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두려워 한 것은 사서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
성군의 말씀이 아니다. 연산군의 말씀이시다. 비록 폭군이지만 역사를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 한 탓일까. 연산군은 넘지 못할 선을 넘고 말았다.
절대 보아서는 안될 사초를 보았을 뿐 아니라 아예 ‘임금의 일’은 역사로 남기지 말라는 엄명까지 내렸다.
때는 바야흐로 1498년 <성종실록> 편찬과정에서 사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파문을 일으켰다. ‘조의제문’은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죽인 것을 빗대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진노한 연산군은 “당장 김일손의 사초를 모조리 가져오라”는 엄명을 내린다.
■발췌본을 열람한 연산군
그러자 실록청 당상(국사편찬위원장) 이극돈과 유순, 윤효손, 안침 등이 극력 반대한다.
“예로부터 사초(史草)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보게 되면 후세에 직필(直筆)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이 그래도 고집을 피우자 이극돈 등은 재차 만류한다.
“여러 사관들이 사초를 다 보아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신(이극돈) 등도 나이가 들어 조종조의 일을 다 알고 있고, 김일손의 사초를 <실록>에 싣지 않았는데 지금 들이라고 명령하시면….”
그런데도 연산군의 서슬퍼런 명령이 계속되자 이극돈 등은 절충안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상고할만한 곳을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일(조의제문)을 볼 수 있고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았다는 의(義)에도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자 연산군은 “알았다”는 전교를 내렸다. 실록청은 그에 따라 김일손의 사초에서 6개 조목을 ‘절취해서 봉해’ 올렸다. 그러니까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전부 본 것이 아니라 이극돈 등의 반대로 이른바 ‘발췌본’을 열람한 것이다. 역사를 두려워 한 연산군으로서는 “임금이 사초를 보지 않았다는 ‘명분’을 얻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하지만 ‘발췌본’을 열람함으로써 연산군은 ‘반(反)역사의 판도라 상자’를 연 셈이었다. 1506년(연산군 12년) 임금은 해괴망측한 전교를 내린다.
“임금은 사서를 두려워 한다. <춘추>에 이르기를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숨긴다는 뜻)한다(爲親者諱)’고 했다. 사관은 시정(時政·당대의 정책)만을 기록해야지 ‘임금의 일’을 기록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근래 사관은 임금의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기록하면서 아랫사람의 일은 은휘하여 쓰지 않으니 죄 또한 크다.”
■‘연산과 호해’는 닮은 꼴
그러면서 연산군은 “이제 사관에게 더 이상 임금의 일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아예 역사가 없는 것이 더욱 낫다”고 선언한다. 덧붙여 “임금의 행사는 역사에 구애될 수 없다”면서 하필이면 나라를 망쳐버린 진나라 진2세(호해)의 말을 인용한다.
“‘진 2세는 (황제란) 눈과 귀가 좋아하는 바를 하고 마음과 뜻이 즐거운 것을 다한다’고 했다. 모두들 잘못된 말이라고 하지만 무엇이 잘못됐단 말인가.”
이 대목에서 <사기(史記)>가 떠오른다. 진 2세 호해는 아버지인 진시황이 죽은 뒤에도 아방궁 건축을 강행하고 중원의 병졸들을 징발하는 등 백성들을 끝임없이 괴롭혔다.
신하들이 아방궁 건축 등을 반대하자 진 2세는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데 무슨 헛소리냐.”(<사기> ‘진시황본기’)
사마천(司馬遷)은 그런 진2세를 두고 “사람의 머리를 하고 짐승의 소리를 내뱉는다(人頭畜鳴)”고 장탄식 한다.
연산군은 어찌 그렇게 천하통일 후 불과 15년 만에 나라를 들어먹은 진 2세 호해를 닮았다는 말인가.
■이행의 사초에 담긴 ‘이성계의 만행’
하지만 연산군만 탓할 수 있을까. 연산군보다 더 지독한 이가 조선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였으니까…. 1393년(태조 2년)의 일이다.
개국공신 조준이 고려왕조의 사초를 읽어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려 공양왕 때 사관이었던 이행이 “(고려의) 우왕과 창왕을 죽인 자는 바로 이성계”라고 지목한 사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조준은 즉시 태조에게 고했다.
그러자 태조는 “(우왕과 창왕이 죽은) 1388년 이후의 사초를 모조리 바치라”고 명했다. 역시 태조 이성계로서는 깜짝 놀랄만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1388년, 고려 우왕과 창왕 부자, 그리고 변안열이 죽은 일을 두고 ‘이성계에 의해 죄도 없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태조실록>은 이행의 사초를 무시하고, “이행이 이색과 정몽주 등에 아첨하여 주상(태조)께서 신우(우왕), 신창(창왕)과 변안렬을 죽였다고 거짓으로 꾸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이행의 사초를 본 태조는 이 사초가 거짓임을 구구절절 변명하고 있다.
“나(태조)는 처음부터 살해할 마음이 없었는데…. 백관과 백성들이 합심해서 목베기를 청했기 때문에…. 변안렬도 대관들과 중서문하성에서 죄주기를 청했기 때문에….”
이 대목에서 <태조실록>은 묘한 기록을 던진다.
“공민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신돈의 간사한 계책에 의혹되어 신돈의 아들 우(禑)를 궁녀 한씨가 낳았다고 일컫고, 나이 9살 때 강녕대군으로 책봉됐다가 후에 군주로 삼았다.”
그러니까 우왕과 그의 아들 창은 요승 신돈의 자손이라는 내용을 은근슬쩍 사실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국왕을 2명이나 시해한 역적으로 남을 수도 있었기에 태조 이성계로서는 모골이 송연했던 것이다. 이 때 태조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던지 이후 ‘사초’를 보고 싶은 끓어오르는 욕망을 참지 못했다. 1398년(태조 7년) 윤5월1일에는 “왕위에 오른 때부터 이후의 사초를 모조리 바치라”면서 “왕이 사초를 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졌다. 승지 이문화가 간언했다.
“만약 군주가 스스로 보게 되면 사관이 숨기고 꺼려서 사실대로 바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나라 태종도 역사를 본 일이 있지 않느냐. 임금이 본다는데 신하된 자가 거역한다면 어찌 신하의 의리일꼬? 당장 사고(史庫)를 열어 모조리 사초를 바치라.”(태조)
■“사초를 모조리 거둬 바쳐라”
그로부터 40여 일이 지난 6월12일, 조준 등이 태조의 즉위년(1392년) 이후 모든 사초를 거둬 태조에게 바치려 했다. 그러자 사관 신개가 나섰다.
“당나라 태종이 명재상 방현령의 반대에도 <실록>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편찬된 <실록>을 황제에게 순서대로 올렸나이다. 그런데 <실록>의 내용이 은근히 숨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태종도 성군이라 바른대로 쓰기를 원했을 것인데도 명철한 재상인 방현령은 사실을 숨기고 바른대로 쓰지 못했던 것입니다.”
신개의 직언이 계속된다.
“모범이 돼야 할 창업군주가 당대의 역사를 열람하시면 대를 이은 임금이 그것을 구실삼아 ‘우리 선왕도 그랬는데…’ 하면서 사초를 보고 고치는 일이 습관화 할 것입니다. 어느 사관이 붓을 잡겠습니까.”
그렇지만 태조는 ‘이행의 사초’를 들며 완강하게 반응했다.
“내가 왕위에 오를 때 임금과 신하가 몰래 한 이야기를 어찌 사관이 안다는 말인가. 이행의 기록도 잘못되지 않았느냐. 고려 공민왕 이후 이미 편수한 역사와 즉위년 이후의 사초는 모조리 가려내어 바치라.”
그러고 보면 연산군은 순진하다 할 수 있다. 폭군이라는 오명 때문에 십자포화를 맞은 것은 아닐까. 연산군은 그래도 이극돈 등 사관들의 반대에 ‘발췌본’ 일부를 보는 것으로 그쳤다.
그렇다면 사초를 모조리 열람하고 전체적으로 역사를 뜯어고친 태조 이성계와 임금에게 ‘문제의’ 사초를 보여주고, 심지어는 모든 사초를 바친 조준의 죄는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
그래도 연산군에게는 ‘역사를 두려워 한’ 일가닥 양심은 남아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초를 불태운 영조
또 망측스런 일이 있었다. 영조가 사초를 불태운 사건이 그것이다. 1735년(영조 11년) 2월10일의 일이었다.
새벽까지 영조는 대신들과 함께 과거의 일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선왕이자 이복형인 경종을 둘러싼 독살설과 끊임없이 제기되는 연루설, 그리고 계속되는 노·소론의 당쟁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격정을 토로했다.
“당시에 유언비어가 있지 않았느냐. 연잉군(세자 시절의 영조)이 정궁을 박대하고 주색에 빠져 있는데 만약 그를 책립하면 반드시 ‘기사년의 일’(1689년의 기사환국 때 장희빈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유언비어 말이다.”
신하들이 “어찌 귀로 차마 듣지 못할 말씀을 하시느냐”고 하자 “경들도 알고 나도, 모든 사람도 아는 말을 왜 못하냐”고 반박했다. 이 때 호조판서 이정제가 나서 “도저히 역사에 쓸 수 없는 망측한 하교”라면서 “사초의 책자를 불태우자”고 제안했다. 새벽 3시가 넘어 신하들이 물러간 뒤 사초의 책자를 가져와 추려내어 임금의 명령으로 모두 불태워버렸다. 진시황의 ‘분서’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임금과 신하의 심야대화는 여러 가지 억측을 낳았다. 참석한 신하들은 “내전(중전)까지 언급된 대화의 깊은 뜻이 무엇이냐”고 설왕설래하며 두려워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사초가 이미 불태워졌기 때문에 여러 설만 떠돌 뿐이었다. 훗날 사관들은 당시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서 들은 말을 참고해서 추후에 사초를 기록했다.
■“차마 들을 수 없는 말…. 사관은 쓰지 마라”
영조의 역사 누락과 왜곡은 그 뿐이 아니다.
1733년(영조 9년) 1월19일, 영조는 노론의 영수 민진원과 소론의 영수 이광좌를 밤중에 불렀다. 영조는 좌우의 측근들을 모두 물리고, 주서(注書·승정원 일기 기록자)에게는 “기록하지 마라”고 지시한다.
다만 사관에게만 “사실을 기록하라”고 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남인 등의 끊임없는 당쟁을 비판했다. 영조 스스로도 그 당쟁의 와중에서 견딜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또한 경종의 독살설에 동생인 자신이 연루되는 불상사가 있었음을 눈물을 흘리며 한탄했다.
“만약 황형(경종)이 후사가 있었으면 난 본래의 뜻을 굳게 지키면서 분수대로 산야에서 살았으리라. 그것이 지극한 소원이었다. 그럼에도 경종의 지극하신 우애를 입었다. 아! 당론이 나를 모함하고 당론이 나를 해쳤다.”
그러면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재능있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뿐”이라면서 오른손으로 이광좌의 손을, 왼손으로는 민진원의 손을 잡고 머물러 달라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양측의 영수를 불러 탕평책의 필요성을 역설한 유명한 ‘1월19일의 하교’이다. 이튿날 임금은 어젯밤의 하교내용을 손수 한 통 써서 사관에게 주어 “역사편찬에 참고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전날 밤 입시하며 사실을 기록했던 사관 김한철은 그 글을 되돌려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가 손수 써주신 글을 받고 물러나와 신이 쓴 사초와 고증해보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습니다. 군주가 글을 써서 사관에게 주어 역사편수를 지휘하면 아마도 후일의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임금 역시 “그 말이 옳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쓰면서 <영조실록>의 기자는 매섭게 영조를 질타한다.
“야밤에 두 사람을 불러놓고 다른 의견을 억지로 합쳐서 탕평을 단단히 이루려는 뜻이었으니 옳고 그른 것이 뒤섞이고~임금의 위엄만 먹혀들지 않았다.”
영조는 1725년 자신의 어가를 막고 ‘반임금’ 구호를 외친 군사 이천해의 발언을 “사초에서 지우라”고 명하기도 했다.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 없구나.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마라.”
■실록을 보고싶어 안달 난 세종
사초를 보려는 임금들의 욕망은 끝이 없었다. 심지어는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도 그랬다. 할아버지(태조)와 아버지(태종)가 골육상쟁을 겪은 끝에 세운 조선왕조였으니 그 역사가 어땠는지 궁금도 했을 것이다. 세종은 편찬을 끝낸 <태조실록>을 보려고 꼼수를 쓴다.(1425년)
“<태조실록>은 한 책만 있으니 나중에 잃어버리면 큰일이 아닌가. 한 책을 더 베껴서 춘추관에 납본하고 한 책은 내가 항상 볼 수 있도록 하라.”
그러나 그 속셈을 모를 리 없었던 변계량이 득달같이 나서 일축한다.
“<태조실록>에는 비밀로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복사해서 여러 사람이 보게 하면 안됩니다. 좋은 날을 받아서 사고에 넣게 하소서.”
<실록>을 보려는 세종의 욕심은 계속됐다. 1438년, 세종은 “<태종실록>을 좀 봐야겠다”고 운을 땠다. 그러자 황희와 신개 등이 얼굴색을 바꿨다.(1438년)
“안됩니다. 역사서를 보면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게 됩니다. 사관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면 여러 신하들은 임금의 뜻에만 따르게 됩니다. 그럴 경우 천년 뒤에는 무엇을 믿겠습니까.”
세종 뿐인가. 성종도 <실록> 좀 보려 했다가 “그러면 역사를 사실대로 직서하지 못하고 선악이 없어진다”는 우승지 손순효의 일갈에 포기하고 말았다.(1477년)
■“기록하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한 사관
사초를 둘러싼 심리전은 대단했다.
예컨대 태종은 밤낮으로 따라붙으며 기록하는 사관을 어지간히 싫어했다.
1401년(태종 1년) 태종은 “내가 편안히 쉬어야 하는 편전에 사관은 들어오지 마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러자 사관 민언생은 “무슨 소리냐”고 일축하면서 직언했다.
“신이 만일 곧게 기록하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臣如不直 上有皇天)”
이 말은 “하늘이 지켜보고 있으니 곧게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태종은 꼼짝도 못했다. 그 후 3년 뒤 태종은 노루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다. 경상을 입은 정도였지만 일어서면서 한다는 소리가….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勿令史官知之)”(<태종실록>)
참으로 대단한 사관이다. “기록하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했으니 말이다.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각설하고, 영조가 사초를 불태운 뒤 3일이 지난 1735년 2월13일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듯 전직 사관인 이덕중과 정이검이 “사필(史筆)에 관련된 일이라 나설 수밖에 없다”며 상소를 올린다.
“성상께서는 일전에 사초를 불태운 일을 허락하시고, 좌우 사관들은 두 손 잡고 바라만 보았다지요. 아! 옛날엔 사관이 된 자는 ‘목이 달아나는 한이 있어도 사필은 굽힐 수 없다.(頭可斷 筆不可斷)’는 말이 있습니다. 장차 무궁한 폐단을 열게 될 것입니다.”
영조는 그때서야 “이미 불탄 사초를 어찌 추후에 기록하겠느냐”고 후회했다.
하지만 끝내 책임만큼은 신하들에게 돌렸다. <영조실록>의 기자가 분명히 밝혔다.
“임금도 또한 뉘우치고 ‘사초를 불태운 것은 내가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다'라는 하교를 여러 차례 내렸다." 맥 빠진 변명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누구의 나라였다는 말인가. 경향신문 문화체육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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