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의 역사

선덕여왕이 '신이 노니는 신유림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그곳은?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산으로는 토함산(해발 745m)과 남산(468m)이 먼저 떠오른다. 
토함산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안고 있는 산이니 말할 것도 없다. 남산은 어떨까. 남산은 석가모니 부처가 하강해서 머무는 ‘영산(靈山)’으로 알려져왔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개의 계곡과 산줄기에 150여 곳의 절터, 120여 구의 석불, 100여 기의 석탑이 산재해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하다.

■남산의 오자가 아니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9월15일까지 ‘낭산, 도리천 가는 길’ 특별전을 열고 있다. 특별전에는 낭산의 주변인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나온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좌상’과 ‘금제여래입상’ 등 국보 2점을 포함해 총 389점이 전시되고 있다.
특별전 제목을 보고 ‘잠깐!’을 외치는 이들이 있을 것 같다. 
“낭산이라니…. 혹시 ‘남산’의 오자(誤字)가 아니냐?”하면서….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오자가 아니다. 
‘이리 낭(狼)’자를 쓴 ‘낭산(狼山)’이 맞다. 그렇다 해도 산이름에 포악하고 사납다는 짐승 이름(이리)를 쓰는 산이라면 오죽하겠냐는 분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리가 엎드린 형상이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는 “동쪽의 큰 별을 ‘랑(狼)’이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왕궁(월성)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낭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다. ‘남산’의 오자가 아닌 ‘낭산’은 분명 경주 시내에 있는 해발 100m 가량의 산이다. 그런데 이 야트막한 구릉이 얼마나 풍부한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드물다. 

413년(실성왕 12) 낭산에서 향기가 나는 구름이 가득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실성왕(402~417)이 “지금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놀고 있다. 복 받은 땅이 분명하다”고 해석했다. 이때부터 낭산은 ‘신들이 노니는 숲’이라 해서 ‘신유림(神遊林)’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후 선덕여왕(632~647)은 생전에 죽음을 예언하면서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를 지내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군신들이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바로 낭산의 남쪽”라 지목했다. 선덕여왕이 승하하자 군신들은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 지냈다.

■신들이 노는 숲, 신유림
<삼국사기> ‘신라본기·실성왕’조를 보자.
“413년(실성왕 12) 8월에 낭산에서 구름이 일어났다. 형상이 누각 같았고 향기가 가득 퍼졌다. 실성왕(402~417)이 ‘지금 신선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놀고 있다(仙靈降遊). 복 받은 땅이 분명하다’고 해석했다. 그때부터 낭산에서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했다.”
훗날(7세기 말)의 고승 명랑법사는 ‘신들이 노니는 숲’이라 해서 낭산의 남쪽을 ‘신유림(神遊林)’이라 표현했다.
낭산의 두번째 스토리는 선덕여왕(632~647)이 이어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생전에 문득 여러 신하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다.
“짐(선덕여왕)은 모년 모 월 일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에 장사를 지내도록 하여라.”

아직 쌩쌩한 왕의 뜬금없이 예언에 신하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했다. 군신들은 “폐하가 말씀하시는 도리천이 어디냐”고 묻자 선덕여왕은 “바로 낭산의 남쪽”라 지목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왕이 지목한 날(647년 1월8일)에 정말로 승하하자 군신들은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 지냈다. 
낭산의 세번째 이야기는 당나라 유학파 고승인 의상대사(625~702) 이야기다. 의상대사는 29살의 나이에 낭산 인근에 세운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의상전교’조는 “의상이 황복사에서 무리와 함께 탑을 돌았는데, 층계에서도 매번 세 자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의상대사는 무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니 가르쳐주지는 마라’고 신신당부했다.

낭산은 월성의 동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인들은 이 산을 정신적인 지주로 여겼다. 애초에는 신선이 노니는 숲이라는 뜻에서 ‘신유림’이라 하며 신성시했고, 선덕여왕 이후에는 불교의 수미산·도리천(낭산), 사천왕천(사천왕사) 등으로 상징화했다.

■문두루비법으로 당나라군 격퇴
신비로운 이야기의 끝판왕은 낭산 아래의 사찰인 사천왕사와 망덕사의 창건 비화일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나라 연합은 당나라의 한반도 경영 야욕 때문에 깨지고 만다. 670년(문무왕 10) 당나라가 5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신라 조정에 전달된다. 조정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렸고, 난국을 타개할 인물로 ‘명랑법사’가 소환된다.(<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 궁한 김에 불법에 기댈 요량으로 고승을 모신 것이다.

“방법 좀 찾아보라”는 문무왕의 다급한 요청에 명랑법사가 비책을 낸다.
“낭산 남쪽에 신유림(신이 뛰노는 숲)이 있사온데 그곳에 사천왕사를 세웠으면 합니다.”
하지만 절을 세울 시간이 없었다. 당나라 군사들이 국경에 도달했다는 것이었다. 문무왕이 발을 동동 구르자 명랑법사가 “우선 채색비단으로 절을 임시로 만들고, 풀(草)로 오방시상(五方神像)을 제작하자”고 궁여지책을 낸다.
그런 뒤 명랑법사는 밀교의 고승 12명과 함께 이른바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썼다.(<삼국유사>) 
“(문두루 비법을 쓰자 싸우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전함들이 모두 침몰했다. 그후 절을 고쳐 짓고(679년) 이름을 사천왕사라 했다.”

이듬해(671년) 당나라 5만 대군이 재차 쳐들어왔을 때도 신라는 또 한번 같은 문두루 비법으로 당군을 모두 물리쳤다.
‘문두루 비법’은 ‘관정경’(밀교 경전)에 나오는 주술이다.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둥근 나무에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써놓은 문두루를 설치한 뒤 주문을 외우면 모든 악이 물러난다는 것이다. <관정경>에 따르면 문두루형(形)은 금은보화와 전단목(향나무) 등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명랑법사는 화급한 상황에서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당나라군을 두번이나 격퇴시켰다는 것이다. 사천왕사와 나란히 선 망덕사(사적)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즉 두 번이나 참패한 당나라 고종(649~683)이 마침 당나라에 와있던 신라인 박문준에게 “무슨 비법이 있기에 당나라군 중 살아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답변이 궁해진 박문준은 “신라가 상국(당나라)의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사천왕사를 새로 짓고, 황제의 만수무강을 위해 법석(法席)을 열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크게 기뻐한 당 고종은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로 보내, “그럼 가서 사천왕사를 살펴보고 오라”는 명을 내린다.
신라 조정엔 다시 비상이 걸린다. 당나라가 ‘사천왕사와 문두루 비법’을 안다면 보복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번의 궁여지책이 나왔다. 사천왕사 남쪽에 가짜로 절을 짓고는 사신을 기다렸다. 
이윽고 신라를 방문한 악붕귀가 “황제를 축수한다는 천왕사에 분향하겠다”고 운을 떼자 신라 측은 새롭게 지은 가짜 절로 사신을 인도했다. 하지만 악붕귀는 이 절이 당나라를 속이기 위한 ‘짝퉁’임을 간파하고는 문전에서 버텼다.
“이것은 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군요.”
신라는 금 1000냥으로 악붕귀를 매수했다. 못 이기는 척하고 당나라로 되돌아간 악붕귀는 황제에게 “신라가 천왕사를 지어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했다. 

■방아타령과 제망매가, 도솔가
낭산과 그 인근에 등장한 인물의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자비왕 연간(458~479)의 인물로 짐작되는 백결선생이 바로 이 낭산 아래 고을에 살았던 거문고 명인이다. 
<삼국사기> ‘열전·백결선생’은 “워낙 가난해서 옷을 100번이나 잡아매어 메추라기를 매단 것 같았다”고 했다. 백결선생의 아내가 어느 해 연말 집집마다 곡식을 찧는 절구공이 소리에 “우리 집만 곡식이 없구나”하고 한탄했다. 그러자 백결 선생은 거문고를 연주해서 절구공이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했고 그것이 민요 ‘방아타령’으로 전승되었다.
신라 향가의 대표곡인 ‘제망매가’와 ‘도솔가’의 작자인 월명 스님(생몰년 미상)도 낭산 아래 사천왕사에서 살았다. 

<삼국유사> ‘월명사 도솔가’조는 “(790년 무렵) 월명 스님은 사천왕사 문 앞 큰 길에서 피리를 불면서 지나가면 하늘의 달 조차도 스님을 위해 멈췄다”고 했다. 신라인들은 월명 스님이 다니던 길을 ‘월명리’라 했다.
신라 말기의 대학자·문장가인 고운 최치원(857~?)의 흔적도 남아있다. <삼국유사> ‘혁거세왕’조는 “최치원의 옛 집이 (낭산 서북쪽 기슭) 미탄사 남쪽에 있다”고 했다. 그 집은 최치원이 어릴 적 수학했던 독서당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은 “최치원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이 뛰어난 아들을 12살 때 당나라로 유학 보내면서 ‘10년 안에 과거에 붙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고 전한다. 
천년 사직의 망조가 낭산 주변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삼국유사>는 “경명왕 때(918년 혹은 920년) 사천왕사의 소조상이 잡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犬)가 짖었으며,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고 기록했다. 

■세 여신의 도움으로 목숨 구한 김유신 
궁금증이 생긴다. 해발 100m 남짓한 낭산에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기에 이토록 풍부한 이야기를 간직하게 되었을까.
낭산은 <삼국사기> ‘실성왕’조의 413년 기사처럼 예부터 신라인들이 ‘신선이 노니는 곳’, 즉 신유림으로 신성시했던 곳이다. <삼국사기> ‘잡지·제사’지는 신라에서 가장 큰 제사인 대사(大祀)를 지내는 3산(三山)으로 ‘나력(奈歷), 골화(骨火), 혈례(穴禮)’를 꼽았다.

학계에서는 신라의 ‘3산’ 가운데 유일하게 왕경(경주)에 속한 ‘나력’을 ‘낭산’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김유신’조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김유신(595~673)이 18살 때 고구려 첩자(백석)의 꾐에 빠져 곧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나림(나력 즉 낭산)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신인 세 낭자가 찾아와 구해주었다”는 것이다. 가까스로 위기에서 탈출한 김유신이 곧 제사를 올리니 삼산의 여신 3명이 기꺼이 제삿상을 받았다. 이렇듯 낭산은 국가 수호신, 그것도 여신의 거주처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과 김선덕
그래서일까. 이곳에 역사시대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무덤이 자리잡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보통 ‘××왕’, ‘△△여왕’ 같은 호칭은 사후에 붙여주는 시호인데, 선덕여왕은 재위 시절부터 ‘선덕(善德)’이라는 이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신라 김선덕을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김선덕은 김진평(진평왕)의 딸로서 즉위했다”(<책부원구>), “신라왕 김선덕이 죽었다”(<구당서>)는 중국측 사서 기록이 이를 시사한다.
‘선덕’은 불교 색채가 강한 이름이다. 5세기 초 인도 출신의 학승 담무참(385~433)이 번역한 <대방등무상경>에 등장하는 ‘선덕바라문’에서 유래했다. ‘선덕바라문’은 석가모니로부터 불법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교화시킨다는 전륜성왕의 운명을 예지받는 인물이다. 또 ‘선덕바라문’은 도리천의 왕이 되기를 바란 인물이기도 하다.
선덕여왕이 왜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는지 이해가 간다. 여왕이 말한 ‘도리천’이 어디인지 모르는 군신들에게 선덕여왕은 “그곳이 바로 낭산의 남쪽”이라고 콕 찍어 주었다.

그런데 불경에 따르면 세계의 중심에 수미산이 자리잡고 있고, 그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선이 노니는 숲’, 즉 ‘신유림’이었던 낭산은 선덕여왕 시대에 들면서 불교의 ‘도리천’과 ‘수미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왜 선덕여왕은 그렇게 불교에 심취했을까. 
여성의 몸으로 온갖 논란 끝에 즉위한 선덕여왕은 극심한 외우내환을 겪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 의자왕(641~660)의 끈질긴 공세에 대야성(합천) 등 40여개 성을 잃었다. 선덕여왕은 막 귀국한 자장법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웠다.(645년) 불법에 기대어 위기를 타개하려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 않았다.
647년(선덕여왕 16) 1월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자 임금(여주·女主)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선덕여왕은 이 반란의 와중에 승하하고 말았다.(647년 1월8일) 이렇듯 선덕여왕은 재위 시절 내내 외우내환의 종식을 위해 안간힘을 썼던 임금이다. 그런 선덕여왕이었기에 생전에 “내가 죽은 뒤에도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의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이 되어 종묘사직을 돌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을 것이다.

■부릅뜬 눈으로 나라 지킨다 
그런 낭산이 삼국통일 후 문무왕의 시대에 신라 호국의 중심지로 완전히 자리를 굳히게 된다.
낭산 아래 쪽에 사천왕사를 세워 당나라의 대대적인 침공(670~671년)을 두차례나 막아낸 것이다. 결국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면서 한반도 경영의 야욕을 접어야 했다. 물론 당시 명랑법사가 썼다는 ‘문두루 비법’이 정말로 효과를 얻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당나라 대군을 실은 군선이 갑자기 불어닥친 풍랑에 침몰하는 사태가 벌어져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승리를 거머쥐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다. 문두루 비법 덕분이든 아니든 신라인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나라군의 침공 때 임시로 조성한 사천왕사는 679년 제대로 모습을 갖춘 정식 사찰로 창건된다.

절 이름을 굳이 ‘사천왕사’라 한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불교에서 인간계와 천계를 연결하는 우주의 축이 수미산이고, 그 수미산의 꼭대기에는 도리천이 있다. 그곳에는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이 살고 있다. 그리고 수미산의 중턱에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이 자리잡고 있다. 
낭산은 ‘신선이 노니는 신유림’이었다가 선덕여왕~문무왕 시대를 거치면서 도리천(선덕여왕)과 사천왕천(사천왕사·문무왕)을 갖춘 불교의 수미산으로 상징구조가 바뀌었다.

그러나 낭산을 찾는 이들의 믿음은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였을 것이다. 
어떤 경우는 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또 어떤 경우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낭산을 사방에서 지켜주는 여러 절터에서 확인되는 무시무시한 신장상들을 보라. 무력으로 적을 항복시키며 불법과 불국토를 지키는 금강역사, 사천왕상, 팔부중상, 십이지상 등은 신라의 종묘사직을 지키는 호국불교의 상징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약사여래상 옆에 숨겨놓은 갓난아기
그러나 낭산이 그런 거창한 의미만 담고 있겠는가. 기근과 질병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힘겨워했던 이름없는 백성들 역시 찾아와 마음의 안식을 찾고 치유하려 했던 곳 역시 낭산이었다. 
낭산의 중생사 근방에서 발견된 십일면 관음보살상과 약사여래상이 그 실마리를 던져준다. 그들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관세음 보살’을 염불했을 것이다. 또한 중생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상 앞에서 간절히 기도했을 것이다. ‘시무 28조’로 유명한 고려초 유학자·문신인 최승로(927~989)의 탄생 설화가 이 중생사 관음보살상에 담겨있다.
신라 말 최은함이라는 인물은 아들을 얻지 못해 중생사의 관음보살 앞에서 열심히 기도해 아들을 낳았다. 927년(신라 경애왕 4) 후백제군이 쳐들어오자 최은함은 갓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관음보살상 옆에 감추어 두었다. 

적병이 물러간 후 보름이 지나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습도 어여쁘고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 남아있었다. 이 갓난 아기가 훗날 신생국 고려의 기틀을 잡는데 큰 공을 세운 최승로다.(<삼국유사> ‘탑상’)
방학을 맞아 ‘낭산’ 특별전을 준비한 이현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언급이 그럴 듯 하다.
“만약 신라인들이 코로나 19와 같은 기막힌 질병에 신음했다면 어찌 했을까요. 지칠 때로 지친 몸과 마음의 아픔을 달래주고 위로받을 수 있는 낭산을 찾지 않았을까요.”
경주 여행하면 대릉원이나 첨성대, 동궁과 월지, 불국사, 석굴암 등을 우선 떠올릴 테지만 어떤가.
이번 방학에는 신들의 놀이터이자 선덕여왕과 문무왕의 나라사랑, 그리고 신라 백성들의 애환이 담긴 낭산을 찾아봄이….
가는 김에 백결 선생의 거문고 방아타령과, 충담사의 피리 반주에 부르는 제망매가, 도솔가의 노래소리를 음미해보고….
(이 기사를 위해 이현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