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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굴러온 돌(백제)'과 '박힌 돌(마한)'

  마한의 입장에서 보면 백제의 창시자인 온조는 굴러온 돌이자, 배은망덕한 사람이다.
 온조가 누구인가. 비류와 함께 고구려 추모왕(주몽)의 서자가 아니던가. 무슨 사연인가. 북부여의 주몽은 북부여 태자인 주몽이 북부여 태자 대소에게 쫓겨 졸본부여로 망명한다.
 주몽은 졸본부여의 재력가(연타발)의 딸로서 아들을 둘(비류와 온조) 둔 미망인(소서노)과 결혼한다. 소서노는 가산을 털어 재혼한 남편(주몽)의 창업(고구려)을 도왔다.
 주몽은 비류와 온조를 자기 아들로 여겼다. 비류와 온조 중 한사람이 다음 왕위를 이어갈 것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꿈에도 생각못한 것이 있었다. 북부여에 주몽의 친아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공주 수촌리에서 확인된 금동관모(왼쪽)과 이번에 경기 화성에서 발견된 금동관모의 흔적.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뒤 마한의 지방세력들을 위무하면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환도대도 등의 위세품을 주고 간접통치 했을 가능성이 짙다.|충남역사문화연구원,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제공

■마한을 야금야금 집어삼킨 온조
 주몽은 북부여 시절 예(禮)씨라는 여인과 혼인했는데, 주몽이 탈출할 당시 부인 예씨의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아이가 바로 유리이다.
 우여곡절 끝에 유리가 찾아오자 주몽의 마음이 바뀌었다. “아들이 찾아오자 추모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삼국사기>)니….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된 비류와 온조는 땅을 쳤다.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 대왕의 건국을 도왔는데…. 아아! 이제 나라가 유리에 속했으니 우린 혹(贅·군더더기) 같은 존재가 됐구나.”(<삼국사기>)
 비류와 온조는 결국 어머니(소서노)와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온다. 형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동생 온조는 한강변 위례성(풍납토성)에 자리를 잡는다.(기원전 18년) 그러나 비류는 바닷가가 좋다면서 미추홀(인천)을 선택한다. 비류는 결국 미추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다 하여 동생을 찾아온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그런데 온조 세력이 새로운 터전을 잡은 지역은 바로 마한 54개국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
 굴러온 돌’인 백제 온조왕은 차츰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더니 BC 6년 강역을 획정했다. 북으로는 패하(浿河·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 즉 금강까지였다. 10년이 흐른 AD 5년에는 급기야 웅천책(熊川柵), 즉 금강에 목책을 세우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자 마한왕은 참다못해 사신을 보내 질책한다.
 “왕(온조)이 처음 왔을 때 발 디딜 곳이 없어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내주었는데…. 이제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 없다’고 생각해…. 우리 강역을 침범하니 이 어찌 의리라 하겠는가.” 

화성에서 환두대도가 출토되는 순간. 환두대도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등과 함께 대표적인 백제 중앙정부의 하사품이었다.

■마한의 끈질긴 항거
 마한왕의 질책에 백제 온조왕은 부끄럽게 여기고 그 목책을 헐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AD 7년 강성해진 온조왕의 야욕은 끝내 발톱을 드러낸다.
 “마한은 어차피 망해가는 나라다.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가 병합하면 순망치한 격이니 우리가 먼저 치는 편이 낫다.”
 온조왕은 사냥을 빙자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며, 이듬해(AD 8년) 마침내 마한을 멸망시킨다.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의 흥기와 마한의 쇠망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나 백제는 마한과 마한인의 전통까지 깡그리 삽시간에 없애지는 못했을 것이다. 백제는 만만치않은 마한의 토착세력을 위무시키는 정책을 썼을 것이다.
 실제로 마한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삼국사기>에 나와있다.
 “백제가 마한을 병합한 뒤 7년이 지난 기원후 16년,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우곡성에서 반역하였다. 온조왕이 몸소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이를 치니 주근은 스스로 목을 매고….”
 배은망덕, 은혜를 모르는 온조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이복형(유리)에게 쫓겨 내려와 ‘집도 절도 없던’ 온조에게 땅까지 주며 거둬주었는데, 배신했으니…. 그러니 주근과 같은 마한 잔여세력의 반항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백제로서는 이들에 대한 위무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제가 마한정벌 후 직접 통치 대신 간접 통치의 형식을 취했을 수 있다.
 그 지역의 토착세력, 즉 마한 수장급의 후예들로 하여금 해당지역을 통치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다. 

 

 

수촌리에서 확인된 금동신발. 수촌리 가문은 기원전 4세기 청동기 시대부터 이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토착세력이었다.

■공주와 화성 세력
 지난 2003년부터 공주 수촌리에서 드라마틱한 유적이 잇달아 발견됐다.
 기원전 4세기 시대의 유물인 청동기가 발견된 곳의 인근 지역에서 토광목곽묘(기원후 380~390년 무렵)→횡구식석곽묘(기원후 400~410년)→횡혈식석실분(기원후 420~440년)이 차례로 확인된 곳이다. 무슨 뜻인가. 토광묘는 마한의 묘제이고, 돌무덤(석곽·석실묘)은 백제의 선진 묘제이다.
 아마도 이곳은 청동기 시대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던 지역 토착세력의 가족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들은 마한 시대(토광묘 시대)를 거쳐 백제의 지배를 받은 뒤 돌무덤(석곽·석실)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증조 할아버지 때까지는 마한의 전통을 살렸지만 할아버지, 아버지 대에는 선진 묘제인 돌무덤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지체높은 유물들이 대거 쏟아졌다는 것이다.

수촌리 가문이 살아온 세월을 유적, 유물을 토대로 복원해보았다. 청동기 시대~마한을 거쳐 백제의 지방 귀족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가문이었을까.
 마한 54개국 가운데 공주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국인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이 있다. 그렇다면 수촌리 고분의 주인공은 바로 옛 감해비리국의 수장 출신으로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편입된 가문이 아니었을까. 물론 추정이다.
 그러니까 마한을 야금야금 정복한 백제는 직접지배의 형식을 취하기보다는 그 지역이 토착세력, 즉 마한의 수장급 후예들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간접지배라는 소리다.
 그러면서 백제 중앙정부는 지배자의 상징인 ‘금동신발과 금동관, 그리고 환두대도’ 등을 예기(위세품)으로 하사했을 것이다.
 특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침하는 4세기 말의 상황을 고려해보자. 백제는 고구려의 남침에 대항하려고 내부결속을 다지려고 지방세력에게 금동관 등의 하사품을 내렸을 가능성이 짙다. 
 최근 경기 화성에서도 의미심장한 발굴결과가 나왔다.
 공주 수촌리 발굴 양상과 매우 흡사한 한성백제 시대의 금동관모, 금동신발, 금제귀고리, 환두대도 등이 쏟아진 것이다.
 발굴단(한국문화유산연구원)은 마한을 차례로 병합해나간 백제의 4~6세기 지방통치시스템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유물들“이라고 평가했다. 
 중국 문헌인 <송서>와 <남제사> 백제전을 보면 “백제는 국가에 일정한 공로를 세운 자를 예우하기 위해 왕(王)·후(侯)제를 두었다”고 한다. 이른바 ‘작호제(爵號制)’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주 수촌리 가문과 화성 가문이 바로 백제 중앙정부가 작호를 수여한 마한출신 지방귀족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