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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조선의 패션리더 ‘별감’, 서울을 ‘붉은 옷’으로 물들였다 200년전 서울과 서울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려볼 수 있을까. 사실 100년전이면 신문·잡지가 발행된 시기였고, 사진 기록까지 다수 남아있으니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200년전은?’ 하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쉽지 않다. 다행히 단원 김홍도(1745~?)와 혜원 신윤복(1758~?) 같은 이들의 풍속화로 200년전의 ‘이미지’를 가늠할 수 있다. ■껌씹고 침 좀 뱉은 200년전 양아치 또 놓쳐서는 안될 자료가 있다. 18세기말~19세기초의 서울 풍물을 시로 묘사한 ‘성시전도시’ 몇 편이다. 그중 초정 박제가(1750~1806)의 시가 눈길을 끈다. “물가 주막엔 술지게미 산더미네…눈먼 장님 호통치니 아이놈들 깔깔 거리고…개백정이 옷 갈아 입으면 사람들은 몰라뵈도, 개는 쫓아가 짖어대고 성을 내며 노려..
중국 건국의 100대 영웅 정율성은 한중우호의 상징? 경계인? 빨갱이? 중국의 3대 음악가로 꼽히는 정율성. 전라도 광주 출신인 그는 중국의 대표군가인 ‘중국인민해방군군가’를 작곡했다. |정찬구 정율성 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광주문화재재단 제공 ‘정율성(1914~1976)’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부은’이었는데요. ‘선율로 성취하겠다’는 뜻을 담아 ‘율성(律成)’으로 바꾸었답니다. 음악가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죠. 그런데 이 ‘정율성’이 요즘 ‘색깔론’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국가보훈부가 광주광역시가 추진중인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 사업’에 제동을 건겁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정율성이 6·25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기를 북돋운 ‘팔로군 행진곡’과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군가를 작곡했고, 직접 남침에 참여해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하는데 앞장..
‘헤어스타일 보니’…“백제금동대향로 5악사는 여성 전문 악단이었다” 위대한 발견은 어느날 불쑥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 같습니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1971년 7월5일 송산리 6호분 배수로 공사중 인부의 삽날에 부딪친 것은 다름아닌 무령왕릉의 모서리 벽돌이었죠. 무령왕릉 발굴의 이면에는 소름돋는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을 돌며 마구잡이로 파헤친 공주고보 교사 가루베 지온(輕部慈恩·1897~1970)의 이야기인데요. 그 가루베가 1931~33년 사이에 송산리 6호분을 무단 발굴했습니다. 그런데 가루베는 ‘송산리 6호분=무령왕릉’으로 오판했답니다. 6호분 바로 뒤에 구릉(진짜 무령왕릉)을 6호분의 수호신(현무)로 여겨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가루베가 이 진짜 무령왕릉을 멋대로 파헤쳤다면 ..
무령왕 부부 3년상 완전복원…제사상에 은어3마리 올린 이유 “영동대장군 사마왕(무령왕)이 62세가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 돌아가셨다. ‘신지(申地)’의 땅을 사서 무덤을 조성했다. 을사년(525년) 8월12일 대묘에 안장했다.” 1971년 7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출토품은 5000점이 넘는다. 그 가운데 12건(17점)이나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중 ‘원톱’을 꼽자면 금은으로 치장한 화려한 유물이 아니다. 생뚱 맞지만 ‘돌판’ 2점이다. 무령왕의 발쪽에는 청동거울과 함께 청동신발도 놓여져있었다. 무령왕의 혼을 천상으로 올려줄 승선 도구로 삼은 듯 하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무령왕릉 유물의 ‘원톱’ 하지만 예사로운 ‘돌판’이 아니다. 무령왕의 돌판, 즉 무덤 임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묘지석이다. 그 돌판엔 ‘주인공=사마(斯..
대체 '사경'이 뭐길래…화장실 갔다오면 '향수 목욕' 해야 했을까 “‘사경(寫經)’ 제작 전에 대소변을 보거나 누워 자거나 식사를 한 경우 향수로 목욕한 뒤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사경’은 불경을 베껴 쓴 ‘경전’인데요. 754년(신라 경덕왕 13)에 제작된 가장 오래된 사경(·국보)에는 작업장에 들어가기 전에 치러야 할 경건한 의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초장부터 이상하죠. 이런 규정이라면 화장실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겠네요. 또하나 인용할만한 기사가 에 있더군요. 유학자 최승로(927~989)가 982년(성종1) 올린 ‘시무28조’ 중 한 대목인데요. “신라 말 사경과 불상 모두 금·은을 사용해서 사치가 도를 넘었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그 관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그 폐단을 혁파해야 합니다.” 최승로의 언급이 심상치 않죠. ‘사경 제작’을 신..
남근형·구구단·신세한탄·가요·망부가…백제 '빅5' 목간 열전 종이가 발명(혹은 개량 또는 완성)된 것은 기원후 105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종이는 오랫동안 폭넓게 쓰이지는 못했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 나무(혹은 대나무)를 활용한 목간(혹은 죽간)이 보편적인 서사자료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책(冊)’이라는 한자는 목(죽)간을 매단 모습의 상형문자에서 비롯됐죠. ‘전(典)’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죠. 사실 경제성과 내구성 측면에서 목(죽)간은 종이에 견줘 몇 수는 위였습니다. 왜냐. 목간은 주로 습기가 많은 우물이나 연못, 저수지, 배수지 같은 곳에서 집중 출토됩니다. 나무는 산소가 차단된 물 속에서 좀처럼 부식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 수천년 동안 보존될 수 있거든요. ■‘구구단·남근형’ 목간의 정체 해방 이후 지금까지 확인된 삼국~..
'3대 천재' 최남선에게 '요즘 젊은애들은 한자를 몰라'고 혀를 찬 '전설' “오등(吾等) 玆(자)에 我(아) 선조(鮮朝)의 독립국 임과 조선인의 자주민 임을 선언 하노라….”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이 선언한 독립선언서의 도입부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3·1 독립선언서 2부가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좀 이상하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조선의 독립국 임과~’가 ‘선조의 독립국 임과~’로 둔갑해있다. 왜 ‘조선’을 ‘선조’라 거꾸로 썼을까. 무슨 심오한 의미가 있을까. 허무개그 같지만 아니다. ■‘조선’과 ‘선조’, ‘박탈(剝奪)’과 ‘박상(剝喪)’ 그저 단순한 오자였을 따름이다. 독립선언서의 인쇄 과정을 두고 학계 논쟁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조선일보 1986년 3월1일) 당대 최고의 서화가이자 3·1 독립선언의 민족..
김부식도 천대했던 가야,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대접해준 이유는? “1000년 전 김부식이 천대했던 ‘가야’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며칠전 한국의 ‘가야고분군’이 제4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7개 가야고분군은 유곡리 및 두락리(전북 남원)·지산동(경북 고령)·대성동(경남 김해)·말이산(경남 함안)·교동 및 송현동(경남 창녕)·송학동(경남 고성)·옥전(경남 합천) 고분군입니다. 유네스코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습니다. ■천덕꾸러기에서 백조로? 이 대목에서 저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