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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남달랐던 조선왕실의 태교법

“나라를 세운 것은 임금을 위해서인가. 백성을 위해서인가.”(임금 영조)
“임금도 위하고 조선도 위해서입니다.”(세손 정조)
“대답이 좋지만 분명히 깨우치지 못했구나. 나라를 세운 본뜻은 백성을 위해 세운 것이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스스로를 받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봉양하기 위해서다. 민심을 잃으면 임금이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느니라. 스승보다 더 백성을 두려워 해야 한다.”(임금 영조)

1575년 태어난 ‘경룡 아기씨’(광해군)의 태를 묻었다는 내용을 담은 태지석과 태항아리. 보물 1065호로 지정됐다.

1762년(영조 38년) 4월 25일 11살짜리 세손 이산(정조)이 69살 할아버지 영조 임금과 일문일답식 구술시험을 치렀다. 사부로부터 배운 지식을 점검하는 자리였다. 이날의 대화는 바로 조선시대 왕실 교육의 요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영조실록>) 할아버지 임금이 11살 세손에게 임금 대접을 받으려 임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잘 다스리려고 임금이 되는 것이며, 민심을 잃으면 임금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자리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조선의 임금은 자신을 성인처럼 닦고 밖으로는 임금의 덕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修己治人 內聖外王) 선비이자 지도자였다. 때문에 그들은 일반 사대부보다 더욱 혹독한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 즉 인성교육을 받아야 했다.

 

■유학교육은 고리타분한가
흔히들 이 시대의 관점에서 유교의 교육을 두고 고리타분할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하기 십상이다. 부자 간, 남녀 간, 군신 간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민주주의를 찾기 힘들다는 인식이 널리 퍼진 탓이다. 하지만 그렇게 볼 수 없다. 생각해보라.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의 요체를 물었을 때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 대답한 이유는 무엇일까.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논어> ‘안연’)
그런데 만약 ‘~답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교 사회에서 신하나 아버지나 아들이 ‘답지 않으면’ 반역죄나 강상죄의 혹독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임금은 어찌 되는가. 다르지 않다. 순자는 무시무시한 말을 한다.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뒤집어버릴 수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卽載舟 水卽覆舟)”(<순자> ‘왕제’)
무시무시한 말이다. 물인 백성은 배인 임금을 잘 띄울 수도 있지만 수 틀리면 뒤집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맹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탕왕(상나라 성군)이 하나라 걸왕을 내쫓고, 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죽였는데 신하가 군주를 죽여도 되는 거냐”라 물었다.아무리 폭군(하 걸왕·주 무왕)이지만 신하 된 자(상 탕왕· 주 무왕)가 군주를 죽였다면 그것이 바로 불의(不義)가 아니냐고 물어본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답은 분명했다.

 

■“수틀리면 왕을 죽일 수도 있다.”
“어짊과 올바름을 해치는 자는 ‘사내’에 불과합니다. 상 탕왕과 주 무왕이 ‘한낱 사내들’(하 걸왕과 상 주왕)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를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맹자> ‘양혜왕 하’)
임금이 부덕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것, 즉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맹자는 이어 “걸주(桀紂·하 걸왕과 상 주왕을 뜻함)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은 것”(<맹자> ‘이루’)이라 했다.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마음을 잃은 것과 같다.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은 것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을 얻은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 초 재상인 삼봉 정도전은 “임금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복종한다. 하나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임금을 버린다.”(<조선경국전> ‘정보위’)한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장삼이사가 몸과 마음으로 감히 임금 자리를 꿈꿀 수 있겠는가. 그랬으니 임금의 될 자는 오로지 과거급제만을 목표로 삼았던 일반 사대부와는 처음부터 다른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굳이 순자나 맹자의 무시무시한 가르침을 꼽지 않아도 된다. 왕이 될 아이는 아버지이자 군주이자 어른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식이자 신하이자 아이의 도리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기>가 강조하는 “남의 자식된 것을 알아야 남의 아버지가 됨을 알고 남의 신하가 된 것을 알아야 남의 군주가 됨을 알고 남을 섬길 줄 알아야 남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 때 노중례가 편찬한 <태산요록>. 임신 3개월부터 태아의 형상에 변화가 생겨 감응이 일어나므로 태교를 시작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왕과 왕비는 합궁도 함부로 못했다
그랬으니 왕실 교육은 태어날 꿈도 꾸지 않을 때부터 시작됐다.
우선 궁궐의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왕비의 처소였던 교태전(경복궁)과 대조전(창덕궁)을 보라.
주역의 태괘에 속하는 교태(交泰)의 ‘태’는 하늘과 땅의 사귐을 상징한다. 국왕과 왕비의 합궁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어울림을 가리켰다. 또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은 큰 인물을 만든다(大造)는 뜻이 있었다. 임금이 자신의 거처인 강녕전(경복궁)과 희정당(창덕궁)에서 나와 교태전 혹은 대조전에서 왕비와 합궁하는 것은 그야말로 땅과 하늘의 어울림으로 큰 인물을 낳는다는 거창한 듯을 품고 있었다. 합궁도 멋대로 할 수 없었다.
아들이 들어설 길일을 받아 합궁했다. 뱀날이나 호랑이날은 피했다. 제조상궁이나 관상감이 길일이 언제인지 택일했다. 그 뿐 아니라 좋지않은 날 빼고 비오는 날 초하루·그믐·보름까지 피해 그 전후의 날까지 꼽다보면 길일은 한달에 한 두 번 정도였다. 당일에도 비 오고 천둥치고 안개 기고 바람이 분다면 그 또한 합궁이 불가능했다. 모든 조건이 만족돼야 제조상궁이 찾아와 아뢰었다.
“오늘은 양전마마 한 온돌에서 침소하시옵서소.”

 

■태교 10개월이 생후 10년 교육보다 낫다
“이름난 의사는 병이 생기기 전에 다스리고 아이를 잘 가르치는 자는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한다. 스승이 10년 가르치는 것보다 어미가 뱃속에서 10개월 기르는 게 더 낫다.”
1800년(정조 24년) 사주당 이씨(1739~1821)는 <태교신교> ‘태교론’에서 태교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파했다. 1434년(세종 36년) 3월5일 세종의 명을 받아 노중례가 편찬한 <태산요록>을 보면 태교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세히 기록돼있다. 우선 태교는 3개월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임신 3개월이 되면 형상의 변화가 시작되고 느낌에 따라 감응을 일으킨다. 태아가 태내에서 어머니를 통해 소리를 듣고 반응한다.”
<태산요록>은 중국의 의학전서인 <천금방(千金方)>을 인용, 구체적인 3개월 태교법을 전수한다.
“3개월이 되면 주변환경에 따라 변화가 일어나지만 성품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난쟁이, 곱사, 무소, 코끼리, 맹수, 구슬, 보물 따위를 보고 현인군자 등을 뵙고 좋은 향을 피우고, 입으로 <시경>과 <서경>을 읽고, 거처는 깔끔하게, 반듯하게 잘린 것을 먹고 반듯한 자리에 앉도록 한다. 현악기 관악기를 손으로 익히며 귀로는 그릇된 말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고, 눈으로는 나쁜 일을 보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든 여자든 포악해지고 목숨이 짧아진다.”(<태산요록> ‘태교론)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할 이유도 소개했다. 태아의 오장(五臟·심장, 폐, 간, 신장, 비장)이 다섯가지 맛(五味)으로 인해 생성된다는 것이다.
“신맛은 간을, 쓴맛은 심장을, 단맛은 비장을, 매운 맛은 폐를, 짠맛은 신장을 생성시킨다. 음식을 가려먹지 않으면 오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다. 시력이 약하고, 손과 발이 저리고 절뚝거리고 허리와 등이 굽는 것은 간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것이며, 말을 더듬거나 벙어리 혹은 귀머거리가 되고, 혹은 정신이 흐리멍텅한 아기가 나온다면 심장의 형상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또 혀가 짧고 언청이가 되면 비장이, 대머리가 되고 피부가 불긋불긋하면 폐가, 머리카락이 곱슬이거나 노랗고 체구가 검거나 왜소하면 신장의 형상이 갖춰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태교를 하지 않으면 아기의 생김새도 온전하지 않게 되고 질병도 많아지며 낙태의 위험도 따르고 난산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예컨대 쌍둥이의 얼굴과 기질이 비슷한 이유가 무엇인가. 또 같은 집안의 골격과 기품, 같은 나라 사람들의 습관과 지향점이 비슷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태교 때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태교신기>)

1800년 사주당 이씨가 <태교신기>. 태교의 백과사전 격이다. 10개월간의 태교가 훗날 10년 공부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설파했다.

■태교는 임신 3개월부터
율곡 이이가 써서 임금(선조)에게 바친 <성학집요>는 디테일한 태교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임신하면 옆으로 누워자지 않고 비스듬히 앉지 않고 외발로 서지 않는다. 이상야릇한 맛의 음식도 먹지 않는다. 사특한 빛깔을 보지 않고 음란한 소리도 듣지 않고 밤이면 장님에게 시를 외우고, 바른 일만 말하게 한다. 장님에게 시를 외우게 하는 것은 그 소리가 정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얼굴이 단정하고 재주가 남보다 뛰어날 것이다.”
태교는 옛 성인들의 가르침이었다. 공자는 “타고난 사람의 성품은 서로 비슷한데 습관에 따라 달라진다.(性相近 習相遠)”고 했다.(<논어> ‘양화’)
주자는 이런 공자의 언급을 두고 “선을 익히면 선하게 되고 악을 익히면 악하게 된다”고 풀이했다. 태교는 태어나기 전에, 그것도 어머니의 소리와 행동에 감응하게 되는 임신 3개월부터 시작해야 인간의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1766년(영조 42년) 영조가 왕세손(정조)에게 “뱃속 아기에게 어떻게 태교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세손은 태교의 핵심을 찌르는 현답을 올렸다.
“아기를 배어서 움직이거나 가만 있을 때나 착한 일을 하면, 그 아들이 나서 저절로 어진 사람이 됩니다. 때문에 아기를 가졌을 때에 태만할 수 없음을 보인 것입니다.”(<영조실록> 1766년 5월27일)
태어날 자식을 군자로 만드느냐, 소인배로 만드느냐가 태교에 달렸다고 본 것이다.

 

■달이 차오르는 방향으로
이처럼 태교는 태어나기도 전부터 인간의 기질을 선하게 변화시키는 ‘초조기 인성교육’이었던 셈이다. 
임신부는 3개월부터 거처를 별궁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태교에 들어갔다. 골치아픈 바깥 세상과 담을 쌓고 심지어는 임금과도 편지로만 연락할 뿐이었다. 태교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옛 성현의 가르침을 새긴 옥판(玉板)을 보고 그 말씀을 외우면서 하루를 맞았다. 성현의 말씀을 외우면 당연히 태아도 그 소리를 듣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그 빛깔과 성질이 곱고 사람에게도 이로운 옥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도 제격이었다. 하루종일 홍·자수정으로 만든 팔찌와 반지 목걸이를 어루만졌다. 
음식도 각별하게 신경썼다. 특히 단맛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단맛을 지나치게 먹을 경우 칼슘부족으로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이 분해될 때 칼슘을 빼앗아 체내 칼슘을 부족하게 만들고, 대사기능을 방해하다는 것을 옛 사람들은 경험칙으로 알았던 것이다.
임신부의 거처는 정숙을 유지했지만, 거처의 주변에 비치된 궁중악사들은 가야금과 거문고를 연주했다. 5개월부터는 밤낮으로 당직내시와 상궁·나인들이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낭독했다. 7개월부터 고기반찬을 피했다. 대신 태아의 머리가 좋아진다는 콩음식(순두부 등)과 채소, 김·미역·새우·생선 등을 먹었다. 옆으로 걷는 게와 뼈없는 문어 등은 금기음식이었다. 마침내 산달이 다가오면 산실청(왕비) 혹은 호산청(후궁)이 설치됐다. 이윽고 출산이 임박하면 길한 방향, 즉 달이 떠오르는 방향(월덕방위·月德方位)으로 산모의 머리를 두도록 했다. 아기가 탄생하면 임금이 직접 구리 방울을 흔들어 자축했다.

 

■1154명 전원을 사면하라!
만약 왕비나 세자빈이 원자나 원손을 낳았다면 그것은 나라의 경사였다. 원자(원손)을 출산한 산모나 산실청 관원들은 물론, 백성들까지 혜택을 입었다.
예를 들어 즉위한 지 무려 23년 만에 원손(단종)을 얻은 세종은 부분 사면령을 내리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신하들에게 물었다.
뛸 듯이 기뻤던 세종이었지만 신중하게 여긴 뜻이 있었다. “사면이라는 것이 군자에게는 불행이요, 소인에게는 다행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시행하지 않았다”면서 “원자도 아니고 원손이 태어난 것이어서 좀 조심스럽다”고 한 것이다.(<세종실록> 1443년 7월 23일)
그러면서 세종은 사면의 폭을 최소한 줄여 “유배형 이하의 죄인이거나 형을 결정하지 않은 미결수만 석방할까 하는데 어떠하냐”고 운을 뗐다.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형벌의 저울추가 기우는 것을 우려한 세종 임금의 신중한 태도였다. 하지만 대신들은 “이만한 경사가 어디있느냐”면서 “대사면령을 내려야 한다”고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다. 세종은 결국 반역모반죄인과 강상죄인 등을 뺀 나머지 죄인 모두에게 대사면령을 내렸다.
세종 뿐이 아니었다. 1790년(정조 14년) 원자(순조)를 낳은 정조 임금은 죄인명부에 등록된 1154명 전원을 사면해주었다.
“세금과 부역을 차등으로 면제해준다. 70세 이상의 조정관리와 80살 이상의 선비 및 평민에게 각각 한 자급(일종의 호봉)을 더하고 100세 이상의 노인에게 쌀과 고기를 줄 것이다.”(<정조실록>)

1806년 순조의 태를 묻은 곳을 표시한 태봉도. 봉긋한 태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아래에 법주사도 그려져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아기의 운명은 탯줄에 달려있다
궁중에서 아기가 태어난 뒤 생략해서는 안될 의식이 하나 있었다.
길일을 잡아 탯줄을 씻어(세태·洗胎) 태항아리에 넣은 뒤 태실(胎室)에 정중하게 봉안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안태(安胎)의식이라 했다. 이렇게 태를 매장하는 풍습은 중국에도 없는 조선 왕실의 독특한 의식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사관은 “태를 매장한 것은 신라·고려 사이의 일이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없었다.”고 기록했다.(1570년 2월1일) 이 또한 태어난 아기씨의 장래와 관계된 의식이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태로 인해 장성합니다. 아기가 나중에 현명할 지 어리석을 지, 잘될 지 못될 지는 모두 태에 달려있습니다. 그렇기에 태를 신중히 다뤄야 합니다.…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예뻐지고 단정하게 되며…병이 없고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는 것입니다.”(<세종실록> 1436년 8월8일·<문종실록> 1450년 9월8일)
즉 우리 조상들은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과 성하고 쇠함이 모두 태와 관련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태는 결국 사람의 인성을 결정하는 생명선이었던 것이다. 
왕실 자녀들의 태를 안장하는 태실은 명당만을 골라서 세웠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다. 그랬다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 4월15~17일 사이에 전국에 흩어져있던 태실 49기가 경기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지금 서삼릉에는 54기의 태실이 안장돼 있다.

 

■원자는 유모를 닮는다
원자(元子)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의 맏아들을 일컬는 말이다.
왕조시대에는 이 원자(세자)를 나라의 근본, 즉 국본(國本)이라 칭했다. 훗날 유교의 덕목에 충실한 성군이 되어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안녕을 책임질 ‘어린이’이기 때문이었다.
덕성과 예지를 두루 갖춘 임금으로 키우려면 각별한 조기교육이 필요했다. 예를들어 1404년(태종 4년) 5월 9일 사간원에서 11살이 된 원자(양녕대군)을 보양(교육)시키는 법을 임금에게 올렸다.
“원자는 나라의 근본입니다. 원자가 성인이 되고 안되고는 평소 교양이 착한지 착하지 못한 지에 달려있습니다. <주역>은 ‘어린이를 바르게 기르는 것이 성인되는 공부’라 했고, <예기>는 ‘오랫동안 바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바르게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안평부원군) 이서와 (참찬의정부사) 권근 같은 이를 원자의 스승으로 삼고… 환관 가운데 아첨하는 자들은 없애어….”(<태종실록>) 
왕실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원자 아기씨(阿只)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가는 등 보양을 직접적으로 맡은 이는 유모였다.
때문에 원자의 인성에 결정적인 몫을 하는 유모를 택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태교 때와 같은 이유로 갓난 아이의 성품과 기질이 유모를 닮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퍼져 있었다.
“유모는 정신이 맑고 건강하며 성정이 온화하고, 살은 찌며 질병이 없어야 한다. 특히 희로애락의 감정을 조절하여 삼갈줄 알아야 한다. 유모의 품성이 너그럽고 조급한지, 성정이 원만하고 급한지, 골육이 귀하고 천한지, 덕행이 아름답고 악한 지에 따라 갓난 아기가 닮아간다.”(<태산요록>)    

 

■유모는 성생활도 삼가야 한다
<동의보감>은 더욱 구체적으로 유모가 가져야할 태도를 규정한다.
“유모는 짠 음식을 먹어서도 안된다. 감기에 걸렸거나 더위를 먹었을 때 젖을 주면 안된다. 자칫하면 엉키는 젖이 나온다. 유모는 술도 자주 마셔서는 안된다.”
특히 유모가 성생활을 할 때는 절대 젖을 먹여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성욕이 동하면 젖에 바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갓난 아이가 나쁜 젖을 먹으면 곧바로 병이 생겨 토하거나 설사하고 열이 나며 입 안이 헤지기도 하고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고, 밤에 울거나 복통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엇보다 유모를 고르는 일은 ‘아기의 스승을 뽑는 것’이라 여겼다.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를 보라.
“유능한 자를 고르되 너그럽고 인자하며 따뜻하고 공손하며 예의를 차리고 말을 삼가는 여인을 ‘자식의 스승’으로 삼는다. 유능한 자란 결국 자식을 가르칠 스승을 일컫는다.”
태교 때의 엄마처럼 갓난아기 때의 유모는 아이의 인격형성을 위한 휼륭한 스승이었던 것이다. 왜 그런가.
갓난 아기라 비록 알아듣지는 못해도 반복해서 격언이나 지론을 들려주면 결국은 귀에 익고 속이 차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나쁜 말로 현혹해도 꿈쩍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학이 강조하는 조기교육이 필요한 까닭이다. ‘어렸을 때 형성된 천성처럼(少成若天性) 습관이 오래되면 바로 천성이 되는 것(習與性成)’이다.
이와 관련해서 맹자는 환경에 따라 사람의 천성이 달라진다는 것을 설파했다.
“환경에 따라 기상이 다르고 음식에 따라 신체가 달라진다. 크도다! 환경이여! 모두 사람의 자식인데 거처하는 환경 덕분에 왕자는 왕자답게 만들어지는 것이다.”(<맹자> ‘진심장구상’)
무슨 말인가. 맹자는 환경에 따라 인간의 교육이 얼마나 달라지는 지를 설파하고 있다.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부터(태교), 그리고 갓난아기 때부터(유모 혹은 보양청 관리) 조기인성교육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기를 유가의 궁극의 목표인 성인(聖人)으로 만들기 위해….



■유모를 혼낸 성종 임금
여담이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맺은 원자와 유모 사이는 피를 나눈 모자 이상이었다. 원자가 훗날 임금이 되면 자신을 키워준 유모를 봉보부인(내명부 종 1품)으로 봉했다. 종1품은 판서(장관)보다 높고 영의정(정 1품)보다는 한단계 낮은 그야말로 엄청난 품계였다. 유모를 봉보부인으로 봉한 이는 바로 만고의 성군인 세종이었다.
“유모에게 작위를 내린 것은 중국 한나라-진나라-당나라-송나라로 이어진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에 따라 유모 이씨의 봉작을 아름다운 이름을 써서 봉보보인이라 하소서.”(<세종실록> 1435년 6월15일)
그로부터 14년 뒤 봉보부인 이씨가 죽자 세종은 장례에 쓰일 물건과 관곽, 그리고 묘소를 조성할 군인까지 파견했다.
물론 부작용도 있었다. 어린 시절 성종 임금의 유모는 천민 출신인 백씨였다. 그런데 왕위계승권자가 아니었던 성종이 13살의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문제가 생겼다. 졸지에 출세한 봉부보인 백씨가 임금에게 감히 인사청탁을 한 것이다. 어린 임금이었지만 성종은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 백씨를 매섭게 꾸짖었다.
“네가 무슨 뇌물을 받고 이런 청탁을 하느냐. 관직(官職)은 공기(公器)다. 내가 나이가 어리다고 그러는거냐. 내가 은밀한 청을 듣고 사람들에게 관작을 내린다면 정사가 어찌 되겠는가. 다시 한번 청탁하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성종실록> 1470년 7월24일)
 백씨는 어린 임금의 질타에 몹시 부끄러워 하며 물러났다. <성종실록>을 쓴 사관은 대목에서 “아! (저 어린) 성상의 교지가 만세에 빛날 법도가 되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연산군도 유모에게는 한없이 관대했다
그런데 문제의 백씨는 임금의 유모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엄청난 위세를 떨쳤던 것 같다. 그녀의 집 앞에는 노비는 물론 논밭을 뇌물로 바치려는 자와 양민의 신분인데도 차라리 백씨의 노비가 되겠다는 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역시 천민이었던 남편(강선)은 부인 덕분에 당상관이 되기도 했다. 탄핵 상소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성종 역시 백씨 부인을 멀리했다. 하지만 백씨 부인이 죽자 성종은 몹시 슬퍼하면서 ‘종 1품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고 명했다.(<성종실록> 1490년 12월15일)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자신을 키워준 유모 최씨만큼은 끔찍하게 여겼다. 최씨 역시 탄핵 대상이 될만큼 못된 세력을 떨쳤지만 최씨의 친척을 무려 27명이나 양민으로 격상시켰다. 승정원 승지(청와대 수석)들이 “선대왕(성종) 때도 2명에 불과했으니 과하다”고 고했지만 연산군은 “유모 덕분에 어찌 내가 임금에 됐겠냐”고 일축했다. 훗날 최씨가 죽자 연산군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성종 때의 봉보부인 백씨 수준으로 장례를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연산군 일기> 1496년 3월16일·1497년 2월30일)
연산군마저 인간적인 따스함을 잃어버리지 않을만큼 유모의 존재는 임금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스승이자 부모였던 것이다. 

 

<참고자료>
김문식·김정호, <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영사, 2003
육수화, <조선시대 왕실교육>, 민속원, 2008
         ‘조선시대 왕위계승 교육의 변화양상’, <동양고전연구> 제44집, 동양고전학회, 2011
안인숙, ‘조선시대 왕세자교육에 대한 연구:정조를 중심으로’, 성균관대 석사논문, 2008
강효진, ‘조선왕실의 왕세자교육과 그 특징’, 건국대학원 석사논문, 2009
이석규, ‘조선초기 왕세자 교육에 나타난 인성교육’, <사회과교육> 제41권 4호, 한국사회과교육연구학회, 2002
어효준, ‘영·정조대 왕세자교육에 나타난 인성교육’, 충북대 석사논문, 2010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