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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세종대왕은 성군이 아니었다

 팟 캐스트 14회는 세종대왕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만고의 성군’이나 ‘해동의 요순’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감히 ‘세종은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제로 이야기할까 합니다.
 물론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습니다. 백성을 긍휼히 생각하는 세종의 마음씨 역시 실록에 나와있는 그대로입니다. 죄인들의 귀휴제도를 만들었고, 관노비들의 출산휴가를 늘렸으며, 심지어는 그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상상이나 하십니까. 세종시대에 관노비의 남편에게 30일 간의 출산·육아휴가를 주었다는 사실을…. 더욱이 형을 살고 있는 죄인들의 목욕관리까지 신경을 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치세에 가려진 반전의 역사도 있습니다. 그 시대에 있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른 것도 아닌, ‘실록’을 중심으로 풀어가려 합니다.
 세종의 시대에 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으며, 그 시대에 도적이 들끓어 내탕고와 봉상시까지 털렸다는 이야기, 그래서 도둑의 발뒤꿈치 근육을 자르는 이른바 ‘단근형’의 형벌을 채택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혹형 중의 혹형이라는 능지처사의 형벌이 세종시대에 가장 많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실록>을 뒤져보니 무려 60명이 능지처사로 죽었답니다. 이들 대부분은 부모, 자식이나 주인을 죽인 죄, 즉 강상죄를 범한 이들이었습니다.
 효를 최고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사회였기에 그럴 수도 있었다구요. 하지만 세종임금이 누구입니까. 만고의 성군이 아닙니까. 심지어 참혹한 고문 끝에 허위자백까지 받아낸 뒤 능지처사의 처벌을 내린 케이스도 있었습니다.
 세종시대에 이 무슨 해괴한 일이었을까요. 팟캐스트 14회가 전합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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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은 '해동의 요순'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