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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31년전 한글 모음(ㅏㅗ ㅣ ㅜ)을 미국언론에 소개한 외국인 한글학자 “(한자 대신) 한글로 쓰면 선비와 백성, 남자와 여자 누구나 널리 보고 쉽게 알 수 있을 것인데, 사람들은 도리어 한글을 업신여기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어째 글 내용이 심상치 않다. 꼭 훈민정음 서문의 느낌이 난다. 다음 내용을 보면 더욱 알쏭달쏭해진다.“이런 이유로 필자가 비록 조선말과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어리석은 외국인이지만 부끄러움을 잊고 특별히 한글로 세계 각국의 지리와 풍속을 대강 기록하려 한다.”호머 헐버트는 1889년 에 ‘한국어(Korean language)’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한글에 매료된 헐버트는 “한글의 모음은 하나 빼고 모두 짧은 수평, 수직의 선 또는 둘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면서 기고문에 직접 ‘ㅏ ㅗ ㅣ ㅜ’를 그려 표현했다.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한글을 자모까..
이토 히로부미의 16번째 죄악…고려청자 '싹 다!'로 조선을 도굴천지로 만든 죄 며칠 전 입맛이 개운치 않은 소식이 하나 떴더라구요. 한국은행 본점 화폐박물관(옛 조선은행 본점)에 머릿돌(정초석)이 있는데요. 눈썰미가 있는 분들이라면 본 기억이 나시죠. 그런데 이 머릿돌 글씨가 초대 한국통감이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친필로 확인되었습니다. 지난 10월 26일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지 111주년이 되던 날이었는데요. 이토 히로부미가 일왕에게 상납한 고려자기 중 97점이 1965년 한·일 협정 체결에 따라 반환됐다. 그중 ‘청자 구룡형 주전자’는 보물(제425호)로 지정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알려지지 않은 이토의 죄악그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의 흔적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있었던 것도, 그 머릿돌 글씨가 다름아닌 이토였다는 사실을 몰..
러시아공사관 독립문 설계한 러시아 청년…을미사변 새벽에 무엇을 목격했나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1860~1921)이라는 긴 이름의 러시아 건축가가 있다. 한국명으로는 살파정, 살파진, 혹은 살파령으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1860년 우크라이나 폴타바의 몰락한 지주가문에서 태어나 1883년(고종 20년) 23살의 나이에 우연한 기회에 조선땅을 밟았다. 그런데 이름을 거론하긴 했지만 사바틴은 개화기 이후 조선을 드나들었던 다른 유력 서양인에 비해 대중적으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사바틴은 한국 건축사에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인물이다.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몇 안되는 목격자인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그린 경복궁 내 시해장소 지도. 고종에 의해 시위대 부대장으로 임명된 사바틴은 1895년 10월8일 새벽 경복궁에서 숙직하다가 천인공노할 시해사건을 목격했다. ..
평양의 미인기생 차릉파는 왜 신라금관을 썼을까…1935년 '금관 기생 사건'의 전모 역사는 History, 히스토리는 이야기죠.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가는 ‘이기환의 Hi-story’입니다. 이번 주는 ‘신라 금관을 쓴 평양기생’입니다. 참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주부터 경주 서봉총을 재발굴(2016~2017)한 성과를 담은 테마전시회(2021년 2월28일까지)를 열고 있는데요. 제목이 ‘영원불멸의 성찬’입니다.‘무엄하고 무례한 이 난거-기녀의 머리에 국보 금관을 씌우다니’라는 제목으로 고이즈미의 폭거를 고발한 조선일보 1936년 6월23일자서봉총은 남분과 북분이 맞닿은 표주박 형태의 쌍분이고, 1500년 전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되는데요. 일제강점기인 1926년(북분)과 29년(남분)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발굴해놓고 출토품들을 정리하지도, 발굴보고서도 남..
개인최다 '26점'이 국가 보물인 안중근 유묵…감쪽같이 사라진 청와대 소장품은? “일전에 부탁한 글씨를 지금 씁시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9시, 사형 집행장으로 나가기 직전 안중근 의사는 호송관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상등병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했다. 지바는 재판을 받던 안의사를 법정~감방 사이를 호송해온 헌병이었다. 얼마 전 안의사에게 “휘호 한 점을 받고 싶다”고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당일까지 받지 못하고 있어서 체념하고 있었다.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의 유묵 26점. 보물 569-1호부터 26호까지 지정됐다.(사진 외 맨왼쪽부터 1~26호) 안중근 의사는 사형언도부터 집행때까지 40여일간 200여 점의 휘호를 집중적으로 썼다.|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마지막 휘호그런데 안의사(1879~1910)가 부동자세로 감방 앞에 서있던 지바를 보고 ‘얼마 전..
연산군은 왜 '한글 아는 여성을 특채하라'는 특명을 내렸을끼 역사는 히스토리,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보는 이기환의 Hi-story시간입니다. 지난 9일이 574돌 한글날이었는데요. 이번 주에는 ‘한글 창제 후 한양 거리에서 벌어진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글이 창제되고(1446년·세종 28년) 딱 3년이 지난 1449년(세종 3년) 한양 거리에서 기념비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해 10월 5일자 을 들춰 봅니다.1998년 경북 안동 고성 이씨(이응태)의 무덤에서 발견된 한글편지. 부인(원이 엄마)이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한글편지다. 사람들은 이 편지를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 했다.|안동대박물관 제공■“하정승아! 망령되게 일할거냐”“하연을 영의정부사로…삼았다. 그러나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정무처리에 착오가 많았다. 어떤 사람이 언문(한글)으로 ..
세종시대의 한글, 인공지능으로 복원해보니…독창적인 '돋움체'에 절로 감탄 “네(수양대군)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훈민정음을 반포(1446년 10월·세종 28년)한 세종이 7개월전 죽은 부인(소헌왕후·1395~1446)의 명복을 빌기 위해 둘째아들 수양대군에게 특명을 내린다.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편찬해서 불교신자인 부인을 추모하자는 것이었다. 이 명에 따라 수양대군(세조·1417~1468·재위 1455~1468)은 양나라 승우 율사(444~518)의 와 당나라 도선 율사(596~667)의 등을 바탕으로 을 편찬한 뒤 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다.(1447년) 세종은 이 을 꼼꼼이 읽고 각 2구절에 따라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한 찬불가 583곡을 손수 지었다. 그것도 막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이것이 이다. 인공지능으로 복원해본 훈민정음 창제 초기의 한글활자. 1447년(세종 2..
세종이 걸린 임질은 과연 성병인가 얼마전 팟캐스트에서 ‘세종대왕의 자녀들’을 주제로 다뤘습니다. 그러면서 세종(재위 1418~1450)이 갖가지 지병에 걸렸음에도 대단한 자식복을 자랑할만큼 많은 자녀들을 생산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뭐 18남 4녀를 두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때 당뇨, 두통, 이질, 다리부종, 수전증, 풍질, 임질 등 세종이 앓았다는 질병에 열거했는데요.( 1439년 6월29일) 선사시대 유물은 돌화살촉. 석기시대 사람들이 이와같은 인공도구를 사용할 줄 알리 없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와같은 모양의 석기가 출토되면 천둥과 벼락을 관장하는 뇌공이 하늘에서 떨어뜨린 도구로 여겼다. 이와같은 석기를 영험하다면서 갈아먹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임질에 걸렸다”고 고백한 세종그러나 일부 독자와 청취자의 지적사항이 있었습니다. 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