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475년 9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내린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 시대가 비극적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한성백제의 500년 도읍지 풍납토성도 패배자의 역사 속에 파묻혀 1,400여 년간이나 잊혀져 갔다. 그러던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이름조차 없었던 풍납토성의 서벽마저 대부분 유실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가 깨어날 줄이야.
◇을축년 대홍수로 잠을 깬 한성백제
1925년 여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가 한강변을 휩쓸었다. 한강이 범람했고, 강변에 접해있는 풍납토성의 서북쪽 장벽이 쓸려나가면서 토성 내부의 일부가 노출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이 무렵 토성 남단 모래 중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2점의 청동제 초두(鐎斗·술을 데워 잔에 따는 일종의 제사용기)를 비롯하여 금제귀고리 등을 구입해 소장했다.
일본인 아유카이(鮎房貝之進)도 토성 안에 살던 어느 노파에게 자감색의 유리옥 십 수 개를 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유카이는 이들 백제시기 유물을 증거로 풍납토성이 바로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일제는 이 토성을 ‘풍납리 토성’으로 불렀고 광복 후에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사적 지정 범위는 일제시대 지정된 범위 그대로였다. 즉 잔존하고 있는 토성 벽만 지정하고 그 외는 지정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성벽 내부는 아무런 조사 없이 급속적인 개발로 말미암아 도시로 변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지정 보호받아온 범위가 성벽 그 자체에 지나지 않아 한마디로 속은 버리고 껍데기만 지정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백제는 BC 18년 건국 이후 사비시대인 부여에서 660년 멸망할 때까지의 약 700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운데 한성백제 약 500년은 잊은 채 겨우 200여 년간 버틴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시대만을 명실상부한 백제로 알고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풍납토성 성벽발굴지.
◇위례성을 둘러싼 여러 학설과 몽촌토성
“百濟始祖溫祚王~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溫祚都河南慰禮城.”(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원년조·BC 18년)
즉 “백제시조 온조왕이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북한산 혹은 북악산)에 올라 살만한 곳을 내려다보았다. 10신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서로는 대해로 막혀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잃어버린 한성백제 500년 도읍지 하남위례성이 어디냐를 두고 끊임없는 논쟁이 벌어졌다. 삼국유사 왕력조의 “第一溫祚王~都慰禮城 一云弛川 今稷山”, 즉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천이라고 하고 지금의 직산”이라고 한 데서 ‘직산설’이 돌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도 충청도 직산현을 온조왕의 도읍지로 명시했다.
그러나 89년과 95년 서울대 발굴조사 결과 직산 동쪽에 위치한 천안의 위례산성은 통일신라시대 방어용 산성으로 추정됐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한성백제인의 발자국.
경기도 광주 고읍(古邑) 궁촌(宮村)·춘궁리 일대도 유력한 위례성 후보지였다.
삼국유사 왕력조 및 권2 남부여 전백제(前百濟)조 등은 “온조왕이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다산 정약용은 이 위례성을 하북위례성으로 보았다), 14년 병진년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는데(다산에 따르면 하남 위례성) 곧 지금의 광주라”하고 기록했다. 이 춘궁리설이 더욱 힘을 받은 것은 저명한 역사학자 이병도의 주장 때문이었다.
이병도는 하남위례성의 정식명칭이 한성이며 한성의 위치를 춘궁리 일대로 보았다. 광주 서부면 춘궁리 일대는 4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인 데다 주변에서 옛 기와와 주초석, 불상 등이 채집된 바 있어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위례성 0순위’로 꼽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설 또한 아직까지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게 결정적인 흠이다. 하남 교산리 설도 마찬가지.
지난 2002년 12월 기전문화재연구원은 하남 교산동 일대 발굴조사결과를 발표했는데 “한성백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발굴조사 발표 때는 ‘발굴성과’를 알리는 게 관행인데 ‘백제와는 관련 없음’을 알리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도 하남일대를 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하남 교산동은 ‘통일신라~조선후기’에 이르는 유적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춘궁리 맞은편의 이성산성에서도 한양대박물관 발굴결과 신라시대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일뿐
64년 삼불 김원룡은 서울대 고고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풍납토성을 찾아 야외실습용 시굴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토성의 북벽 가까운 곳에 8곳의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초기백제 토기 편들이 나왔다. 김원룡은 이 결과를 정리했다. 그는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후 1세기부터 한성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5세기 동안 사용한 중요한 성이라고 1967년 발표했다.
김원룡은 그해 발간된 ‘풍납리 포함층 조사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재작년 서울 풍납동에 있는 백제의 토성을 발굴, 이런 나의 연대관이라 할까 삼국건국의 연대에 관해서 더욱 방증을 얻을 수 있었다. ~풍납동 토성은 초축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위례성과 동시에 백제초기에 축조한 모양이며 286년(책계왕대)에 대대적으로 수리된 것은 틀림없다. 당대에는 백제, 대방군, 고구려의 3각관계가 유지됐는데, 풍납토성 발굴결과는 그 연대를 뒷받침하고 있다. 백제 건국집단의 한강유역 진출은 최소 서기 3세기까지는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사실 김원룡은 ‘삼국사기’의 초기백제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시’였다. 고대 사학계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묵살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고대 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 한강변에 풍납토성을 쌓을 만한 힘이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한성백제가 명실 공히 강력한 왕국으로 변모해 고구려·신라와 맞설 수 있었던 시기는 3세기 후반대인 고이왕 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바로 일제 강점기 때부터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그랬으니 작은 시굴 구덩이에서 나온 백제유물을 인정할 리 만무했다.
그 기존학설이란 국사학의 태두 두계 이병도가 1933년 “풍납토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사성(蛇城)”이라고 비정(批正)한 것을 뜻한다. 이 백제본기 기록은 “AD 286년 백제 9대 책계왕이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는 것이다.
이병도는 “풍납리 지명은 원래 ‘배암(蛇)들이 마을’이 ‘바람들이’로 말이 바뀌었고 이 ‘바람들이’ 지명이 한자로 표기되면 풍(風)은 ‘바람’, 납(納)은 ‘들이’이기 때문에 풍납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병도 박사의 주장은 광복 후에도 어느 누구의 반대의견 없이 통용되어 정설이 되었던 것이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백제 우물터. 제사의 흔적이 확인됐다.
◇고고학자 김원룡의 패배
결국 김원룡은 그 67년의 발굴보고서에서 밝혔듯 애매한 표현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언급한 뒤 “성의 규모나 위치로 보아 중요한 거성(居城) 수성(戍城)이었다고 믿어지며,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성(蛇城)으로 비정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김원룡은 풍납토성을 이병도의 주장대로 백제의 사성으로 보는 한편, 방어용성이기는 하지만 평시에는 많은 일반민이 살고 있었던 ‘반민반군적인 읍성(半民半軍的 邑城)’이라고 얼버무린 것이다.
이것은 국사학자 이병도와의 싸움에서 고고학자 김원룡이 패배한 것을 뜻한다. 또한 그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분석하여 옛 기록에 대입해 새롭게 해석한 노력이 곧바로 암초에 걸렸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뿌리깊이 내려져 있는 학설을 정면 부인하는 새로운 주장이 먹혀들 리 없었던 것이다.
대신 80년대 중반부터 풍납토성 인근의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읍지(하남위례성)로 각광을 받았다.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 체육시설 및 공원 조성지로 결정되어 1983년부터 서울대 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상건물터, 움집인 수혈 주거터, 저장시설, 방어시설로 보이는 목책 흔적뿐 아니라 백제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수습됐다.
그랬으니 몽촌토성이 AD 3세기 중반에서 백제가 패망한 475년까지 약 2세기 동안 존속한 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 성과는 백제가 한강변에서 3세기 후반(고이왕대)에 들어서야 국가의 기반을 잡았다는 기존 국사학설과도 절묘하게 부합되는 것이었다.
잠깐 잠깐 고개를 쳐들었던 풍납토성은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던 사이 사적으로 지정된 토성 벽 일부만 제외된 채 성벽의 안팎은 도시화되면서 날로 파괴되어 가고 있었고 1990년대 들어와 경제성장에 따른 주택 재개발이 풍납토성 내부에도 불어 닥쳤다.
◇기적처럼 부활한 한성백제
잃어버린 한성백제의 한(恨)은 그다지도 깊었나 보다. 1996년 말, 겨울방학을 이용해 학생들과 함께 토성의 정밀실측을 하던 이형구(당시 선문대 교수)가 다시 백제의 혼을 일으켰다.
이형구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방호벽을 치고 기초 터파기 공사가 한창인 현대아파트 재개발 부지에 잠입한다. 그는 공사현장 지하 벽면에 백제토기 편들이 금맥이 터지듯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지하 4m 이상이나 팠는데도…. 기존 주택건물은 파봐야 2m 정도였기에 깊숙이 박혀 있던 백제유물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대규모 재개발이 지하 깊숙이 묻힌 백제를 깨은 것이다.
조선일보의 특종이 터졌고 1997년 새해벽두부터 난리가 났다. 언론의 엄청난 관심 속에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대박물관·한신대 박물관 등이 참여하는 공동 긴급구제발굴이 이뤄졌다. 곧 유구와 유물이 공개되었다. 조사의 성과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하 2.5~4m에 걸쳐 유물포함층과 기원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3중의 환호(環壕)유구를 비롯해,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 폐기된 유구, 토기 가마 흔적 등이 밝혀진 것이다.
발굴조사 현장을 참관하고 출토 수습된 유물들을 본 전문가들은 백제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 이후 백제유적 최대의 발견·발굴이었다. 한신대 박물관의 발굴에서도 역시 백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서울대 박물관이 참여한 위치에서는 백제시대와 관련되는 아무런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백제가 발견됐으나 발굴이 끝나자 아파트 건축은 이뤄졌다. 어쨌든 이 발견은 서곡에 불과했다. (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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