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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구덩이'…조선시대 병역에서 면제혜택 받은 사람들은 누구? 2002년의 ‘유승준 사건’에서 보듯 다른 잘못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수도 있지만 병역 관련 의혹은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사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는 언행으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지만 말입니다. 병역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태어난 이 땅 남자들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굴레인 것 같아요. 1697년(숙종 23년) 작성된 병적기록부. 거주지와 신장, 나이 얼굴생김새, 신체적 특징 등의 신상정보를 자세하게 담겨있다. 마맛자국과 얼굴흉터, 수염유무 등까지 기록되어 있다. |토지주택박물관 제공■16~60세까지 감당한 군역아마 조선시대 사람들은 ‘라떼’를 외쳤을 것 같아요. 요즘은 육군을 기준으로 ‘18개월 복무’로 깔끔하게 ..
잃어버린 한성백제 493년 역사를 찾은 고고학자 여러분은 서울의 역사를 두고 정도 600년이라는 말을 들으셨죠. 조선 개국과 함께 서울을 도읍지로 삼은지 600여 년이 지났다는 얘기죠. 그러나 실은 ‘정도(定都) 2000년’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기환의 팟캐스트 ‘흔적의 역사 322회’에서는 왜 서울을 두고 ‘정도 600년’이 아니라 ‘정도 2000년’이라 해도 되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풍납토성 때문에 방향을 틀어 설계된 올림픽대교.|YTN '人터view'캡처 문=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정도 600년 정도 600년 소리를 들어왔지 않습니까? 답=그렇죠. 조선이 개국한 게 1392년이고, 한양을 도읍지로 삼은게 1394~5년이니까 ‘정도 620여년’이 되겠네요. 그러나 풍납토성을 한성백제의 도읍지라고 한다면 이젠 ‘정도 2000년’..
뼈도 못추린 조선시대 성범죄범…교수형, 능지처참형, 곤장형, 유배형 극악한 아동성범죄자인 조두순이 12년형을 살고 만기출소했습니다. 영원한 사회 격리도 아니고, 이런 인면수심한 사람이 너무도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는데요. 조두순의 집 근처에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은 또 무슨 죄냐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라면 조두순 같은 사람에게 어떤 처벌을 내렸을까요. 뼈도 못추린 조선시대 성범죄 처벌사례를 일러드립니다. 혜원 신윤복의 ‘소년전홍’. 젊은이가 앳된 여성의 손목을 잡고 있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12세 이하와의 성관계는 무조건 간음 조선시대 형법은 주로 명·청나라 형률서인 을 따랐습니다. 이들 형률서의 성범죄 처벌 조항은 무시무시합니다. “무릇 화간(和姦)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이다. 조간(勺姦·여성을 유혹한 뒤 간음)은 장 ..
단 2~3점 뿐이라는 안평대군 친필, 오구라 유물에 숨어있었네 ‘어, 안평대군의 글씨가 있네. 진적이 거의 없다고 하더니만….’ 얼마 전 필자가 이른바 ‘일제강점기 오구라(小倉)와 오쿠라(大倉)의 한국 문화재 반출’ 기사를 준비하면서 이른바 ‘오구라 유물’의 도록을 훑어보았다. 도록은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국외소재 문화재 조사사업의 하나로 일본 도쿄(東京) 국립박물관을 찾아가 4차례에 걸쳐 조사했던 1100여 점의 사진과 함께 유물 설명을 곁들였다(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해외소재문화재조사서 제12책’, 2005). 필자는 주로 일본의 중요 문화재 및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된 39건을 위주로 기삿거리를 찾았다. 그러다가 회화·전적·서예 부문까지 훑어보던 필자의 시선이 머문 곳이 있었다.일제강점기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가 반출해간 ‘오구라 유..
왜 멀쩡한 남녀를 경주 월성의 성벽 바닥에 죽여 묻었을까 경주 월성은 신라 1000년 사직을 지킨 궁성인데요. 2016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장기조사를 벌이고 있는데요. 해마다 굵직굵직한 발굴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얼마전에는 월성 해자(침입을 막으려고 만든 연못이나 도랑)가 두차례에 걸쳐 조성됐다는 올해 발굴성과가 발표되었습니다. 뭐 그렇게 대중적으로 관심을 끌만한 내용은 아니어서 심드렁하게 보도자료를 살폈는데요. 그러다 자료 중에 3년 전(2017년)의 발굴내용이 첨가되어 있어서 다시금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서성벽 기단부에서 확인된 인골 두 구. 성벽의 기저부 밑에 정연한 모습으로 누워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성벽 맨 밑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 그것은 바로 월성의 서벽 기단부에서 발견된 2구의 인골이었답니다. 이 인골은 다름아닌 사람을 제사에 ..
신라의 바둑 공주, '아담사이즈' 금동관 쓰고 1500년만에 재림했다 ‘바둑 고수’였던 신라 공주가 ‘아담 사이즈 금동관’ 등으로 치장한채 환생한 것일까. 미성년자로 짐작되는 신라여성이 무게 약 1000t(트럭 약 200대분)에 달하는 돌무지에 묻혀있다가 1500년 만에 홀연히 등장했다.2014년부터 경주 쪽샘지구를 조사해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44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무덤주인공이 착장한 금동관(1점), 금드리개(1쌍), 금귀걸이(1쌍), 가슴걸이(1식), 금·은 팔찌(12점), 금·은반지(10점), 은허리띠 장식(1점) 등 장신구 조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주인공 주변에서는 비단벌레 딱지날개로 제작된 금동 장식 수십 점과 돌절구·공이, 바둑돌(200여 점)과 운모(50여 점) 등이 쏟아져 나왔다.경주 쪽샘 44호분 주인공의 출토현황. 순금제 드리개를 늘어뜨린 금동관과 ..
600년 도읍지 한양, 동전던지기로 낙점된 사실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로운 도읍지가 된 한양(서울)이 어떻게 낙점되었는지 아십니까. 원래의 유력후보지가 계룡산이었다가 한양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죠.또 한양으로 새로운 도읍지를 정할 때 궁성의 방향을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유명하죠. “인왕산을 진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아야 한다”는 무학의 주장에, 정도전이 “그리되면 임금이 동쪽을 향해 앉게 되는 것”이라면서 “자고로 군주는 남면(南面), 즉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한다”고 응수한거죠. 지금의 청와대·경복궁처럼 북악산을 진산으로 해야한다는 거죠. 여기서 더 유명한 이야기가 있죠. 자기 주장이 ‘킬’되자 무학대사가 “200년 뒤 내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말…. 200년 뒤라면..
한국문화재 털어간 '큰 창고(오쿠라) 작은 창고(오구라)'는 누구? “장관님, 오쿠라(大倉)가 아니라 오구라(小倉)입니다.” 2015년 2월 웃지 못할 기사가 하나 떴다. 한 시민단체 소속 학생들이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 2014년 11월 열린 한·중·일 문화장관 회의에서 일본 문무과학성 대신에게 “오쿠라 컬렉션 등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한국문화재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다. 오구라 유물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전 경남 출토 금관’. 신라의 전형적인 ‘출(出)자’형이 아니라 가야의 특성인 ‘초화(草花)’ 형 금관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도록에서 오쿠라와 오구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자성으로 오쿠라는 ‘대창(大倉)’이고, 오구라는 ‘소창(小倉)’이다. 예전엔 큰 대(大)자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