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1월 고대 이집트의 ‘소년왕’인 투탕카문(Tutankhamun·투탕카멘) 무덤이 발굴되자 심상찮은 소문이 돌았다.
관 뚜껑에 ‘파라오(왕)의 잠을 깨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10살 무렵(기원전 1361년) 즉위한 뒤 19살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요절한 소년왕의 ‘저주’라는 것이었다. 5개월 후인 1923년 4월 무덤 발굴을 후원한 영국의 카나본 경이 공교롭게도 면도 중에 생긴 상처 부위를 모기에 물린 뒤 폐혈증으로 사망했다. 투탕카문 미라의 얼굴에 난 상처와 똑같은 부위였으니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코브라의 출현
의문의 죽음이 줄을 이었다. 발굴 당시 무덤에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고고학자 휴이블린 화이트는 신경쇠약을 앓다가 목을 매 자살했다. 카나본 경을 돌보던 간호사와 조카, 그리고 부인도 줄줄이 사망했다. 미국 철도계의 거물 조지 굴드는 거액을 지불한 대가로 투탕카문의 관을 직접 만진 뒤 그만 폐렴으로 죽었다. 자신을 파라오의 후예로 자랑했던 이집트 왕족은 무덤을 본 뒤 아내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발굴 후 10년간 사망한 관련자는 20여명에 이르렀다.
발굴책임자였던 하워드 카터는 용케 저주를 피했다. 하지만 어느 날 카터가 애지중지하던 카나리아가 코브라에게 잡아먹히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이집트에서 코브라는 파라오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투탕카문에서 출토된 황금마스크에도 코브라가 디자인돼 있었다. 투탕카문의 저주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들은 3300년간 밀폐된 무덤 속의 유해 곰팡이에서 ‘저주의 실체’를 찾고자 했다. 그들은 이후 발굴된 파라오의 미라 곰팡이에서 폐렴을 일으키는 포름알데히드 같은 유독물질이 포함돼있음을 확인했다.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포도상구균도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원체 면역체계가 취약한 카나본 같은 이들이 무덤 속 맹독성 곰팡이에 노출돼 사망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투탕카문의 저주는 곧 ‘미생물의 저주’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학이 어찌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른 하늘에 날벼락
무덤발굴 때마다 별의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실제로 해괴한 사건 사고가 속출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다반사였다.
예컨대 1973년 7월26일 경주 천마총에서 금관을 비롯한 금빛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황금관을 담은 상자를 무덤 밖으로 옮기기 위해 한 발짝 떼는 순간…. 그때까지도 뙤약볕이 이글거리며 내리쬐고 있던 서쪽 하늘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왔다. 일순 하늘이 암흑천지로 변하면서 ‘꽈다당’하는 소리와 함께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유물 상자를 옮기려던 조사원과 인부들은 놀라 혼비백산, 금관을 수습한 상자를 그 자리에 내려놓고는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현장사무실로 뛰었다. 갑작스런 하늘의 조화에 잔뜩 겁을 먹었던 조사요원들은 폭우가 진정되자 조사하던 무덤 내부로 돌아가 작업에 나섰다. 그런 다음 금관 상자를 안전하게 무덤 밖으로 옮기자 그렇게 무섭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평상대로 맑게 개었다. 모두들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1971년 7월 백제 무령왕릉을 팠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왕릉의 입구를 파헤치는 순간 천둥 번개를 동반한 억수 같은 소나기가 퍼부었다. 별별 흉흉한 소문이 들리고 실제로 발굴과 관련된 인물들이 횡액을 당했다.
당시 김원룡 당시 발굴단장은 공교롭게도 빚에 몰려 집을 처분했고 남의 차를 빌어 타고 무령왕릉에 가다가 아이를 친 일도 있었다. 무령왕릉의 ‘무’자만 나와도 가슴이 떨렸던 김원룡은 늘 연구실 책상머리에 유서를 붙이고 다녔다는 후문이다.
■왕릉발굴의 저주
중국의 경우 더 극적인 일이 벌어진다. 1956년 명십상릉 중 정릉(명나라 만력제의 무덤)을 발굴했을 때도 무서운 비가 내렸다. 명루의 돌짐승과 인부 한사람이 차례로 벼락에 맞아 떨어지거나 죽었다. 실성한 노파는 발굴현장에 찾아와 흐느적거리며 “제발 부탁이니 날 용서해요. 더 이상 사람을 해치지 않을 게요”라며 해괴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당시 북경시 부시장 우한(오함)의 비극 또한 왕릉 발굴의 저주로 치부됐다. 우한은 1955년 “왕릉발굴은 시기상조”라는 다른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굴을 강행했던 인물이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자신의 희극작품 ‘해서파관(海瑞罷官)’이 이른바 4인방의 함정에 걸렸다. 중국을 10년간이나 소용돌이에 빠뜨린 문화대혁명의 서곡이었다. ‘해서(1514∼1587년)’는 명나라 때 ‘해청천(海靑天)’으로 일컬어질 만큼 청렴하고 대쪽같은 성격으로 황제의 실정을 질타한 인물. 그런데 모택동은 1959년 “해서는 황제를 비판했지만 충심으로 절개를 지켰다”면서 추켜세웠고 그 선양작업을 우한에게 맡겼다. 우한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펼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해서를 추앙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뒤에 ‘해서파관’이라는 이름의 희극으로 공연됐다. 공연은 모택동(毛澤東)의 극찬을 받았다. 그런데 1965년,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이 “우한의 해서파관은 독초(毒草)이며 깨끗하게 청소돼야 한다”고 포문을 열면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해서파관’은 (현대중국의 황제인) 모택동을 겨냥한 것이라는 올가미였다.
우한은 1969년 홍위병들에 의해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죽기 전 정릉발굴을 반대했던 동료에게 눈물을 흘리며 옛 일(정릉 발굴)을 후회했다.
“이보게, 자네가 맞았어. 자네가 나보다 훨씬 멀리 내다본 것 같아.”
■이집트 왕비의 모습은
각설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집트 투탕카문 무덤이 뜨겁게 재조명되고 있다.
이집트 정부가 무덤 뒤편에 숨겨진 또다른 무덤, 즉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고대 이집트의 2대 미녀로 꼽히는 네페르티티 왕비의 무덤을 찾겠다고 나선 것이다. 왕비는 투탕카문의 이모인지, 계모인지는 모르지만 당대에 섭정을 했다는 설도 있는 여걸이다. 1914년 독일인인 루트비히 보르하르트가 발굴해서 독일로 냉큼 밀반출한 흉상의 주인공이다. 왼쪽 눈을 칠하지 않은 미완성 작품이지만 미소가 절색이다. 만약 발굴이 이뤄진다면 우아한 모습의 네페르티티 왕비는 어떤 메시지를 안겨줄까. 저주일까 행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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