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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추사 김정희는 왜 '요사스런 자식'이란 쌍욕을 들었을까

요즘 다른 이들을 무자비하게 비판함으로써 관심을 끄는, 이른바 ‘관종’들이 출몰하고 있더군요. 그나마 품위있는(?) 단어를 쓴다면 ‘독설가’ 정도는 되겠는데요. 하지만 남을 매섭게 비판할 자격을 갖출만큼 독보적인 학식과 재능을 갖추고 있는 분이라면 몰라도 단지 ‘관종’ 수준의 인간들이 짓껄이는 ‘디스’ 쯤이야 그냥 무시해버리는게 낫겠죠. 

전남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걸려있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위)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무량수각’). 추사는 귀양길에 원교의 ‘대웅보전’ 편액을 “당장 떼어내라”고 호통치고는 ‘대웅보전’과 ‘무량수각’(아래 사진)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귀양길에서 돌아오던 추사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떼어냈던 원교의 글씨를 다시 붙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요사스런 자식’
하지만 만약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같은 분에게 인정사정 없는 독설을 들었다면 어떨까요. 그 분은 글씨 뿐 아니라 그림, 시와 문장, 그리고 고증학과 금석학, 다도(茶道)와 불교학 등 섭렵하지 않은 분야가 없는 천재가 아닙니까. ‘타의 추종을 불허할’ 그 분만의 장기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감상과 평론’ 이었습니다. 그런 분한테 ‘형편없다’는 독설을 들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먼저 1830년(순조 30년) 부사과 김우명이라는 인물이 올린 상소문을 봅시다.
“김노경(추사의 부친)의 요사스런 자식은 항상 반론을 가지고 교활하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륜이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순조실록> 1830년 8월 27일)
아무리 김우명이 정적이었어도, 추사가 얼마나 거만하고 독선적이었기에 ‘항상 반론을 갖고 사는 요사스럽고 교활한 자식’이라며 비판했을까요.

추사 김정희가 사용했다는 붓과 벼루 등이 보물(54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추사는 벼루 100개의 밑창이 빠지고, 붓 1000자루가 몽땅붓이 되도록 글씨를 썼다고 자부했다.

그런 평가를 들을 소지가 있습니다. 남의 작품을 평가하는 추사의 지론을 알면 고개가 끄덕여질 겁니다.
“서화를 감상하는 데는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 같아야 그 진가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금강안 혹리수’가 뭔 말일까요. 사찰을 수호하는 금강 역사의 눈처럼 무섭게, 그리고 세금을 거두는 혹독한 세무관리의 손끝처럼 치밀하게 서화를 감상해야 진가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난초 그림을 평한 내용을 봅시다.
추사는 “이 늙은이(추사)도 의당 손을 오므려야겠다. 압록강 이동(조선)에 이만한 작품은 없다”고 한상 말아올립니다. 그러나 그 전제가 무섭습니다.
“아무리 9999분까지 이르러도 나머지 1분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습니다. 이 마지막 1분은 웬만한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요.”
이게 무슨 소리죠. 1만분의 1, 즉 ‘0.01%’의 부족도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까. 뭐 그럴만도 하겠죠. 추사야말로 “70평생에 벼루 10개의 밑창이 뚫리도록 먹을 갈았고, 붓 1000자루가 몽땅붓이 되도록 글씨를 썼다”고 자부할만큼 치열한 공부를 했던 분이니까요. 

흥선대원군 이하응(오른쪽)이 그린 묵란도. 추사 김정희는 이하응의 묵란도를 보고 “조선에서 이만한 그림이 없다”고 칭찬했다. 추사 김정희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작품을 칭찬했지만, 0.01%(1만분의 1)라도 부족하면 안된다고 전제를 달았다.


■당대의 명필에게 ‘붓잡는 법도 모른다’ 디스
추사의 ‘독설’은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습니다. 150년이 지난 이제와서 보면 너무 심할 정도로 다른 이와 다른 이들의 작품을 몰아붙입니다. 당대의 명필로 꼽히던 원교 이광사(1705~1777)도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이광사가 어떤 분이냐. 1755년(영조 31) 나주 벽서 사건에 연좌되어 의금부로 끌려올 때 “나에겐 글씨 재주가 있으니 제발 죽이지는 말아달라”고 호소했던 분입니다. 
이광사는 서예의 이론과 역사를 <서결>라는 책으로 펴냈습니다. 그런데 추사는 이광사의 사후에 이광사가 <서결>에서 언급한 ‘조선의 필법’을 두고 “말도 안되는 논리”라고 대놓고 깔아뭉갭니다. 즉 이광사는 <서결>에서 ‘언필(偃筆·붓을 뉘어서 쓰는 필법)의 병폐’를 지적했는데요.  

왼쪽 사진은 원교 이광사의 <서결>.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이광사의 이론 비평서이다. 그러나 추사 김정희는 <서결>을 읽고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것이 <서원교필결후>(오른쪽)이다. 추사는 이 글에서 원교를 ‘붓도 잡을 줄 모르고, 먹도 쓸 줄 모르는 형편없는 서예가’로 깎아내렸다.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추사는 이 대목을 문제 삼아 “서예가가 붓 탓을 하면 되겠냐”면서 “가만보니 원교는 붓 잡는 법(용필·用筆)과 먹 쓰는 법(용묵·用墨)도 모른다”고 ‘디스’했습니다.
아니 서예의 대가인 원교 이광사에게 ‘붓 잡는법’ ‘먹 끄는 법’도 모른다니요. 지나치지 않습니까. 또한 추사의 비판이 도를 넘어섰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원교의 주장이 나름 타당성이 있기 때문인데요. 살아있는 글씨를 쓰려면 붓의 8면을 다 이용하여 수시로 세워가며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언필’, 즉 붓을 뉘어서 쓰게 되면 붓의 한 면만 이용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하면 붓이 누운채 진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곧 대빗자루를 뉜 채 마당 쓸 듯이 글씨를 쓰는 격이죠. 원교는 이러한 ‘언필의 병폐’를 지적한 건데요. 
그러나 추사는 원교의 본뜻을 헤아리지 않고 ‘디스’했는데요. 그 정도로 그친게 아닙니다. 추사는 “원교가 타고난 재능은 있지만 배움(學)이 없어서 그런 거니 그의 허물은 아니다”라고 꼬집는데요. 그러면서 “요사이 우리나라 서예가(이광사)의 글씨를 보면 마치 썩은 쥐로 봉황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 같다. 가소롭지 않은가”라고 질타했습니다. 18세기를 풍미한 서예가를 두고 ‘배우지 못했다’고 했으니 너무 한 것 아닌가요.
원교 이광사와 관련해서는 또 하나의 일화를 남겼죠. 1840년(헌종 6년) 추사가 제주도 위리안치의 유배형을 받고 내려가는 길에 초의선사(1786~1866)를 만나러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도착했는데요. 
그때 추사는 대둔사의 ‘대웅보전’ 네 글자 편액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저 현판을 당장 떼어내라”고 질타했답니다. 바로 추사가 맹렬하게 비판했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답니다. 추사는 그런 다음 ‘대웅보전’과 ‘무량수각’ 글씨를 쓴 뒤 “이걸로 걸라”고 했답니다. 

이삼만(1770~1840)이 쓴 지리산 천은사의 ‘보제루’와 곡성 태안사의 ‘배알문’ 편액 글씨. 이삼만은 추사로부터 ‘이 지방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치욕적인 평을 들었다.


■“노인장은 밥은 먹겠네요”
그래도 원교는 사후에 험한 소리를 들었으니 불행중 다행이죠. 동시대 추사에게 독설을 들은 분들은 어땠을까요. 유배길 전주에서 서예가 이삼만(1770~1847)을 만났을 때의 일인데요. 당시 70살이 된 이삼만은 지리산 천은사의 ‘보제루’와 곡성 태안사의 ‘배알문’ 현판을 쓴 인물이었거든요. 추사는 이삼만과, 그 제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이삼만의 글씨를 이렇게 평합니다.
“노인장은 이 고장에서는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세상에 이런 수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이도 16살 위인 분(이삼만)에게 아니 언제 다시 볼거라고 립서비스도 못한단 말입니까. 이 정도였으니까 <순조실록>이라는 정사에 ‘요사스런 자식’이라는 쌍욕까지 들은 거죠. 

‘세한도’와 함께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김정희의 ‘불이선란도’. 추사의 전형적인 난 그림과 글씨체를 동시에 잘 나타내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문자향 서권기 없다”
지금같으면 너무 너무 억울해 할 당대 생존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우봉 조희룡(1789~1866)인데요. 추사는 서자인 김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봉을 ‘디스’합니다.
추사는 “난초 치는 법은 예서 쓰는 법과 비슷해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券氣)가 있어야 한다”면서 뜬금없이 조희룡의 ‘난초’ 그림을 소환합니다.
“조희룡 같은 무리(輩)는 나에게 난치는 법을 배웠지만…가슴 속에 문자기(文字氣)가 없어서….”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정인을 ‘뒷담화’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편지가 훗날 <완당선생문집>에 실려 만천하게 공개된 게 문제였죠. 추사의 이 한마디 평가 때문에 조희룡은 지금 이 순간까지 ‘문자향 서권기’ 없는 화가로 폄훼되고 있답니다.
대체 ‘문자향 서권기’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손재주가 아니라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이 밴’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겁니다. 추사의 이 ‘문자향 서권기’ 타령에는 사실 문인사대부의 오만함이 배어있습니다. 시서화는 책을 많이 읽은 문인사대부만이 그 가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죠. “너희(조희룡 같은 중인 전문화가)는 절대 문자향 서권기를 작품 속에 표현할 수 없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거겠죠.

조선 후기 중인 출신 화가인 우봉 조희룡(1789~1866)의 ‘묵란도’(왼쪽 그림). 추사는 우봉의 난 그림을 두고 ‘문자향 서권기가 없다’고 비판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재주는 손끝에 있다”고 항변한 우봉
하지만 조희룡은 그리 띄엄띄엄 볼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1848년(헌종 14년) “금강산을 다녀와 시를 지어 올리라”는 헌종(재위 1834~1849) 임금의 명을 받들었고, 또 임금(헌종)의 지시에 따라 창덕궁 중희당에 부속된 ‘문향실’의 편액을 쓴 인물이었습니다. 헌종은 회갑을 맞은 우봉에게 특별히 벼루를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봉의 예술적 지향점은 추사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봉은 아무리 ‘문자향 서권기’를 갖고 있어도 손재주, 즉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면 아무리 배워도 쓸모가 없다고 여겼거든요.
“글씨와 그림은 모두 손재주다. 재주가 없으면 총명한 사람이라도 종신토록 배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손끝에 있는 것이지 가슴에 있는 것은 아니다.”(<석우망년록>)
이 말은 ‘서화에는 재능이나 재주가 아니라 책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만 배어나오면 그 뿐’이라는 추사의 예술론을 향한 통렬한 반박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아무리 문인 사대부라도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서화가를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봉이 추사의 제자’라는 고정관념도 선입견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우봉은 1851년(철종 2년) 탄핵을 받은 추사의 복심(심복)으로 지목되어 19개월이나 임자도(전남 신안)에 유배되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보면 우봉이 추사를 스승으로 칭한 예가 없답니다. 예컨대 우봉은 추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輓詞)를 남겼는데요. 이런 내용입니다.

‘문자향 서권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180호). 제주도 유배생활 중인 스승을 위해 변함없이 서적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의 절개를 칭송하며 그려준 그림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완당학사(김정희)는 수를 누리기를 71세이니 500년 만에 온 분이라네. ~백옥에 마음을 새기고 황금으로 눈물을 주조함은 우리네 궁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네.… 조희룡이 재배하고 만장을 올린다.”
그런데 만사를 뜯어보면 스승 제자를 의미하는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봉은 19세기 문화계 거목이던 추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제자를 자처하지는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우봉(1789년)과 추사(1786년)의 나이차는 불과 3살였으니 아무래도 스승 제자를 칭할 나이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심지어 우봉은 “대나무 그림을 그리지만 스승에게 배운 적이 없고, 햇빛과 달그림자 속에서 배웠다”는 강한 자의식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화구암난묵>)

우봉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눈처럼 흩날리는 매화 꽃 잎 가운데 선비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향설매, 즉 향기로운 눈바다에 빠지는 듯한 매화그림이다.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간송미술관 소장

1849년(헌종 15년) 6월부터 우봉은 소장파 작가들을 이끌고 추사를 찾아갑니다. 모두 7차례에 걸친 품평회에는 서예가 8명, 화가 8명 등 16명이 참여했는데요. 이때 추사는 각 작품에 격려를 겸했지만 그래도 특유의 ‘금강안 혹리수’ 촌평을 달아주었습니다. 우봉 또한 이들의 작품에 화제시를 써주었는데요. 
그런데 같은 작품을 두고 두 사람의 평이 대조적이었습니다. 유재소(1829~1911)의 ‘추수계정도’를 두고 추사는 “문인화의 법도는 따르지 못하고 형식만 취했다”고 했고, 우봉은 “가을국화인양 아담한 사람이구나…언덕과 골짜기에 시로 다니는구나”라 했다. 김수철(?~1862)의 ‘매우행인도’를 두고도 “색칠이 세밀하지 못하고 우산 쓴 사람을 그린 것도 그림쟁이 수법이 됐다”는 추사와, “사람들 모두 실제의 산을 사랑하지만 나는 홀로 그림 속 산에 들어간다”는 우봉의 평이 완전히 다릅니다.

우봉 조희룡의 ‘홍매도 대련’. 우봉은 용을 그리듯 매화를 그렸다. 거칠고 힘찬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개인소장


■150년간 폄훼된 묵장의 영수
저명한 서예가이자 언론인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은 우봉을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 칭했습니다,다. ‘먹을 다루는 세계’(묵장)의 ‘우두머리’(영수)라는 뜻입니다. 함부로 우봉을 추사의 제자라느니, 문자향 서권기가 없는 그저그런 화가라느니 하면서 폄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하나 사족을 달자면 저 개인적으로는 ‘문자향 서권기’가 그득한 ‘세한도’보다는 화려하고 보기좋은 ‘매화서옥도’가 훨씬 보기 좋습니다. 개인취향인데 뭐 어떻습니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추사가 아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 우봉을 디스한 것이 150년이 넘도록 ‘묵장의 영수’ 소리를 듣던 작가에게 쉽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입조심 해야겠습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