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절에 정원석이 서있는데 거기서 글자가 보입니다. 한번 봐주시면….”
지난 5월20일 박홍국 위덕대 연구교수는 지인(김은하 전 선덕여중 교사)을 통해 경주 남산사 선오 스님의 전화를 받았다. “사찰 정원석에서 ‘김(金)’ 등의 글씨가 보이는데, 이것이 어떤 명문 비석인지, 어느 시대 것인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발품 파는 일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박교수는 마침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전화를 받은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일단 선오 스님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18년 전 쯤 절의 조경을 위해 나무를 심으려고 땅을 팠을 때 한 2m 밑에서 나온 돌을 정원석으로 썼다”는 것이었다.
“근자에 어느 불자님이 천리향이라는 나무를 심으려고 이 정원석을 비켜놓았는데, 그 돌에 ‘김(金)’을 비롯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게된 겁니다.”(선오 스님)
향이 1000리 간다고 심은 천리향에서 ‘1000년 전의 향기’가 되살아난 것일까.
■‘공순 아찬’의 출현
불과 20여 분 만에 현장에 도착한 박교수가 비석의 탁본을 뜨자 놀라운 글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1행부터 ‘공순아찬신도지비(恭順阿飡神道之碑)’라는 구절이 제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비석의 머리(이수)가 비바람을 보호했을 윗부분의 글자들은 매우 선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이때 박 교수의 뇌리를 스치는 유물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1963년 두차례에 걸쳐 절터(일제강점기)와 민가(1963년) 등 남산리 부근에서 수습된 비석, 이른바 ‘~찬지비(飡之碑)’의 조각편 3점(이수 1점과 비편 2점)이었다.
“이번에 발견된 비석과 예전에 수습된 비석 조각이 한 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석의 재질도 연한 적갈색의 화강암으로 같았습니다.”(박홍국 교수)
‘아찬’은 신라 17관등 중에 6등에 해당된다. 진골의 관등이지만 동시에 6두품이 받을 수 있는 최고위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찰의 정원석으로 쓰인 이 돌은 신라 때 세워진 고비(古碑)가 분명했다.
확인된 비석의 크기는 가로 21~30㎝, 세로 56.5㎝, 두께 25.6㎝ 정도였다.
박 교수는 이영호 경북대 교수(사학과),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연구원 기획처장, 이채경 전 경주시 문화재과장 등과 한 자 한 자 해석해나갔다. 기존의 이수(비석 머리) 조각에 남은 ‘~찬지비’와 비교해본 박관장은 무릎을 쳤다.
기존 이수에 남아있는 ‘~찬지비(飡之碑)’ 명문은 비석의 제목이었다. ‘○찬의 비’라는 뜻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것이 ‘이찬(2등)’인지 ‘잡찬(3등)’인지 ‘아찬(6등)’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비석의 본문 첫머리에서 ‘공순아찬공 신도지비(恭順阿飡公 神道之碑)’를 읽었으니 비석의 주인공이 확실하게 밝혀진 셈이다.
즉 신분이 ‘아찬(6등)’인 ‘공순’이라는 인물의 비석이라는 것이다. 또 비석의 성격도 무덤에 세우는 능비나 묘비가 아니라 ‘신도비’(왕 혹은 고관대작의 무덤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는 조선조 태조(1392~1398)의 건원릉 앞에 서 있는 신도비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렇다면 이 ‘공순아찬비’는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신도비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신도비는 국법에 따라 3품 이상의 고위관리(조선에서는 2품 이상) 무덤 앞에만 세울 수 있었다.
그럼 진골일 수도 있고, 6두품 가운데 최고위직으로 출세한 인물일 수도 있는 ‘공순’ 아찬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누구였기에 고위직의 전유물이었던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을까.
박 교수는 한 자 한 자 판독해나가면서 그 비밀의 열쇠를 풀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공순아찬비’에서는 보이는 글자 95자 가운데 88자 정도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였다.
비석의 이수가 오랫동안 수직~20도 각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아주었기 때문이었다.
■“난 태종무열왕의 후손입니다.”
한 자 한 자 해독해가던 박 교수는 신도비문의 내용에 빠져들었다.
“‘공순아찬공’은 ‘신라국의 김(金)씨’다…태종대왕(무열왕)의 후손(혹은 손자)다. ‘우리(我) 김씨는 소호(少昊)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공순아찬비문)
신도비는 주인공인 ‘공순’ 아찬의 성이 ‘신라국 김씨’임을 밝히면서 태종무열왕(654~661)의 후손이라고 소개했다.
박 교수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예전에 ‘~찬지비’로만 알려진 이 ‘공순아찬비’의 이수(비석 머리)가 왜 태종무열왕릉비의 이수를 쏙 빼닮았는지를 이제서야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바로 태종무열왕의 후손이기에 선조의 신도비를 축소모방한 이수를 조성했던 것이다. 태종무열왕이 후손이라면 누구일까.
비문 중에 등장하는 ‘천령군(天嶺郡)’이 명문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삼국사기> ‘잡지·지리지’는 “천령군은 옛 속함군인데 경덕왕(742~765)이 이름을 고쳤다”고 했다. 학계에서는 그 연도를 757년이라 특정한다.
이 신도비가 최소한 경덕왕 재위시절인 757년 이후에 세워졌다는 얘기다.
다만 서기 800년 이후의 비석에서는 태종무열왕릉비-공순아찬비 계열의 이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 공순아찬비는 넓게 잡아 757~8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는게 박교수의 견해이다.
■“김씨의 조상은 소호금천입니다”
뒤이어 등장한 ‘소호(少昊)’ 명문 또한 예사롭지 않다. ‘소호’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을 지칭한다.
그런데 ‘소호’가 여기서만 나오는게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말미에 편찬자인 김부식(1075~1151)이 붙인 평론에 “신라인들은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 성을 ‘김씨’라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삼국사기> ‘김유신조’도 “신라인들은 ‘소호의 자손’이라고 했고, 김유신(595~673)의 비문도 ‘우리 가문은 소호의 자손’이라 했다”고 기록했다.
신라 왕실 뿐 아니라 금관가야의 후예인 김유신까지도 가문의 뿌리를 ‘소호금천씨에서 찾고 있었다는 얘기다.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시 궈자탄(郭家灘) 마을에서 발견된 비석 역시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864년 5월29일 향년 32살로 사망한 재당 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大唐故金氏夫人)’의 묘지명이었다.
“태상 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냈다. 이름하여 ‘소호씨금천’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이시다…”
‘신라 김씨=소호금천씨의 후예’라는 인식이 당대에 뿌리깊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소호금천’은 누구인가.
중국신화에서 새를 숭상한 동이족의 수령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은 “동쪽(오른쪽) 바다 밖의 큰 산골짜기에 소호의 나라가 있다”고 했다. 이 소호의 나라에서는 온갖 새들이 각각의 나랏일을 나눠 맡았다고 한다.
그 때문일까. 동이족의 후예로 알려진 상(은)나라는 물론 고구려·신라·가야 등의 건국사가 두 새와 관련된 난생설화로 시작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번에 발견된 ‘소호’ 명문은 당대 신라 김씨들의 강고한 뿌리 의식을 재확인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김씨의 조상=동이족의 수령인 소호금천씨’라는 관념이 깊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대 약관에 태수가 된 덕장
‘공순아찬비’의 명문을 더 살펴보자.
“(김씨 가문에서) 충신과 의사가 잇달아 발자취를 남겼으며, 조정에서는 무부(武夫)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덕장이었고…백성들의 어려움을 (돌보았으며) 지금까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자고, 허리띠를 풀고 편히 쉴 수 있었던 것은(~~ 때문이다)…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고, 법(法)이 아니면 보지 않았으며, 게다가…거동이 빼어나….”
즉 ‘김공순’은 다른 무장(武夫)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덕장(德將)이라고 했다. 조정에서도 신뢰를 얻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존경을 받던 무장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공순) 공은 약관(20~29세)의 나이에 천령군(함양)의 (태수를) 제수받았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얼마나 능력을 갖춘 장수였기에 20대의 나이에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태수 자리에 올랐을까.
고려-조선조에서도 2품 혹은 3품 이상의 고위직에게만 허용되는 신도비가 아닌가. 그런 신도비를 아찬, 즉 6등의 신분에게 내려주었다면 김공순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고, 얼마나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국사기> 등 어떤 사서에서도 ‘김공순’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연유일까.
박홍국 교수는 한가지 예를 든다. <삼국유사>에 석굴암과 불국사를 창건한 인물로 등장하는 이가 김대성(?~774)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재상(大宰相), 즉 상대등이나 각간 같은 최고관직에 오른 김대성의 이름이 어쩐 일인지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단 한줄도 보이지 않는다.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국책사업을 책임진 인물인데도….
그 때문일까. 745년(경덕왕 4) 중시(집사부 장관직)에 오른 ‘김대정’을 ‘김대성’과 동일인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대정의 ‘정(正)’자가 ‘성(城)’과 통한다는 것이다. 그럼 약관의 나이인 20대에 천령군 태수를 지냈고, 고위직만 허용되는 신도비를 세울 정도였던 ‘김공순’ 역시 <삼국사기>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지 않을까. 그걸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김생의 글씨를 모아 새긴 비석일까
‘공순아찬비’와 관련해서 또하나의 궁금증이 생긴다. 비문의 글씨는 과연 누가 썼을까.
박 교수는 이번에 발견한 ‘공순아찬비문=천재서예가 김생의 진적’ 임을 논증한 논문(‘새로 발견된 신라 공순아찬 비편의 조사와 비문 서자·書者’)을 30일 발행하는 학술지(<영남학> 제81호)에 발표한다.
논문에 따르면 이 ‘공순아찬비문’에는 왕희지(307~365)의 ‘집자성교서’는 물론이고, 김생(711~?)의 ‘낭공대사비’ 등과 비슷한 글자들이 더러 보인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왕희지와 김생의 생전 글씨를 모아서 후대에 다시 새긴 ‘집자비’이다.
두 사람이 직접 비석에 쓴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이번에 발견된 ‘공순아찬비’ 역시 왕희지나 김생의 글씨를 모아 새긴 이른바 ‘집자비’가 아닐까.
그러나 박교수는 고개를 내젓는다. 앞서 밝혔듯이 ‘집자비’는 명필의 사후에 그의 글씨를 모아서 새기는 비석이다.
그러나 명필의 글씨를 모으는 ‘집자’는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우선 지금과 같은 복사기가 없었으므로 비문의 경우는 모두 탁본을 해야 했고, 종이나 천에 있는 글자는 하나하나 베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사용하고자 하는 글씨보다 크거나 작을 때는 그 크기에 맞추어 축소 또는 확대시켜야 한다. 그 작업의 수고로움은 필설로 다하기 힘들다.
더구나 모은 글자 중에서 정작 필요한 글자가 없을 때는 여러 글자의 획을 모아서 조합해야 한다.
‘낭공대사비’(경북 봉화)의 예를 보자. 이 비석은 김생의 글씨 3180자를 한자 한자 집자(集字·문헌에 있는 글자를 찾아서 모음)해서 새긴 비석으로 유명하다. 916년(신라 신덕왕 5) 낭공대사가 입적하자 1년 뒤(917년) 경명왕(917~924)이 당대의 명문장가인 최인연(868~944)에게 김생의 집자비를 짓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고도 지지부진했던 비문 작업은 고려 4대 광종 때(954년)가 되어서야 완성됐다. 무려 37년만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 발견된 ‘공순아찬비’는 어떨까. 아무리 공적을 세운 인물이라도 ‘해동의 서성(書聖)’이었던 김생의 글씨까지 집자하는 수고를 무릅쓰고 신도비를 세워주었을까. 그 정도는 아닐 것이라는 게 박교수의 견해이다.
또 한가지 생각해볼 포인트가 있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용케 집자비를 완성했다고 치자.
아무래도 친필 비명보다는 못한 점이 눈에 띄기 마련이다. 우선 집자과정에서 원래 글씨의 모양을 잃을 수 있다.
또 탁본된 글씨를 베끼면 아무래도 획이 굵어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다시 새겨진 비명의 줄(行)도 부자연스럽고, 전체 균형도 잃을 수 있다. 더러는 글씨를 쓴 이의 의도(필의·筆意)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결과가 초래된다. 원래 힘이 느껴져야 할 획이 마냥 단정해 보이거나, 거친 획이 예쁘게 변해버린 글자도 있게 된다.
박홍국 교수는 “그런 예를 김생의 집자비인 ‘낭공대사비’와 왕희지의 집자비를 다시 글씨로 옮긴 ‘집자성교서’ 등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주장했다.
또 한가지, 국내에서 과거 인물의 글씨를 모아 새긴 집자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흥법사 진공대사탑비(940년·당 태종)와 낭공대사비(954년·김생)라 할 수 있다. ‘공순아찬비’가 새겨진 8세기 후반기에는 집자비를 세운 흔적이 없다.
■“김생의 친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공순아찬비’는 누군가의 친필일 가능성이 짙고, 그 글씨를 쓴 이가 바로 김생이라는 것이 박교수의 주장이다.
우선 ‘공순아찬비’를 보면 ‘해서’(정자로 쓴 글씨)와 ‘행서’(약간 흘려쓴 서체), 심지어 ‘초서’(자획을 생략한 흘림 글씨)까지 능수능란하게 써제꼈다는 것을 꼽는다. “김생은 80살이 넘도록 붓을 잡았으며, 예서(해서에 가까운 글씨), 행서, 초서 등에 모두 능했다”는 <삼국사기> ‘김생 열전’의 기록을 뒷받침해준다.
또 김생의 글씨를 모은 ‘낭공대사비’의 글씨를 쏙 빼닮았지만 앞서 밝힌 집자비의 단점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게 박교수의 주장이다. 서예연구자인 손환일 서화문화연구소장의 견해도 일맥상통한다. ‘공순아찬비’(기왕에 찾아낸 비석 조각 3점 포함)의 글씨를 검토한 손환일 소장은 “이 비석 글씨를 쓴 이를 망설임없이 김생이라고 특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입’의 아래 가로 획을 생략한 ‘세(世)’가 그렇습니다. 또 하나의 비문에 다양한 서체로 쓴 ‘지(之)’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약의 차이가 심하고 변화무쌍하기 이를 데 없죠. 왕희지의 글씨에서 풍겨나오는 아름답기는 하나 다소 연약해 보이는 왕희지의 부족한 점을 보완한 김생의 결정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박홍국 교수는 “‘공순아찬비’를 탁본하는 순간부터 필력·해학·자유분방함이 빚어내는 기이한 품격에 압도됐다”고 밝혔다.
박교수는 그동안 발품을 팔아가며 새로운 금석문을 찾아내고, 그 중 김생의 친필임을 밝히는 논문을 여러차례 발표한 바 있다. 갈항사 석탑기(785~798년)와 무장사 아미타여래조상 사적비(798~800년 또는 801년), 청암사 수도암 신라비(808년), 창녕 탑금당 치성문기비(810년), 단속사 신행선사비(813년), 이차돈 순교비(817년 또는 818년) 등 5기의 비석이다.
■“김생의 친필일 리 없다”는 지레 짐작
이 대목에서 김생과 관련된 역사기록을 하나 소개해본다.
<삼국사기> ‘김생열전’의 내용인데, 특별히 고려시대 때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즉 숭녕(송나라 휘종의 연호·1102~1106) 연간에 송나라를 방문한 (고려) 학사 홍관(?~1126)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글씨를 송나라 관리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때 송나라 관리들은 “여기서 왕희지의 친필글씨를 보게 될 줄 몰랐다”고 크게 기뻐했다.
홍관은 손사래를 치며 “이것은 신라사람 김생의 작품”이라고 말했지만, 송나라 사람들은 “농담하지 말라”고 믿지 않았다.
“천하에 왕희지를 제외하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를 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홍관이 몇번씩이나 “김생 글씨가 맞다”고 했지만 송나라 문인들은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지금까지 김생의 작품은 ‘낭공대사비’(집자비)와 ‘전유암산가서’(탁본) 외에 ‘해동명적’(탁본) 등만 전해졌다. 박교수의 주장 전까지 친필 비석은 단 한 점도 거론되지 않았다.
과연 천고에 빛날 신필(神筆)이며 해동의 서성(書聖)인 김생의 작품이 전무하다는 얘기인가. 혹여 우리 스스로가 저 송나라 관리들처럼 “에이 김생 작품이 남아있을 리 없어”라고 고개를 내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든다. 또한가지 드는 의문점 하나. 어느 날 갑자기 현현한 인물 ‘김공순’, 그 분은 과연 누구일까.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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