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 12회는 ‘고려·조선판 4대강 공사가 남긴 교훈’입니다.
고려·조선에 무슨 4대강 공사냐구요. 물론 4대강 공사를 벌인 것은 아니고, 4대강 공사의 과정을 쏙 빼닮은,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른 국책사업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운하공사입니다.
고려·조선 때 국가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는 바로 세곡(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서울(개경 혹은 한양)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육로로는 어려운 일이었기에 주로 해로, 즉 조운선을 이용해서 옮겼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고려·조선 때 안흥량으로 일컬어졌던 지역, 즉 지금의 충청도 태안 앞바다가 가장 큰 고비였습니다. 안흥량 해역은 물살이 험하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운선들이 번번이 침몰하고 선원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미곡이 적게는 수백석에서 많게는 1만석까지 수장되는 등 큰 낭패를 겪었습니다. 예컨대 1403년(태종 3년)에는 조운선 34척과 선원 1000여 명, 쌀 1만석이 수장되는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조선판 세월호 사건’이라 일컬을 만한 사건입니다.
이같은 사고가 고려시대에도 빈발했을 겁니다. 그러자 고려 인종 때인 1134년 지금의 태안 지역에 운하를 뚫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고, 급기야 운하공사가 시작됐습니다. 지금의 천수만~가로림만을 뚫는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사는 화강암 암반층과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운하공사는 결코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조선 태종 때 책사 하륜은 일종의 갑문식 공법이라는 당시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탁상공론이었습니다. 현장에 답사했던 사람들마다 “공사구역이 단단한 돌로 이뤄졌기 때문에 공사가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냈는데 공사는 강행됩니다.
태종의 신임을 한몸에 받던 하륜의 계책이라 어느 누구도 공사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하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 10여 일이라는 그야말로 속도전을 방불케하는 단기간의 공사가 끝났습니다. 그러나 금세 이 공사가 무리한 공사였음이 드러났습니다. 실록을 보면 “헛되이 백성의 힘을 썼을 뿐 조운은 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자 그렇다면 하륜의 계책은 왜 실패했을까요. 그리고 이 운하공사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회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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