유역을 바라보면 뼛속까지 시원해진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70~80도쯤 돼 보이는 가파른 경사면에서 위태롭게 사진을 찍고 있다. 곁에 권순진씨(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연구원)가 씩 웃는다. “막 성벽을 찾아냈는데요…. 아마도 처음 확인하는 걸거예요.” 그러면서 “이거 기삿거리 아닌가요?” 하고 농을 건다. 이번 기획을 위해 고고학자들과 문화유산 현장을 다니는 즐거움이 바로 이거다. 파닥파닥한 생선을 건져 올리듯, 바로 현장에서 생생한 유물이나 유구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군사보호지역, 그리고 민통선, 비무장지대 등으로 묶이는 바람에 사람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던 ‘덕분’이겠지. 감악산 정상, 군부대가 주둔해있는 이곳엔 수수께끼 같..
(8) 파주 적성 ‘칠중성’ 삼국시대 사람들은 칠중성이라 했다. 그후 1300년 가까이 흐른 1951년 4월,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은 캐슬고지(일명 148고지)라 했다. 경기 파주 적성 구읍리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148m의 야트막한 고지. 벌목으로 시야를 확보한 고지엔 군부대의 참호 및 군사시설이 설치돼 있다. # 교통의 요처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아시겠죠?”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이우형 연구원이 “앞 뒤의 전망을 보라”고 한다. 과연 그랬다. 좀 ‘초를 쳐서’ 저 멀리 스멀스멀 기어가는 개미 한마리까지 관측할 수 있는 확 트인 공간. 구불구불한 임진강 북쪽으로 황해도가 손에 잡힌다. 눈길을 뒤로 돌리면 감악산이 눈 앞에 펼쳐진다. 설마치 계곡을 따라가면 의정부와 서울이 지호지간(指呼之間)이다. 황해도~한강을 잇는 교통 ..
(7) 연천군 백제 적석총과 온조왕 “재미있어요. 어찌 그렇게 일정한 간격으로 강변에 붙어있는지….”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의 이우형·김현준씨가 입을 모은다. 남방한계선 바로 밑인 연천 횡산리부터 임진강변을 따라 일의대수(一衣帶水)로 이어진 백제 적석총을 두고 하는 말이다. “7㎞ 정도의 일정한 간격으로 임진강변 충적대지에 분포돼있잖아요.” 적석총은 개풍 장학리(북한)~연천 횡산리~삼곶리~삼거리~우정리 1·2호분~동이리~학곡리로 이어진다. 한탄강의 전곡리 적석총과도 지근거리다. 누구일까. 임진강·한탄강 변에 이렇듯 일정하게 무덤을 만들어 놓은 이들은 대체 누구인가. # “우린 군더더기 살”(비류의 항변) 2002년 학곡리 적석총을 조사한 김성태씨(기전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의 보고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전형적인 고구려식 적석총입니다. 연..
(6)경기 연천군 30만년전 세계 경기 연천군 삼곶리. 야트막한 구릉으로 올라가는 입구를 군 부대 포클레인이 마구 헤집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 지뢰탐지용 보호둑을 마련하는 겁니다.” 바로 앞에 수풀이 무성한 지형이 있었다. “수풀이 무성한 곳은 절대 가지 말라”는 것은 민통선 이북지역에서는 불문율. 미확인 지뢰지대 때문이다. 수풀이 무성한 곳에 있는 문제의 미확인 지뢰를 탐지하려고, 바로 앞에 둑 같은 것을 쌓아 위험에 대비하려는 작업이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못마땅해한다. 이어진 구릉 위가 구석기 유물이 흩어진 곳. 따라서 유물 산포지를 마구 파헤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인지라 군 부대의 작업을 보면 자신의 가슴을 마구 파헤치는 것 같다. 포클레인의 굉음을 뒤로 한 채 구릉으로 올라가는 기자의 마음은 왠지 편치 않다. 넓은 ..
인류기원의 열쇠 ‘DNA’- 마틴 존스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 ▲고고학자 DNA 사냥을 떠나다…마틴 존스|바다출판사 유적에서 토기가 출토됐다고 치자. 그러면 고고학자들은 부드러운 솔로 항아리에 묻어있는 먼지와 쾨쾨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유기체를 조심스레 털어낼 것이다. 신주 모시듯 하면서…. 그러면서 기왕의 토기편년에 막 나온 유물을 대입시켜 연대가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를 설왕설래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고학은 한물 간 시대가 되었으니 세상, 참…. 이젠 막 출토된 토기는 거들떠보지 않고 토기에 묻은 생체분자들을 모아 최첨단 실험실로 가져간다. DNA 분석을 위해서다. 이 괴상한 사람들은 생체분자 고고학자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고학자 노릇하기도 힘들어졌다. 고고학자는 고생물학, 분자생물학, 지구화학, 법의학 등 골치아픈 자연과학 공부까지 섭렵해야 행세할 수 ..
18세기 천재들 ‘벽과 치’-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조선의 프로페셔널…안대회|휴머니스트 일찍이 박제가 선생은 벽(癖)이 없는 인간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쳤다. 여기에 치(痴)를 하나 더 붙이자. ‘벽과 치’. 이덕무 선생이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바보라는 호를 지은 이유다. 요즘 말로 한다면 ‘마니아’ 혹은 ‘폐인’이라 할까. 뭐 그런 뜻으로 한다면 10년 이상 고전에 빠져 불과 한달 반 만에 책을 두 권 내는 등 내공을 뿜어내는 저자야말로 ‘벽과 치’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각설하고 저자는 ‘벽과 치’, ‘마니아와 폐인’을 ‘프로페셔널’이라 칭했다. 저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카스트적인 신분사회질서가 횡행했던 조선에서 독보적인 ‘벽과 치’로 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나 이들의 삶을 발굴하는 일 또한 지난한 작업이었을 터. 그런 의미..
(5) 파주 진동 허준의 묘 1982년 어느 날. 서지학자 이양재씨는 어떤 골동품 거간꾼으로부터 한 통의 간찰(편지)을 입수했다. 눈이 번쩍 띄었다. “7월17일 허준 배(許浚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내용이야 그렇다 치고 글쓴이가 허준이라고? 서지학자는 그만 흥분했다. “사실확인에 들어갔죠. 허씨 대종회를 찾아가 종친회 족보에서 준(浚)자를 썼던 분을 몇몇 발견했는데요.” 그러나 준(浚)자 이름을 지닌 분들 가운데 이런 초서의 글을 멋들어지게 쓸 만한 학식과 지위에 있었던 이는 단 한분이었다. 바로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이었다. 더구나 글자체도 16~17세기쯤으로 추정됐다. ‘양천허씨족보’를 검토한 결과 한국전쟁 이후 실전(失傳)된 허준의 묘가 ‘장단 하포 광암동 선좌 쌍분(雙墳)’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