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이기환의 팟캐스트 ‘흔적의 역사’ 11번째 이야기는 ‘역사속 패션피플과 성형미인’입니다.
 요즘 겨울철을 두고 ‘성형의 계절’이라 합니다. 그 뿐입니까. 우리나라는 어느새 ‘성형 강국’이 되었고, 성형관광의 메카로 발돋움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최근의 트렌드일까요?
 아닙니다. 원래 성형은 동이족의 전유물이었답니다. 증거가 있냐구요? 있습니다. 그것도 움직일 수 없는 고고학 증거들입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한번 성명해드리겠습니다. 동이족은 성형 민족이라 할만 합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또 하나 궁금해 하실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미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역사속 패셔니스타’는 누가 있었을까.
 그렇습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부터 ‘개미허리’ 여인을 미인의 기준으로 삼았답니다.      오죽했으면 ‘탐연세요(貪戀細腰)’, 즉 ‘가느다란 허리를 탐한다’는 고사가 <묵자> ‘겸애중(兼愛中)’에까지 나올까요.
 당대 사람들은 가는 허리를 만들려고 하루에 한끼씩만 먹으며 초절정 다이어트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굶어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지요. 한나라 성제의 후궁인 조비연은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을 정도로 몸매가 가냘팠답니다.
 양나라 시대의 여인 장정완의 허리 사이즈는 1척6촌, 즉 15인치(40㎝)도 안됐다고 합니다. 당대의 미인을 뜻하는 고사성어는 바로 ‘버들가지처럼 가는 허리에, 눈꽃같이 새햐안 피부’를 뜻하는 ‘세요설부(細腰雪膚)’였답니다.
 ‘긴머리’를 향한 로망도 대단했답니다.
 특히나 고구려·신라인들의 긴 생머리에 중국대륙이 열광했다는데요. 신라인들은 머리카락을 중국에 공물로 보내거나 수출했다는군요. 1960년대 가발수출로 외화를 벌었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또 있습니다. 조선의 선조 시대 때는 남자들까지 귀고리를 다는 풍습이 유행처럼 번졌다는데요.
 오죽했으면 선조임금이 비망기를 내려 “요즘 사내아이들까지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면서 “적발되면 엄벌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겠습니까.
 머리에 가체를 올리는 풍습도 사치풍조의 대명사였습니다. 심지어 무거운 가체 때문에 13살 어린 신부가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는 기록(이덕무의 <청장관전서>)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영조와 정조 임금은 “연좌의 죄목까지 써서 이 말도 안되는 풍조를 엄금하겠다”고 여러 차례 명령을 내렸지만 ‘유행을 어찌 강제로 막을 수 있느냐’는 여론에 밀려 끝내 손을 들고 맙니다.
 가체를 막자 이번에는 본발(본머리)을 기르는 풍습이 슬그머니 유행으로 등장한겁니다. 그러니 임금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정조는 한마디 합니다.
 “지금 여기 있는 신하들이 각자 집에 가서 정해진 법도를 지킨다면 일반 백성들도 반드시 본받을 것이다.”
 세속의 유행을 정부차원에서 강제로 막기란 사실상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한 겁니다.
 다만 지도층의 솔선수범에 기대를 건 것이죠. 기억나시죠. 1960~70년대 막대 자로 여성의 미니스커트 길이를 재고, 장발을 단속한다며 대명천지에 울타리에 쳐놓고 장발자들을 몰아넣었던 추억….
 씁쓸한 기억들이죠. 지금 옛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몸소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백성이 믿지 않는다”(<한비자>)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지나침이 있다.”(<맹자>)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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