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호리 일대의 도굴이 말도 못합니다. 심각합니다.”
1988년 1월 국립진주박물관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심상치않은 제보 한 건을 올린다.
급보를 받고 달려간 이는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전 문화재청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다.
과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현장이었다. 도굴꾼의 탐침봉 흔적이 사방팔방에서 확인됐다. 봉분이나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도 아닌 논밭이었는데도 그랬다. 실제 도굴이 자행된 구덩이가 논밭 일대에서만 40~50곳이나 보였다. 구릉 위까지 범위를 넓히면 100곳에 넘을 것으로 판단됐다. 한 곳 한 곳 확인해가던 조사단의 눈에 밟히는 도굴 구덩이가 있었다. 마을을 지나는 도로 남쪽에 붙어있는 논이었다.
■도굴범은 상상도 못했던…
깊이 1m 남짓한 구덩이에 도굴꾼이 채워놓은 볏짚단이 가득했다. 짚단 밑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볏단 걷어내고, 고인 물을 빼내자 토기편과 다양한 칠기, 철도끼 등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130㎝ 깊이에서 목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관 덮개의 일부가 도굴에 의해 절개되어 내부까지 훼손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굴은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도로 바로 옆에 있는 밭을 파헤치다보니 도굴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굴범들은 목관 내부의 유물을 다 걷어 내지 못한채 서둘러 볏단과 흙을 메워놓고 도주했던 것 같다.
도굴로 상당수 유물이 사라졌겠지만,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었다고 할까.
목관(길이 240㎝, 폭 85㎝, 높이 65㎝)은 반으로 자른 참나무를 파내 조성한 구유형이었다.
목관 내외부에서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무자루가 달린 철도끼와 따비, 옻칠을 한 각종 칠기(편), 노끈, 판 모양 쇠도끼 등이 보였다. 특히 무덤 구덩이 바닥에 놓여진 제기 속에는 무언가 눌어붙어 있었다. 분석해보니 그것은 감(枾·3점)이었다. 목관 주변에서 밤(栗)도 28개나 흩뿌려져 있었다. 이 무덤에 다호리 1호묘라는 이름이 붙었다.
전동용 체인블록 삼발이로 목관을 들어올리자 더욱 깜짝 놀랄만한 유구가 보였다.
목관이 놓인 바닥면에 조성된 약 60㎝의 작은 구덩이(요갱·腰坑)였다. 그런데 그 구덩이에 부장품을 한가득 넣은 ‘대나무 바구니’(죽협·竹협)가 들어있었다.
도굴범은 상상이나 했으랴. 무거운 목관을 들어냈어야 보이는 ‘대나무 보물 바구니’를….
바구니 속에는 칠을 칠한 각종 무기류와, 쇠도끼 등 철기류, 그리고 중국(전한)거울·허리띠고리·오수전 등 중국제 물건이 가득했다. 특히 기원전 119년 처음 주조된 ‘오수전’ 등은 전한시대(기원전 202~기원후 8)의 유물이었다. 다호리 유적의 연대가 기원전 1세기 무렵이고, 무덤의 주인공이 한나라와의 교역을 주도한 변진 소국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자료가 된다.
■2100년 전의 붓과 지우개
다호리 목관묘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붓과 지우개용 칼, 그리고 저울의 부품인 겁마 등이라 할 수 있다.
대나무 바구니 속에서 5점이 확인된 붓은 같은 형태와 같은 크기였다. 특히 23㎝ 길이가 눈에 띈다. 중국 후한의 왕충(27~100?)의 <논형>은 “지혜를 갖춘 이는 세치의 혀와 1척의 붓으로 일한다(知能之人 須三寸之舌 一尺之筆)”고 했다.
그런데 왕충이 살았던 한나라의 1척은 약 23㎝였다. 중국에서 출토된 전국시대~한나라 시대 붓의 크기는 대략 22~25㎝ 정도이다. 오히려 다호리 출토 붓이 ‘지능인이라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할 한나라 붓’에 완벽하게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다호리 출토 붓은 나무를 깎아 만든 뒤 옻칠을 했고, 양쪽에 붓털을 끼운 형식이었다. 한쪽만 붓털을 끼운 중국 붓과 사뭇 다르다. 독자적인 붓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붓대의 양쪽 끝단과 가운데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마도 필가(筆架·붓을 걸어놓는 기구)에 걸 수 있도록 만든 것이리라.
붓이 오늘날의 연필이라면, 붓과 함께 출토된 손칼은 지우개라 할 수 있다.
지우개용 손칼은 옻칠을 한 칼집에 들어있었고, 한쪽에 둥근 손잡이가 달려있다. 그렇다면 이 칼로 지우개용이라는 증거가 있을까. 중국 후한의 유희가 편찬한 <석명>은 “서도(書刀), 즉 글씨에 사용하는 칼은 간찰(편지)의 오자를 지우는데 사용하는 칼(給書簡札 有所刊削之刀也)”이라고 풀이했다.
아닌게 아니라 중국의 쓰촨성(四川省) 톈후이산(天回山) 유적 출토품 가운데는 ‘서도(書刀)’ 명문이 새겨진 ‘지우개용 칼’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호리의 칼 역시도 ‘지우개용’이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기야 오수전과 중국거울 등 한나라와의 교역에서 필수적인 것이 문서이다. 관련사료를 보자.
“기원전 109년 (한반도 남부의) 진번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황제를 뵙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의 우거왕(?~기원전 108)이 한나라와의 교역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했다.(又擁閼不通)”(<사기> ‘조선열전’)
다호리 붓과 지우개칼은 <사기>의 내용을 입증해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청동링의 정체
이건무 전 청장이 주목하는 유물이 또 한 점 있다. ‘겁마’이다. ‘겁마’는 천칭(양팔 저울)에 물건을 올려놓고 무게를 달 때 사용하는 일종의 저울추이다. 한쪽 저울에 (재고 싶은) 물건을 올려놓고, 다른 저울에 겁마(저울추)를 올려놓으면서 무게를 단다
가락지 형태인 ‘겁마’는 다호리 ‘대나무 바구니’에서 4점 확인됐다. 붓과, 지우개용 칼, 오수전과 함께 일렬로 4점 노출되었는데, 처음에는 청동 허리띠고리의 부품이나 칼집 장식품인 줄 알았다.
그런데 4점의 무게를 달아보니 짚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들 청동가락지 4점의 무게가 22.73g, 11.55g, 10.25g, 5.2g이었다. 이것을 두 쌍(22.73g과 11.55g, 10.25g과 5.2g)으로 본다면 거의 2대1의 무게비율이 아닌가.
이건무 전 청장은 중국의 출토예를 살펴보다가 무릎을 쳤다.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의 좌자공산(左家公山)과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 펑황산(鳳凰山) 유적 등에서도 다호리의 출토품과 같은 겁마가 확인되었다는 사실을 본 것이다.
그런데 중국 출토 겁마의 무게도 1/2 비율로 줄어드는 현상을 보였다. 그렇다면 다호리 출토품 역시 겁마로 보는게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게다가 이 겁마 4점이 붓과 지우개용 칼, 오수전 등과 함께 출토된 것도 심상치 않다. 교역품의 무게를 달고(겁마), 또 그 사항을 기록하며(붓과 지우개 칼) 값을 쳐준(오수전) 증거가 되지 않을까.
■비실용적 쇠도끼의 용도는?
‘대나무 바구니’ 속에서 확인된 철도끼가 주목거리다. 그렇지 않아도 다호리에서는 고사리 무늬 철기와 각종 철제 농기구, 철도끼 등 다양한 철 관련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런 철제 유물 가운데 ‘대나무 바구니’ 속 철도끼가 특히 눈길을 끄는 이유가 있다.
다른 철기들은 덩이쇠를 두들겨서 강하게 제작한 이른바 ‘단조철기’인데, 이 대나무 바구니 속 도끼 6점은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만든 ‘주조철기’라는 것이다.
이 중 4점은 2매 1조로 묶여있었고, 그중 한 조의 쇠도끼는 거푸집(내형)에 들어있는 채로 들어있었다. 도끼를 주조한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구니’에 넣었다는 뜻이다. 이게 수상쩍다는 것이다. 두들겨서 만든 단조도끼와 달리 주조도끼는 실용품으로 쓰기 곤란하다.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실제 쓰이지도 못할 도끼를 막 주조한 그대로 바구니에 넣어주었을까.
이 대목에서 중국측 사료를 인용해본다.
“(변진의) 나라에서 철이 나는데 (마)한·예ㆍ왜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시장에서는 철을 중국의 돈처럼 사용한다.”(<후한지> ‘진한조’, <삼국지> ‘변진조’)
변진 사람들은 철기를 수출했고, 시장에서 철을 돈으로 썼다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두들겨서 강하게 제작한 철기는 수출했고, 주조한 도끼는 교역의 지불수단, 즉 돈으로 활용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건무 전 청장은 “단조도끼는 녹여서 재활용하기 곤란하지만 주조도끼는 녹여서 다른 철제품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뒷받침했다.
■제기에 담긴 감과 뿌려진 밤
다호리 1호묘의 또하나 재미있는 포인트는 바로 ‘감’과 ‘밤’의 이야기다. 붓과 지우개용칼, 겁마, 그리고 수많은 철기 등은 물질문명의 증거지만 ‘감’과 ‘밤’은 정신문명의 상징이다. 정신문명이란 ‘2100년전의 장례와 제사’를 가리킨다. 조상신과 하늘신을 존숭한 당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앞서 밝혔듯이 다호리 목관묘에서는 제사용 용기 위에 감 3개체와, 관 주변에 뿌려진 밤 28개체가 출토됐다.
여기에 목관의 몸체와 뚜껑의 한쪽 옆면에 판 ㄴ자형 구멍과, 목관의 한쪽면(피장자의 머리부분)에 위아래로 판 각 2개씩의 홈도 심상치 않았다. 무덤 구덩이에 떨어져있던 굵은 동아줄도 수상쩍었다.
이런 정황증거를 토대로 당시 발굴책임자였던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이 2100년 전의 장례식 장면을 복원해보았다.
기원전 1세기~기원 전후 사이 다호리 일대를 다스린 소국의 수장이 별세했다. 장례절차에 들어간 유족들은 350년 된 참나무를 목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 통나무를 잘라 내부를 구유형으로 파낸 뒤 몸체와 뚜껑으로 사용했다.
그런 다음 고인의 시신과 각종 부장품(동검, 철검, 목합, 유리구슬, 목걸이, 철정 등)을 넣은 뒤 목관을 밀봉했다. 그리고 목관 구멍과 홈에 동아줄을 ×자로 걸었다. 운구가 시작됐다. 목관의 줄을 여러 사람이 끌어 장지까지 옮기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통나무를 깔아 두었을 것이다. 애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인이 가는 길을 쫓아왔을 것이다. 마치 상여행렬처럼….
무덤은 이미 조성해둔 상태였다. 목관이 들어갈 묘광의 바닥에는 또다른 구덩이(요갱)을 만들어 놓았다. 그 구덩이에 고인이 평소 애지중지했던 각종 물품을 가득 담은 ‘대나무 바구니(竹협)’를 부장했다. 이 바구니에는 옻칠한 각종 무기류와, 쇠도끼 등 철기류, 중국거울, 허리띠고리, 오수전, 말방울, 붓, 지우개용 칼 등도 담았다.
이어 각종 제기에 감 등 과일과 같은 다양한 제물을 담아 묘광 바닥에 넣었다. 그런 다음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는 1차 제사를 올렸을 것이다. 다음 절차는 하관이었다. 굵은 밧줄을 이용하여 서서히 목관을 내려 안장했다. 그런 다음 운구와 하관에 쓰인 밧줄을 끊었다. 끊어진 밧줄 위로 밤을 뿌렸다. 이어 목관과 토광 사이에 흙을 뿌려 덮은 뒤 다시 칠기와 철기 등을 올려놓았다. 여기서 2차 제사를 지냈다. 다시 목관 위에 다시 제수용품을 담은 칠기 제기들을 배열한 다음 마지막(3차) 제사를 지냈다.
■제사에 진심이었던 사람들
무슨 제사를 3번이나 지냈을까. 예부터 동이족은 예(禮)의 나라, 군자의 나라로 통했다. 한나라 때 자전인 <설문해자>는 “동이는 대의를 따르는 대인이며, 군자들이 죽지않는 나라”라고 했다. 공자(기원전 551~479)는 아예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인 구이(九夷)에 가고 싶다.”(<논어>)고까지 했다.
<후한서> ‘동이전’과 <삼국지> ‘동이전’ 등을 보면 더 구체적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제기(조두·俎豆)를 쓰고 장례는 5개월이나 지내는데 오래 끌수록 번성한 가문”(부여)이라 했다. 또 “장사를 후하게 지내는데, 금은비단을 죽은 자에게 보낸다”(고구려)고 했다. “오월에 씨를 뿌릴 때 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춘다”(마한)고까지 했다.
지역마다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장례를 극진하게 치르고 제사에 ‘진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호리에서 동이족이 음식을 먹을 때까지 썼던 다양한 제기가 다수 발견된 것이 이채롭다. 특히 감 3개가 담긴 제기가 눈길을 끈다. 하관 때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자료이다. 목관 밑에 뿌려진 밤 28개는 또 어떤가. 하관 때 제의행위의 일종으로 뿌린 것이다. ‘감’과 ‘밤’은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과일이다. 대추와 함께 제삿상에 올리는 ‘삼색과일’이기 때문이다. 2100년 전 다호리에서 제삿상의 기본차림을 확립했다는 뜻이다.
■효심의 열매, 가르침의 과일
왜 하필 밤과 감인가. 우선 ‘밤’을 보자. 우리네 제사상에 밤을 빼놓지 않고 올린 까닭이 있을까.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밤송이 하나에 보통 3개의 알이 들어있는 것과 관계가 깊다. 즉 제사 때 삼정승(영의정·우의정·좌의정)을 배출시켜 달라는 염원에서 밤을 올렸다는 것이다. 더 유력한 설이 있다.
밤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은 한결같은 효심의 열매라는 것이다. 즉 밤은 싹이 틀 때 껍질은 땅 속에 남겨 두고 싹만 올라온다. 그런데 땅 속에 남아있던 껍질은 썩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다. 굉장히 신기한 현상이다. 그러니 예로부터 밤나무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는 기특한 나무로 여겼다.
그래서인가. 밤나무 목재는 신주(神主)와 위패, 제사상 등 제사용품의 재료로 쓰였다. 2100년 전 다호리 사람들도 돌아가신 부모님의 은덕을 절대 잊지 않겠다면서 밤을 목관 주변에 뿌렸을 것이다.
‘감’은 어떤가. 사실 감나무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감나무를 그냥 심기만 해서는 절대 탐스러운 감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어미보다 훨씬 못한 땡감이 달릴 뿐이다. 그래서 감나무와 비슷한 고욤나무를 ‘대리모’로 고용해야 한다. 고욤나무를 밑나무로 하고 감나무 가지를 잘라다 접을 붙여서 대를 잇는다. 감나무는 정성껏 남의 자식을 키우는 고욤나무 덕에 탐스런 열매를 맺는다.
감과 고욤의 이야기는 사람은 다른 이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인격체로 거듭난다는 교훈을 전하고 있다. 이 순간 막 돌아가신 조상을 묻으며, 슬픔을 삼킨채 제사를 올렸던 다호리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고인의 은덕과 조상의 유지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장례와 제사를 치렀을 것이다.
■2100년전과 현재의 다호리
얼마전 경남 창원시가 다호리 고분군 관련 학술대회를 열었다. 종합정비사업의 방향과 타당성을 확보해서 유적의 정비와 복원을 추진하기 위한 과정이란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1988년 다호리 1호묘 발굴 직후(9월) 그 일대 3만2000평(104,676㎡)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랬으면 이후 어련히 잘 보존·활용되었겠거니 여겼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국고대사의 공백기라는 2100년 전을 증거해줄 핵심유적이라는 ‘다호리’는 어떤가. 필자가 얼마전 창원에 가면서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창원의 가볼만한 곳’을 검색했는데, ‘다호리’는 겨우 말미에 나오지 않았다.
기사를 쓰면서 다시 인내심을 갖고 들춰봤더니 겨우 말미에 ‘다호리 고분군 마을’로 검색됐다.
34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적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대접이다. 이런저런 발굴보고서와 논문 등을 들춰봤더니 1988년 이후 모두 30여차례 시·발굴이 이어졌고, 초기철기~삼국시대 초기 무덤만 165기 확인됐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맨처음 확인된 목관묘와 같은 시기의 무덤이 146기 정도였다.
그렇게 보면 너무도 강렬했던 첫 발굴의 기억 때문에 후속 발굴 성과가 가려진 것일까.
1988년 지정된 사적의 범위는 다호리 고분군으로 묶을 수 있는 면적의 50% 정도라 한다.
따지고보면 2100년 전 다호리 마을에 1호묘의 주인공만 살았겠는가. 동시대를 살았던 마을 주민들의 삶도 그 유적 어딘가에 그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마침 이정근 국립김해박물관장이 2100년 무렵 다호리 마을의 생활 및 무덤공간 등을 추정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관장은 논문의 말미에 2008년과 2019년의 다호리 항공사진을 실었다. 이관장의 글은 논문답지않게 아주 ‘센치’하다.
“사적으로 지정된 범위는 그나마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벗어나면 각종 개발로 전혀 다른 경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게 사라진 곳에는 2000년 전 다호리 주민들의 중심공간으로 추정되는 능선과 저습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면 또 무엇이 사라질까. 오늘도 환경오염과 기온상승으로 빙산이 녹고 있는 북극의 조그만 유빙 위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북극곰을 보듯, 걱정스런 눈으로 다호리를 바라본다.”
모쪼록 이런 걱정이 기우가 되도록, 뒤늦게나마 제대로 된 보전·활용대책이 마련되기를 바란다. ‘창원의 가볼만한 곳’에 맨 첫번째로 꼽히도록….(이 기사를 위해 발굴 당시 책임자였던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이정근 국립김해박물관장, 김미영 경남연구원 조사연구위원 등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경향신문 히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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