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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광주에서 발견된 2000년 전 현악기

지난 1992년 5월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사였던 조현종이 광주 신창동을 찾았다.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가 한창이던 현장이 아무래도 걸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무작정 공사현장을 찾았습니다. 이곳은 42년전에도 어린아이 독무덤이 발굴된 곳인데요. 그렇다면 당대 사람들이 경작한 농경지 유적이 있을 게 분명한데 아무런 조사 없이 공사가 강행되니까요. 고고학자들이 공사현장을 찾으면 담당자들이 무척 싫어하니까 신분을 속이고 이리저리 살폈죠.”
독무덤이 발견된 곳에서 150m 정도 떨어진 연약지반, 즉 농경지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유심히 살피던 조현종은 극적으로 2,000여 년 전 역사의 실마리를 잡는다.
“2,000년 전 홍수 등에 의해 범람했던 흔적인 퇴적층에서 모래와 흙을 긁어모아 비닐에 담아 연구실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 흙에서 볍씨와 토기 편들을 확인한 겁니다.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아스콘이 막 현장을 깔아뭉갤 즈음이었으니까요.”
당장 공사가 중단됐고 6월부터 정식발굴이 시작됐다. 발굴대상은 도로확장공사 범위인 저습지 9평 규모에 불과했다.
“9평의 기적이라 할까요. 그 좁디좁은 공간에서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습지에 빠진 나무제품들은 오랜 세월에도 썩지 않은 속성이 있어서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있기 마련이죠.”

 

광주 신창동에서 확인된 현악기

■좀 더 공부하고 발굴합시다
쉴 사이 없이 쏟아지는 다양한 생활용품들. 검은 간토기(黑陶), 덧띠토기(粘土帶土器) 등 기원전 토기들은 양념에 불과했다. 나무로 만든 머리빗(櫛), 옻칠로 만든 칠기굽잔(漆器高杯), 역시 옻칠해서 만든 칼자루(劍把), 그릇뚜껑(盒蓋), 대나무로 만든 물고기 잡는 통발(筌), 괭이, 빗자루…. 놀라운 것은 새까맣게 탄 쌀(炭火米)과 보리 등도 다량 수습되었다. 당대 생활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중대한 자료로 평가됐다.
하지만 발굴은 곧 중단됐다. 발굴사상 첫 경험인 저습지 조사. 유물이 습지 속에 있을 때는 2,000여 년을 견뎌왔지만 일단 퇴적층이 햇볕에 노출돼 유기물이 산화되면 토양의 색깔이 변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유물의 산화도 급속하게 진행되므로 섣불리 경험 없는 발굴을 강행하면 유적전체를 한순간에 망가뜨리는 격이 된다. 삼불의 결심은 비장했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 상태로 덮어둡시다. 외국사례를 더 공부한 뒤 발굴합시다.”
유적발굴은 일단 보류됐다. 제대로 된 공부를 한 다음에 추진되는 것으로 미뤄졌던 것이다. 발굴담당자 조현종은 2년간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로 건너가 일본의 저습지 유적 발굴 기법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발굴은 95년부터 연차적으로 진행됐다.
연차별 조사 때마다 고고학계를 소름끼치게 만드는 고급유물들이 쏟아졌다. 발굴유물 대부분이 ‘국내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95년엔 무려 155㎝ 두께의 벼 껍질층(왕겨층·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저장성 허무두 유적 벼 껍질층은 72㎝에 불과하다)이 발굴됐다. 이는 당대 벼농사가 얼마나 발전했으며 생산량이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그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유물은 역시 현악기 및 타악기였다. 이것은 당대 마한사람들의 문화상·생활상을 살필 수 있는 고귀한 유물이었다.
“얼마나 황홀했는지 몰라요. 고고학자가 된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온통 유물 밭이어서 함부로 땅을 밟을 수도 없었어요. 땅에 깔판을 깔고 조심조심 다녔어요. 모든 작업을 인부들에게도 맡기지 않았어요. 연구원들이 모두 달라붙어 차근차근 유물을 꺼내고 수습했습니다.”(조현종)
먼저 최고(最古)의 현악기인 슬(瑟). 발굴된 현악기는 길이 77.2㎝, 폭 28.2㎝ 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有瑟 其形似筑 彈之亦有音曲”, 즉 “악기로 瑟이 있는데 그 모양이 중국의 현악기인 축(筑)과 같다. 이것을 타면 소리와 곡조가 나온다”는 내용이 나온다.
악기의 전체적인 구성은 머리부분인 현(絃) 고정부와, 현이 올려져 작음(作音)기능을 발휘하는 탄음부(彈音部), 그리고 현공(絃孔)이 자리 잡은 현미부(絃尾部)로 돼있다. 현을 거는 구멍인 현공은 현미부의 일부를 V자형으로 파낸 뒤 그 내부를 직경 0.3㎝ 정도의 둥근 원으로 뚫었다.

악기 복원도

이 현악기를 복원한 결과 10현(絃)임이 판명됐다. 재질은 벚나무.
내부가 파인 목조상(木槽狀) 위에 현을 걸어 만들었다. 당대 중국의 한나라 및 일본 야요이(彌生)시대 현악기가 모두 공명(共鳴)부를 갖고 있는데 반해 신창동 출토품엔 공명부가 보이지 않았다. 또한 신창동 유적에서 옻 재료와 옻칠그릇도 나오는데 이 현악기에는 옻칠을 한 흔적이 없었다. 경산 임당동 유적에서 나온 칠기에 옻칠이 돼있다.
현악기가 나온 곳은 공방유적이며, 출토 현악기는 이 공방에서 만들다가 그만둔 미완성 악기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조현종은 “현을 걸기 위해 뚫은 작은 구멍이 뚜렷하게 남아 있고 판 밑바닥 바깥 면에 마찰흔도 있었다”면서 “이는 이 유물이 제작과정에서 파손되어 폐기된 미완성품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실제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각목에 새겨진 거치봉(鋸齒棒)을 마찰해서 소리를 내게 하는 타악기도 확인됐다. 마찰봉의 형태와 마찰의 속도에 따라, 혹은 각목의 깊이와 간격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주술적인 의례를 행하거나 노동요(勞動謠)를 부를 때 박자를 맞추는 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악기에 담김 정치학
옛 사람들은 악기 하나, 노래 하나에도 심원한 뜻을 새겼다.
삼국사기 잡지 ‘악(樂)’편에서 현금(玄琴·거문고)을 설명한 내용을 보자.
“금의 길이 석자 여섯 치 여섯 푼은 366일을 상징하는 것이고, 너비 여섯 치는 천지와 사방을 뜻하며 위가 둥글고 아래가 네모난 것은 하늘과 땅을 본받은 것이다.”
가야금도 마찬가지. “가야금은 중국 악부의 쟁(箏)을 본떠 만들었는데, 열두 줄은 사시(四時), 기둥의 높이 3촌은 삼재(三才), 즉 天·地·人을 뜻하는 것이다.”
가야국 악사인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12곡을 지었다. 그 후 우륵은 가야가 어지럽게 되자 신라(진흥왕)에 투항했다. 진흥왕은 주지·계고·만덕을 보내 우륵의 업을 전수받게 했다. 그런데 세 사람이 우륵의 12곡을 전해 듣고는 “이것은 번잡하고 음란하니, 바르다고 할 수 없다”며 5곡으로 축약했다. 처음에는 분기탱천했던 우륵은 5곡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즐거우면서도 무절제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비통하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만 하다. 너희는 왕 앞에서 그것을 연주하라.”
왕이 기뻐하자 신하들이 간언했다.
“이것은 가야에서 나라를 망친 음악이니 취하면 안됩니다.”
이는 음악을 나라의 흥망과 연결시킨 옛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孔子)도 시쳇말로 ‘만능 뮤지션’이었다. 거문고를 뜯고, 경(磬·돌이나 옥조각으로 만든 타악기)도 치며, 노래도 잘 불렀으니까. 공자왈.
“감정이 소리에 나타나 그 소리가 율려(律呂)를 이루게 되면 그것을 가락이라고 한다. 다스려진 세상의 가락은 편안하고 즐겁고 화평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의 가락은 슬프고 시름겹고 그 백성은 고달프다.”
공자가 거문고를 배울 때의 일. 거문고 선생인 사양자(師襄子)가 5번을 가르치고, 그 때마다 “이제 됐으니 새로운 것을 배우라”고 했지만 공자는 “아직 때가 아니다”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한참 뒤에야 공자가 말했다.
“이제 노래를 지은 이의 풍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오한 사상, 낙관적 성격, 원대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니 분명 이 곡을 지은 이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일 것입니다.”
사양자가 감탄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학습한 것이 바로 ‘문왕조(文王操)’입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은 세태에 괴로워하던 공자가 경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자 밖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
“깊은 생각에 빠졌구나. 경을 연주하는 이여.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이지.”
신창동에서 출토된 악기도 단순한 음주가무를 즐기기 위한 도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우선 이 현악기가 경산 임당 목관묘에서 나온 길이 67㎝, 너비 27㎝인 악기와 크기는 다소 다르지만 모양새는 거의 똑같다. 신창동 현악기는 10현(絃)으로 복원되며 전체길이 77.2㎝, 너비 28.4㎝이다.
조현종은 “이런 형태의 악기가 기원 전 후에 한반도 남부에서만 유행했을 것이 분명하다”면서 “이 악기의 이름을 우리만의 독특한 한금(韓琴)으로 붙이면 어떨까 싶다”고 말했다. 옛 기록 등으로 미뤄보아 당대 지역 수장이 단순한 악기 이상의 기능을 담당했을 것이다. 소리와 곡조는 정확해야 하는 데 이는 지배자의 엄격한 영(令)과 통할 수 있으니까.  악기에는 음률이 있듯, 권력자가 지역을 다스릴 때 규율과 법률을 필요로 할 것이다. 악기와 통치기법은 그만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공자에 따르면 음란하고 말초적인 요즘의 음악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고단하게 만드는 말세의 음악이 아닐까. 신창동 유적에서 발굴된 악기는 이렇게 또 후손들에게 하나의 가르침을 준다.|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