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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배탈외교와 핑퐁외교

197179일이었다.

파키스탄을 방문 중이던 헨리 키신저 미백악관 안보담당특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했다.

그는 야하칸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만찬을 전격 취소하고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80떨어진 나디아갈리 산장에서 휴식을 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튿날에도 배탈은 낫지 않았다고 보도됐다. 전 세계가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이목을 따돌리기 위한 감쪽같은 속임수였다. 그는 그 이틀간 비밀리에 당시 적성국가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와 만나고 있었다. 이는 훗날 배탈외교’, 혹은 복통외교로 일컬어졌다.

 장발의 히피선수글렌 호완. 1971년 나고야 세계대회 도중 중국선수 좡쩌둥과 우연히 만나 친분을 쌓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키신저의 배탈외교

11일 키신저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도 그 내막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5일 뒤인 16일이 되자 깜짝 놀랄만한 뉴스를 전한다. 닉슨 대통령의 중국방문 계획이 발표된 것이다.

급기야 이듬해인 72221일 닉슨 미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했고, 79년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미·중간 국교가 정상화했다. 전 세계는 이 경천동지할 일사천리의 사태에 충격에 빠진다.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철옹성 같은 반목의 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은 것이다. 바로 2.5g의 탁구공이 지구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일련의 사건을 두고 이런 표현을 썼다.

작은 공(탁구공)이 큰 공(지구)을 흔들었다.(小球轉動大球)”

운명을 바꾼 결정

그랬다. 불과 4개월 전 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19713월 하순 일본 나고야에서는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중국은 참가여부를 두고 큰 고민에 빠졌다. 당시 중·일간 외교관계가 없었던 적성국가였다. 일본의 우익이나 타이완 공작원들의 테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롯한 수뇌부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탁구가 이번에는 국제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승인을 얻어 대회참가를 결정했다. 마오 주석과 저우총리는 선수단에게 신신당부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심지어는 죽음마저도.”(마오)

승부보다는 우호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저우)

세계의 운명을 바꾼 결정이었다. 또 하나의 운명이 다가왔다.

19724월 미국을 방문한 좡쩌둥이 프리스비(원반) 를 던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히피청년과 인민 영웅의 만남

나고야 대회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44일이었다.

미국선수단 가운데 글렌 코완이란 선수가 있었다. ‘히피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장발에 꽃무늬 옷을 입은 19살 선수. 히피선수가 체육관에서 몸을 풀다가 그만 선수단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당황한 히피청년 앞에 버스 한 대가 멈춰섰다.

중국선수단의 버스였다.

헤이! 이 차를 타!”

버스 안의 선수가 손을 흔들어 차를 타라고 손짓했다. 코완은 엉겁결에 차를 탔다.

사실 그때만 해도 불구대천의 원수쯤으로 치부된 적성국가의 버스를 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코완에게 타라고 손을 흔든 이는 바로 중국의 인민영웅 좡쩌둥(莊則棟)이었다.

이 잘 생긴 중국청년은 61·63·65 세계탁구선수권 3연패를 자랑하는 중국의 인민영웅이었다. 선수단 부단장도 겸하고 있었다. 좡쩌둥도 미제국주의자 타도의 구호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성장했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전 마오쩌둥 주석이 미국 언론인인 에드가 스노와 평생의 친구로 지낸 것을 떠올렸습니다. 용기를 낸 것입니다.”

좡쩌둥은 엉겁결에 버스를 탄 코완에게 황산(黃山·안휘성에 있는 중국의 명산)이 그려진 수건을 선물했다. 손짓발짓으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코완은 좡쩌둥이 선물한 수건을 펼쳐들었다. 다음 날 코완은 답례품을 전달했다.

평화를 상징하는 3색 티셔츠를 좡쩌둥에게 전달했다. ‘Let it Be’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였다. 둘의 만남은 대단한 파장을 일으켰다.

중국갈래요?” “물론입니다.”

기자들의 질문공세가 계속됐다. 어떤 기자가 코완에게 중국방문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코완은 가보지 못한 나라에 가고 싶다물론이라고 코멘트했다. 이 코멘트는 중국과 미국의 수교를 성사시킨 한마디였다.

코완의 물론 가고 싶다는 한마디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보고됐다. 46일이었다.

처음 저우언라이 총리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는 병중에 있는 마오쩌둥 주석에게 이 같은 뜻을 전달했다. 마오 주석도 동감이라는 뜻을 전했다. 당시 마오쩌둥의 건강상태는 최악이었다. 폐렴과 심장이상 등으로 위중했다.

의사들이 처방한 수면제를 먹고서야 비로소 잠이 들었다. 그 날 밤(46)도 마오 주석은 수면제를 복용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잠에 취해가던 마오 주석이 갑자기 수간호사를 부른 것이다.

자네. 외교부(의전장)에 전화를 걸게.”

수간호사가 전화를 연결하자 마오 주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미국 선수단을 즉각 초청하라고 하게. 즉각!”

귀를 의심한 수간호사 우쉬진(吳旭君)은 몇 번이나 확인했다.

초청 말씀입니까. 미국 선수단을 초대하라는 말입니까.”

워낙 중요한 결정이었으므로 주석의 말이 맞는지 확인한 것이었다. 마오 주석은 잠결에 빠져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주석은 곧바로 잠들었다.

꿈의 계시와도 같은 마오 주석의 지시였다. 역사가 이로써 바뀌었다.

410일 미국선수단은 중국 인민의 열렬한 환호 속에 베이징에 도착, 국빈대접을 받는다. 글렌 코완은 단연 인민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수 만 명의 인파 속에서 나야말로 마오 주석의 말마따나 요원의 불길을 일으킨 주인공이라며 으쓱댔다.

모든 게 우연 같고 드라마 같은 사연이다. 그러나 실은 필연이었다.

적의 적은 친구

알다시피 미국과 중국은 총부리를 겨누고 싸웠던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양국에게 공통의 주적(主敵)이 생겼으니 바로 소련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물론 동서냉전의 주적이었다.

그런데 한때는 사회주의 동지였던 중국과 소련 사이에 해묵은 감정이 폭발한다. 

 마오쩌둥 등 중국의 수뇌부들은 옌안 시절 식탁을 겸한 탁구대를 두고 무료함을 달랬다.

1953년 소련에 흐루시초프 체제가 등장하면서 중국과 소련은 결별의 길로 접어든다. 흐루시초프 치하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면서 마오쩌둥의 개인숭배를 은연중 비판한 것이다. 그러자 중국은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소련의 수정주의를 맹비난했다.

급기야 69년 중·소 국경인 우수리 강에서 2차례에 걸쳐 무력충돌이 벌어진다. 이제 중국의 주적(主敵)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된 것이다.

더욱이 19691월 취임한 미국 닉슨 대통령도 중국에 잇단 화해제스처를 보냈다. 닉슨은 2월 외교교서에서 중공(中共)’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호칭했다. 325일에는 미국 시민의 중국 여행을 허락했다. 글렌 호완-좡쩌둥 사이에 벌어진 우연한접촉은 이런 바탕에서 이뤄진 것이다. ‘(소련)의 적(미국)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위위구조와 탁구

위위구조(圍魏救趙)’라는 고사가 있다.

기원전 353년 손빈이라는 군사전략가가 세운 방책이다. 즉 당시 전국시대 강국이었던 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했다. 풍전등화에 놓인 조나라는 제나라에 지원병을 요청한다. 당시 제나라의 군사 전략가는 손빈이었다.

손빈은 위기에 빠진 조나라 수도 한단을 구하는 직접 공격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전군이 전선에 나가는 바람에 노약자들만 있는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공격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다. 정면공격보다는 상대의 약점을 찌르면 상대가 힘을 쓰지 못한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과연 손빈이 위나라 수도 대량을 공격하자 조나라를 포위한 위나라군이 퇴각하기 시작한다. 제나라는 서둘러 퇴각하는 위나라군을 공격해서 대승을 거둔다.

이것이 위나라를 포위함으로써 조나라를 구한다위위구조의 고사이다.

중국인들은 탁구라는 종목이 바로 테이블을 앞에 두고 상대의 약점을 순간순간 콕콕 찌른 뒤 쉽게 넘어오는 공을 강하게 공격하는특성이 있다고 여긴다.

 탁구는 혁명의 상징

사실 중국인들과 탁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탁구는 중국에서 혁명의 상징이다.

대장정을 끝내고 옌안에서 전력을 재정비하며 고난의 세월을 보낸 홍군은 탁구로 고달픈 심신을 단련했다.

탁구에 대한 홍군의 열의는 대단했다. ~레닌클럽마다 중앙에는 식사시간이면 식탁으로 바뀌는 대형탁구대가 있었다. 식사시간이면 언제나 배트(라켓)와 공, 네트로 무장한 4~5명의 비적(匪賊·홍군을 말함)들이 동료들의 식사를 재촉했다. 그들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병사들은 자기 부대의 챔피언이 최강자임을 자랑했으며 필자(에드가 스노)는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혁명 주체들도 똑같았다.

옛 사진을 보면 마오쩌둥의 경우 펜홀드 그립을 쓰다가, 셰이크핸드 그립으로 바꿀 정도로 능숙한 탁구솜씨를 보인다. 저우언라이의 경우 말을 타다 떨어져 오른팔을 다쳤다. 그는 재활훈련의 하나로 탁구에 빠졌다. 총리시절 탁구선수의 개인신상 뿐 아니라 타법까지 꿰뚫고 있었다. 1972년 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탁구를 하다가 해방군 305병원에 입원할 정도였다.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신중국을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 미증유의 위기에 빠진다.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운동이 완벽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1960~61년 사이에 극심한 가뭄에 이은 기근이 대륙을 강타했다. 여기에 시시 때때로 불어닥친 태풍은 살인적인 강풍과 홍수를 동반했다. 어떤 지역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50%가 사망했다. 2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약 2000만명이 희생됐다.

이 때 도탄에 빠진 중국대륙에 복음과도 같은 소식을 전해준 것이 바로 탁구였다. 

1972년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국을 방문한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국무장관을 접견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5946일 홍콩 출신의 22살 청년 룽궈퇀(容國團)이 독일 도르트문트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헝가리의 시도 페렌크를 꺾고 남자단식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세계챔피언이 되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不拿世界冠軍死不瞑目) 기회는 여러 번 오지 않는다. 왔을 때 반드시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人生有幾回搏 此時不搏何時搏)”

룽궈퇀이 대회준비를 하면서 외친 이 구호는 암울했던 중국인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됐다. 이 구호는 지금도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일상구호가 됐다.

중국은 여세를 몰아 홈에서 열린 1961년 제2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차지했다. 남자단체전을 석권한 데 이어 남녀단식에서 좡쩌둥(莊則棟)과 추중후이(邱鍾惠)가 패권을 안았다. 10년 뒤 글렌 코완과 함께 중미 수교의 길을 연 핑퐁외교의 주역인 좡쩌둥의 출세무대였던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 역시 2.5g의 탁구공이 한반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추억이 있지 않은가.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중국을 누르고 여자단체 우승을 차지한 바로 그 달콤했던 기억.

그러고 보니 그 열매를 따기 위해 남북선수들은 46일간이나 작은 통일을 이룬 가슴 벅찬 추억도 떠오르기도 한다. 풀릴 줄 모르는 남북관계를 볼 때마다 2.5g의 탁구공으로 통일을 이뤘던 그 때를 기억하게 된다. ()

경향신문 문화체육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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